120.반격
이엘과 시안느가 카일과 세인을 노려보듯 응시했다. 두 사람은 언제부터인가 같은 말을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거구인 카일의 앞에 앉은 세인의 작은 몸은 카일이 두른 커다란 피풍의에 가려져 있었다. 그 상태로 시안느는 밖으로 얼굴만 쏙 내밀고 앉아 말을 몰고 있었다.
덕택에 그동안 아슬아슬하게 말을 몰던 카일의 모습은 왠지 안정되고 여유로워 보였다.
처음에는 시안느와 이엘은 여인으로서 사내에게 과감하게 몸을 맡기는 세인의 모습에 얼굴을 찌푸렸지만,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세인의 마음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중급 엑스퍼트에 오를 기회를 포기한 상황에서 새로운 방법이 생겼으니, 더는 포기하고 싶지 않을 터였다. 더군다나 몸을 맡길 상대가 바로 카일이었다.
그녀로서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아니 중급에 오를 수만 있다면 어떤 여인이라도 주저하지 않고 몸을 맡기려 할 것이다.
“춥다….”
앞서가는 카일과 세인의 모습에 이엘이 몸을 감싼 피풍의를 더욱 여미며 중얼거렸다. 시안느 역시 이엘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피풍의를 매만졌다.
“편하게 기대셔도 됩니다.”
부드러운 카일의 음성이 이엘과 시안느의 마음을 더욱 침울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 모두 언젠가 카일의 저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바로 고원 위 절벽을 오를 때였다.
두 사람의 머릿속에는 아직 그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도 될까요?”
“압축된 오러를 밀어 넣는 일은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자세가 불편해서는 오래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 그럼. 실례하겠어요.”
세인이 앞으로 숙이고 있던 허리를 세우고 카일의 가슴에 등을 조심스럽게 기댔다.
카일은 잠이라도 청하려는 것처럼 평온하게 눈을 감았다.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얼굴을 찡그렸다가 피길 반복했다. 도저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망할 놈의 말. 왜 지치지도 않는담.’
이엘은 티 나지 않게 아랫입술을 삐죽였다. 카일과 세인을 태운 말은 다각다각 경쾌하게 잘만 걸었다. 샤이어 종 명마였으니 쉽게 지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도 태우지 않은 세인의 적갈색 말은 두 사람분의 짐을 싣고 일행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지금 카일의 손은 어디에 있을까?’
무심결에 든 생각에 시안느가 뺨을 불그스레하게 붉혔다. 상상을 떨치려 머리를 흔들던 그녀는 이엘과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이 서로의 달아오른 낯을 보다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곤 연신 손부채질을 했다.
이렇게 두 사람이 음흉한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카일은 고삐를 쥔 세인의 손을 잡고 오러를 집중하고 있었다.
“마음을 편안히 가지세요. 약간 이질적인 오러가 느껴질 수 있지만, 그리 불편하진 않을 겁니다.”
“염려치 마세요. 아파도 참을 수 있어요.”
세인이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는 듯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심호흡한 카일은 세인의 손을 잡고 신중히 오러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지금 카일이 시전하는 방식은 그도 처음이라, 집중력을 최대한 끌어올려 오러를 다뤄야 하는 고된 작업이었다. 더구나 지금은 말을 타고 움직이는 중이라 더 세심하게 오러를 다뤄야만 하기에 다른 생각은 할 틈이 없었다.
카일의 손을 통해 빠져나간 오러는 세인에게 물처럼 스며들어 그녀의 오러와 만났다.
카일의 고밀한 오러는 놀랄 만큼 자연스럽게 세인의 오러에 섞여들었다.
“된다.”
카일의 작은 목소리가 환희로 물들었다. 몸 안에 형성된 오러는 원칙적으로 서로를 배척한다. 검술에 따라 서로 다른 경로로 움직이며 압축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카일은 108개의 마나 포인트를 통해 모인 마나를 정제하여 오러로 만들기에, 그보다 적은 숫자의 마나 포인트를 거친 오러는 카일의 오러에 포용된다. 때문에 카일의 오러는 특별하고 특이한 오러였다.
이러한 특이점이 생성되는 건 바로 연공법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카일은 검술보다는 태극권을 통해 마나를 체내에 흡수했다. 다른 수련법이 손과 발, 아랫배와 가슴을 이어 마나를 모은다면, 카일은 전신에 존재하는 108개의 마나 포인트 전체를 통해 마나를 쌓았다. 하여 다른 사람보다 쉬이 경지를 개척할 수 있었다. 이미 개척된 마나 포인트를 연결해 합일만 시키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공법도 마냥 쉬운 건 아니었다. 각 마나 포인트에 쌓인 마나가 서로 밀어내는 반발력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한 번 경지를 넘으면 마나가 쉽게 합쳐져, 많은 양의 오러를 단번에 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 단계. 즉, 중급에서 상급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그만큼 큰 반발력을 극복해야 하므로 경지를 돌파하기가 지극히 어렵다는 말이었다.
“어떠십니까?”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러를 좀 더 주입하겠습니다.”
섬세하게 오러를 조정한 카일은 방금보다 강하게 오러를 밀어 넣었다.
찌릿-
카일의 커다란 손안에 잡혀 있던 세인의 손이 감전이라도 된 양 파르르 떨렸다.
“괜찮으십니까?”
떨리는 세인의 손가락에 카일이 화등잔만 하게 눈을 뜨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니, 아니에요. 그냥 전기가 오듯 찌릿한 느낌이 든 것뿐이에요. 참을 수 있어요.”
“다행입니다. 그럼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카일이 다시 오러를 주입하자 세인의 손끝이 또다시 파르르 떨렸다. 마치 작은 번개 정령이 손안에 갇혀 장난을 치듯 손바닥을 간질거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참을 수 없는 간질거림에 세인이 참았던 웃음을 터트리려는 순간, 뒤에서 따라오던 워드가 카일의 옆으로 말을 몰아왔다.
“몬스터다.”
카일은 곧장 오러의 주입을 중단했다. 돌변한 카일의 기색에 워드는 침착히 나머지 정보를 읊어주었다.
“앞쪽과 뒤쪽에서 다가오고 있다. 후방에 있는 놈은 제법 강한 기운을 지닌 놈이다. 곧장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다. 아무래도 놈들에게 쫓기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워드가 제법 심각하게 말했다.
“세인 아가씨. 말을 잠시 멈춰주세요.”
세인은 혼란스러워 보였으나 고삐를 당겨 말을 세웠다. 그리곤 아연히 말했다.
“몬스터? 그럴 리가 없어요. 이 주변은 거대한 베링 산맥이 자리 잡고 있어요. 몬스터가 자리를 잡는 건 힘들 텐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세인은 눈썹을 우그러트렸다.
베링 산맥은 남쪽에서부터 시작해 동북 방면으로 길게 이어지는 거대한 산맥이자 제국으로부터 왕국을 보호해주는 천연의 방벽이었다. 게다가 험준할 뿐만 아니라 척박해 인간은 물론 몬스터가 군집을 이루며 살아가기 힘든 곳으로, 달리 베링 협곡이라 불렸다.
“지금은 설명을 들을 시간이 없는 것 같군요.”
카일이 세인의 손을 놓고는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뒤에서 오는 놈들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혼자 남겠다는 말인가요?”
“그게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순간부터 워드에게 집중하고 있던 이엘과 시안느도 다급히 말을 몰아 카일의 곁으로 다가왔다.
“몬스터입니다. 상단으로 가세요.”
“몬스터….”
입을 벙긋거리던 시안느와 이엘은 이내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카일에게는 와이번이 있으니, 먼 거리에서도 쉽게 몬스터를 탐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머뭇거리던 시안느가 한 가지 의견을 내놓았다.
“차라리 여기서 함께 싸우는 것이 좋지 않나요? 몬스터 정도는 이곳에 모인 사람들만으로도 충분할 거예요.”
“어차피 뒤쪽은 숫자가 많지 않습니다. 걱정 마시고 먼저 가세요. 그리고 상단이 있는 앞쪽에도 몬스터가 있는 거 같습니다. 자칫 상단 사람들이 큰 피해를 입을지 모릅니다.”
카일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상단으로 향했다. 거리가 멀지 않아 눈으로도 상단의 후미 행렬이 평안하게 걸어가는 광경이 보였다.
“여기서는 보이지 않아요.”
세인이 갸우뚱거렸다. 그러나 이엘과 시안느는 세인의 말을 무시하듯 카일에게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하세요.”
“상단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카일과 오크 랜드까지 동행했던 시안느와 이엘은 그에 대한 걱정이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세인은 달랐다. 그녀는 아직 카일이 싸우는 모습을 직접 본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혼자 남는 것보다는 제가 같이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몬스터를 처리하고 돌아가려면 말이 있어야 하잖아요.”
“괜찮습니다. 여긴 저 혼자가 편합니다. 정 상대하기 힘들면 몸을 피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상단에 합류하세요. 아가씨께서도 시안느 경과 함께 영애를 지켜주십시오.”
카일이 재차 거절하자 세인은 시무룩해졌지만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세인에게 미소 지어 보인 카일은 워드에게 부탁했다.
“앞쪽에서 다가오는 몬스터가 걱정입니다. 세 분을 지켜주십시오.”
“염려하지 마라. 동행하는 이상 동료라 생각할 테니.”
“감사합니다.”
카일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가볍게 발을 굴렀다. 마치 큰 걸음을 걷듯 달려가더니 순식간에 멀어져 버린 카일은 갑자기 방향을 확 바꿔 좌측 언덕 위로 사라져 버렸다.
카일이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엘이 곧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우리도 서둘러 상단과 합류해요.”
넋을 빼고 있던 다른 사람들도 그제서야 고삐를 움켜잡았다. 그리곤 곧장 상단을 향해 질주했다. 다급히 말을 몰아가던 와중, 이엘은 별안간 눈매를 둥글게 휘었다. 자신의 안전을 챙기는 카일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카일은 그래도 날 생각하고 있었구나!’
세인과 워드에게 자신을 부탁하는 모습을 떠올린 이엘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 * *
검은 여우 동부방면 3지대 소속의 칼빈은 빠르게 숲속을 달려 나갔다. 이번 임무는 크로노스왕국 남부 끝단에 위치한 샤론 마을을 지도상에서 지우는 일이었다.
이번에 동원된 인원은 모두 30여 명으로, 엑스퍼트 초급에서 중급 사이의 실력자들이 대거 동원된 작전이었다.
작은 실수도 용납할 수 없는 검은 여우들은 첫 번째 제거 대상인 보일의 심리를 흔들기 위해, 먼저 5명을 그의 집으로 보냈다. 타겟의 어린 아들을 잡기 위함이었다. 이곳에 남은 25명만으로도 작은 남작가 하나를 지우기엔 충분했다. 여기에 베일에 싸여 있는 쉐도우, 그중에서도 가장 강한 열 명의 그림자 중 하나가 이번 임무에 투입된 만큼, 실패란 있을 수 없었다.
가장 첫 번째 타겟은 바로 이 마을에서 가장 강력한 실력을 가진 보일이란 자로 무려 소드 엑스퍼트 상급의 실력자였다.
구석진 마을에 이런 실력자가 숨어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더 어처구니없는 건 상급 엑스퍼트가 등을 보이며 도주를 감행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보통 실력이 높으면 자부심과 긍지가 강해 도망보다는 전투를 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무작정 줄행랑을 치는 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자는 상급 엑스퍼트임에도 실력이 높다 자만하지 않고 불리함을 알자 곧장 도주를 감행했다. 이런 자가 원한을 잊지 않고 보복하려 든다면 검은 여우, 아니, 제국에 큰 피해를 줄 것이다. 그러니 이번에 반드시 죽여야만 했다.
하지만 칼빈은 걱정하지 않았다.
이곳에 모인 25명의 검은 여우는 모두 혹독한 수련을 거친 정예요원이었다. 비록 상대가 상급 엑스퍼트라 해도 놈을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흩어져라. 놈을 찾으면 즉시 신호를 보내라. 명심해라, 놈은 상급 엑스퍼트다. 놈과의 교전은 절대 금지다. 놈의 위치를 파악한 뒤, 최대한 도주하지 못하게 늦추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흩어지는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린 칼빈은 앞장서서 놈의 흔적을 추적했다.
삐이이
빽빽하게 들어선 블루 우드로 인해 대낮인데도 캄캄한 숲속으로 낮은 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찾았다. 놈을 넓게 포위한다. 요새의 병력과 합류하지 못하게 동쪽으로 몰아.”
칼빈은 부관에게 명령을 내렸다.
삐-
부관이 피리를 불자 높고 낮은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약속된 음의 높낮이로 멀리까지 신호를 보내는 것은 검은 여우 특유의 의사소통 방식이었다.
“가자.”
칼빈과 부관은 서둘러 동쪽으로 달려갔다. 쉐도우라 불리는 노인은 이미 동쪽에 매복해 상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허억.”
그때였다.
나무 위에서 검은 물체가 뚝 떨어져 내렸다.
칼린은 반사적으로 검을 찔러 넣었다. 급작스러운 순간에도 전광석화처럼 빠른 찌르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