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116화 (116/404)

116.가문에 진 빚

“녀석이 만든 도자기란 물건을 아실 겁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여기 없다.”

“귀족들이 그 도자기 한 점을 얼마에 사는지 아십니까?”

“너와 말장난할 시간 없다.”

코퍼의 냉엄한 일갈에 브린이 뜸 들이길 멈추고 말을 뱉었다.

“한 점당 5~6골드입니다. 카일에게 구매한 도자기를 되파는 자들이 3배인 5~6골드에 팔고 있지만, 워낙 구하기 어려워 웃돈을 주고도 구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브린의 말은 이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전부 놀라게 하기엔 충분했다.

도자기란 물건이 귀족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설마 그 정도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는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코퍼 용병대가 아무리 큰 의뢰를 성공시켜도 한 건당 7~8골드를 넘기긴 어려웠다. 그런데 도자기 한두 점의 가격이 코퍼 용병대원 5명이 목숨을 걸고 의뢰를 성공시켰을 때 받는 의뢰비에 맞먹었다.

물론 아일론 상단에서 도자기로 큰 이익을 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폭리를 취하는 것도 아니었다. 샤론 마을에서 왕도까지 운송하더라도 모든 도자기와 옹기가 안전하게 도착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깨지거나 이가 나가 팔 수 없게 되었다. 상품 가치가 떨어지게 된 물건은 과감히 포기하고, 무사히 살아남은 것들을 화려하게 포장해 판매했다. 하여 상당한 추가비용이 들어갔다. 하지만 브린이 이런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이것도 모르는데, 도자기를 빚는데 고령토라는 특수한 재료가 필요하단 점을 파악하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각 상단. 특히 왕국 3대 상단이 도자기 제조법을 알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운석검보다는 도자기 제조법을 달라고 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브린의 말에 코퍼의 안면이 찌그러졌다. 평생 용병으로서 신용을 지켜왔고 이번 일도 강요가 포함되어 있지만 카일에게 그리 나쁘지 않은 조건이라 스스로 판단했다. 하지만 브린의 말대로 도자기의 제조법을 받아낸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강탈만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검 한 자루 받아낸다 해도 이후에는 어쩌실 생각입니까? 아무리 선의라고 둘러대더라도 운석검입니다. 분명 보일 대장이 문제를 제기할 겁니다.”

하긴 운석검은 보통 가치를 지닌 물건이 아니었다. 단순한 호의로 내어줬다 해도 누가 믿겠는가?

“넌 도자기에 대해 어떻게 알게 된 것이냐? 우리 모두 이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야 도자기는 왕도 귀족들에게만 일부 팔리고 있으니 우리 같은 용병들이 알 수 없지요. 저도 왕도에서 온 상인에게 제안을 받은 겁니다.”

“우리 몰래 의뢰를 받았단 말이냐?”

“그럴 리가요. 바로 거절했습니다. 저도 바보가 아닙니다. 도자기 운송 덕분에 아일론 상단의 상행이 늘어났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우리도 제법 골드를 만지게 되었으니, 제가 말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브린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코퍼의 눈치를 살폈다.

실제로 아일론 상단은 도자기 수급을 위해 남부 상행을 두 배로 늘렸다. 카일과 관련된 비밀을 최대한 숨기면서, 도자기를 서둘러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자연스럽게 코퍼 용병대의 일거리가 늘었으니 함부로 카일의 비밀을 발설하지 않은 것이다. 다른 상단 특히 왕국 3대 상단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일론 상단은 샤론 마을에 대한 상행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브린은 결코 멍청하지 않았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갈라도 그들이 얻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아주 잘 주지하고 있었다.

“…어쩔 생각이냐?”

“얘기하신 방법을 그대로 쓸 생각입니다. 대신 규모를 조금 더 키워, 상단도 같이 처리해야 비밀을 지킬 수 있을 겁니다. 중간에 카일이란 아이를 구하기도 하고요.”

브린은 코퍼의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이미 코퍼의 눈에는 결심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운석검 역시 대장의 몫이 될 겁니다.”

브린이 사악하게 킬킬거렸다.

* * *

영주 성에 달려갔던 세인이 돌아왔을 때, 카일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북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영을 하려면 필요한 물품입니다. 가죽 천과 아킨스 자작령에 도착할 때까지 먹을 육포와 건량입니다.”

“고마워요.”

“상단이 조금 전 북문을 빠져나갔으니 천천히 뒤를 따라가면 될 겁니다. 상단과는 아킨스 자작령에 도착하면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일정을 공유한 카일은 앞장서서 성을 빠져나갔다. 그 뒤를 워드를 비롯한 세 여인이 뒤따랐다.

“남작가에 가셨던 일은 어떻게 되었나요.”

이엘이 조심스럽게 세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소식만 전달하고 바로 달려왔어요. 나오면서 성안에 비상이 걸리는 걸 보았으니, 아마도 남작님께 잘 전달되었을 거예요.”

“직접 알리지 않으셨어요?”

“제가 전하든 다른 기사분이 전하든 그리 큰 차이가 없는걸요. 오히려 제가 직접 남작님을 만났다면 카일 님에게 부담이 됐을 거예요.”

세인의 말투는 마치 평범한 일상을 전하듯 평온하고 차분했다. 되려 당황한 건 시안느와 이엘이었다.

다핸 남작령은 카일과 세인의 고향이자, 가족이 머무는 곳이었다.

당장 가족과 가문에 위험이 닥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태연한 둘의 모습에 시안느와 이엘은 자신들이 너무 심각하게 굴었나 하는 상념에 잠겼다.

“세인 경은 가문이 걱정되지도 않나요?”

적어도 카일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인 보일이 샤론 마을에 있긴 하나, 보일은 위기가 닥쳤을 때 위험을 벗어날 실력과 능력이 충분했다. 하지만 세인은 카일과는 다른 처지였다. 영주 성에는 영주를 비롯해 그녀의 가족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특히 그녀의 아버지는 기사단장이었다. 영지가 위기에 빠지면 가장 먼저 달려가야 하는 사람인 것이다.

“가문의 일은 영주님께서 잘 해결하실 거예요. 제가 두려워 한다고 달라질 일은 없답니다.”

“그래도 가족이잖아요.”

시안느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가슴을 두드렸다.

그러나 세인은 영 이해하지 못하겠는지, 의아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귀족가에서 성장하셨으면서 가족을 찾다니… 두 분 생각보다 순진하시군요.”

뜻밖의 말에 시안느와 이엘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름답고 순수하게만 보이던 세인이 설마 이런 말을 할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가 뜻하는 이야기를 모르는 것 아니었다.

귀족가의 여인, 특히 가문의 직계가 아닌 여인들의 삶은 팔려가는 가축 신세나 다름없었다. 시안느의 할머니인 슈안이 힐튼 남작의 검술을 훔쳐 가며 자신의 아들을 직계로 만들려 했던 이유도, 가문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시안느가 그린넨 백작에게 파브엘이란 성까지 받을 수 있었던 것도, 그녀가 기사 가문의 직계 혈족으로 인정받아 가문의 검술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인 경에겐 가족이잖아요.”

이엘의 음성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린넨 백작이자 변경백으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힘은 그녀나 그녀의 자매에겐 오히려 독이 되었다.

백작은 여러 귀족들과 혼인동맹을 맺어 많은 부인과 첩들을 두었다. 그리고 여기서 낳은 자식들은 주변 귀족들과 적극적인 혼인동맹을 맺는 데 사용됐다. 이 모든 건 공고한 세력을 구축하기 위함이었다. 상대적으로 기사 전력이 낮은 그린넨 백작 가문이 마파린 후작을 상대할 수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직계여인의 삶도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다. 첩의 자식이나 방계의 여인들보다 더 높은 작위와 부유한 가문의 사람과 혼인을 했지만, 그녀들 역시 정략혼의 대상이긴 마찬가지였다.

“어머님은 어려서 돌아가셨어요. 아버님께서는 제가 아들이 아님을 늘 한탄하시며, 후계를 찾기에 여념이 없으셨고요. 가문에선 절 정략혼의 대상으로만 생각했어요. 곧 도착하는 아킨스 자작이 제 상대 후보 중 하나였죠.”

“아… 킨스 자작의 아들이 아니라요?”

시안느가 믿기지 않는다는 것처럼 입가를 가렸다.

“그게 귀족 여인의 숙명이죠. 아킨스 자작가는 다핸 남작가로 들어오기 위한 관문 같은 곳이에요. 영주님으로서는 자작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는 없어요.”

“아무리 그래도 아킨스 자작은 이미 육십이 넘었어요. 그의 아들인 소영주도 세인 경보다 열 살 이상 많지 않아요.”

“제가 열세 살쯤이었었을 거예요. 아킨스 자작령에서 제법 큰 파티가 있었어요.”

당시 열린 파티엔 남부 귀족들이 대거 모였었다. 외부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 남작도 그날은 기사단장을 데리고 참석했었다.

세인도 처음으로 파티에 초대받아 부푼 마음으로 자작령으로 향했다.

이런 파티는 귀족들의 중요한 사교모임이면서, 성인이거나 곧 성인이 될 귀족가의 자녀들을 선보이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때이었나 봐요. 아킨스 자작의 눈에 띈 게. 그 이후로는 영지를 벗어난 적이 없거든요.”

세인이 슬쩍 미소를 지으며 마치 남 이야기를 하듯 안온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제가 성인이 될 무렵, 아킨스 자작가에서 혼인 제안이 왔어요. 말이 혼인이지 첩으로 달라는 요구였어요. 다행히 카일 님을 만나 소드 엑스퍼트에 올랐을 때라, 남작님이 정중히 제안을 거절하셨죠.”

정식으로 가문의 검술을 익혔다면, 아무리 자작이라도 다핸 남작을 고집을 피울 순 없었다. 아킨스 자작령이 다핸 남작가로 들어가는 목줄을 틀어쥐고있어도, 다핸 남작과의 충돌은 아킨스 자작도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두 명의 중급 엑스퍼트를 보유한 남작이라도, 남부최강이라 할 수 있는 켈토 기사단장을 보유한 다핸 남작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핸 남작 영지에 있는 용병 보일도 그들에겐 부담이 되는 존재였다.

더군다나 상대는 기사단장의 딸인 세인이었다.

“그동안 가문의 그늘 아래 풍요로운 생활을 했으니, 이제 가문에 지은 빚을 갚을 때다.”

정략결혼으로 가문을 떠나는 귀족가의 여인들이 듣는 소리였다.

시안느나 이엘도 들어본 말이었다.

“잘 알고 있어요. 모를 리 없죠. 의무나 다름없으니까요.”

이엘이 시무룩하게 어깨를 움츠렸다. 어쩌면 이제 그 이야기의 주인이 바로 자신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전 이미 가문에 진 빚을 모두 갚았다고 생각해요. 카일 님 덕분이죠. 그러니 전 가문을 위해 희생할 생각이 없어요.”

그녀는 카일 덕분에 새롭게 정립한 검술을 고스란히 남작가에 전해주었다. 하여 은혜를 모두 갚았다고 여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실질적으로 그녀가 빚진 사람은 가문이 아닌 카일이었다. 그런 세인이 카일을 곤란하게 할 리 없었다.

“아버지와 멜리안이 걱정되긴 하지만 제가 막을 수 있다면, 남은 사람들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예요. 일은 이미 벌어졌고, 전 해결할 수 없어요. 그러니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아요. 그저 별 탈 없기를 바랄 뿐이죠.”

세인의 말에 시안느와 이엘도 남아 있던 걱정을 애써 지우려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시안느와 이엘이 앞을 바라보자, 세인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비록 그녀가 담담하게 말을 했지만, 아버지와 멜리안이 걱정이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이엘의 말처럼 그들은 그녀의 가족이기 때문이었다.

지금 나타난 자들이 마파린 후작가의 사람이 아님을 짐작하고는 있지만 단정할 순 없었다. 만약 후작가에서 남작가를 위협하기 위해 저런 강자를 보냈다면, 분명 그린넨 백작 가문의 영애를 확보하기 위해 또 다른 인물을 보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리 상단이 그녀들을 보호한다고 해도 기사급 전력이 습격을 가한다면 감당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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