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약점
“상단을 바로 따라가야 하는 것 아닌가요?”
상단과 멀어지기 전, 카일의 옆으로 다가온 시안느가 물었다.
“상단과 거리를 두고 움직이려면 이것저것 필요한 물건들이 많습니다. 더구나 사람도 늘었으니, 필요한 물건들과 식재료는 따로 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상단과 같이 움직일 때라면 그다지 필요가 없지만, 개별적으로 행동하게 된다면 야영에 필요한 모든 걸 손수 준비해야 했다.
물론 야영에 필요한 대부분의 물건들은 이미 가지고 있지만 식자재는 지니고 있는 게 부족해 마련해야 했다.
하지만 이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혹, 남작님께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까?”
“여기서 영주 성까지는 멀지 않으니 직접 가는 게 빨라요.”
“노파심일 수도 있습니다만, 조금 전 지나간 마차가 마음에 걸립니다.”
무언가 이상을 눈치챈 세인이 단박에 안색을 바꿨다. 단순히 이상하단 이유만으로 영주 성에 이런 이야기를 전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세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버지께서 나서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보일이 나서야 할 정도의 문제라는 말에 세인이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아직 확신하기는 이르지만 보통 실력자가 아닌 건 분명합니다. 아무래도 남작님께는 미리 알려야 할 것 같습니다.”
카일과 세인의 말을 듣고 있던 시안느가 뭔가를 깨달았는지 대화에 끼어들었다.
“후작가에서 보낸 사람이 아닐까요?”
“아니요. 후작가에 그만한 실력자는 남작님을 제외하고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엘이 단언함으로써 시안느의 추측은 빗겨나갔다.
“확그건 모르는 일이죠.”
세인이 반박했다. 힐튼 남작의 부상으로 후작가와 남작가의 미묘한 갈등이 생겨났다는 건 세인도 잘 알고 있었다.
“후작가에 그런 엄청난 인물이 추가로 있었다면, 동부가 아직까지 버틸 수 있었을까요?”
“그럼 어디서 보냈단 말인가요? 카일 님이 잘못 봤다고 생각지는 않아요.”
결국 제대로 된 결론을 짓지 못한 세 여인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카일이 곧 그녀들을 현실 세계로 불러들였다.
“의외로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여기 있는 우리가 아니라 남작님이 고민하셔야 할 일입니다.”
카일의 말이 옳았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골머리를 썩혀보아도 답을 찾는 건 어려웠고, 설령 찾았다고 해도 결정은 결국 다핸 남작의 몫이었다.
“설령 나쁜 목적으로 왔다 쳐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그러니 남작님께 말을 전한 후 우린 공작령으로 가겠습니다.”
망설임 없는 카일의 목소리에 다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강력한 적일지 모르는 사람이 나타난 상황에서 영지를 지키기는커녕, 떠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적을 피해 도망을 치겠다는 말과 같아 세 여인은 멍하니 카일을 바라보았다.
“이, 이대로 영지를 떠난단 말인가요?”
“그럼 여기에 남으실 생각입니까?“
카일이 시안느에게 되물었다.
“하지만 적일 수 있잖아요. 저들이 샤론 마을로 향할 수도 있어요.”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남작가로 향할 수도 있죠.”
“그런데도 영지를 떠나겠다니요.”
시안느가 노골적으로 실망한 낯을 했다.
이곳은 카일의 고향이었다. 마을 사람들 모두 어려서부터 카일과 알게 모르게 친분을 쌓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는데, 일정을 강행하겠다는 카일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곳에 우리가 남으면 저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요?”
카일의 물음에 시안느가 입을 다물었다. 상대는 보일 대장이 직접 나서야 할 정도의 강자였다. 최소 상급 엑스퍼트 이상의 실력자란 말이었다.
중급 엑스퍼트의 끝자락에 와 있는 카일도 일검을 받아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곳에 모두 남는다고 해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 터였다.
“오히려 저희가 남으면 방해만 될 겁니다. 당장 남작가만 해도 이니, 이엘 님을 보호하기 위해 병력을 보낼 겁니다.”
힐튼 남작가와의 문제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는데, 그린넨 백작가의 영애가 변을 당한다면 남작가는 갈피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후작가와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지 않는 이상, 그린넨 백작 가문이라는 패를 안전장치로 남겨놓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만약 영애가 이곳에서 죽는다면? 겉으로는 몰래 영지로 들어와 목숨을 잃은 것이니 당장 남작가에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해도 도움은 주지 않을 것이다.
“그건….”
“남작가에 남아 있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남작가의 보호를 받은 게 될 겁니다. 되려 전력의 누수를 최소화하기 위해 여기 있는 네 사람이 영애를 보호하려 들겠죠. 이래저래 우리는 전력에서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카일은 우리와 다르지 않나요? 우리만 없다면 카일은 충분히 도움이 될 거예요.”
이엘은 카일에게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다. 자신과 시안느는 상단과 동행을 한다면 안전하게 트라발트 공작령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저 역시 이곳에 남아 있으면 방해만 될 뿐입니다.”
“그럴 리가요. 카일은….”
이엘의 말이 끝나기도 전 시안느가 이엘의 팔을 낚아챘다. 이엘은 방금 자신이 큰 실수를 범할 뻔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가 남아 있으면 아버지께서도 발이 묶일 겁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보일은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고 영지에 남아 있는 카일에게 달려올 것이다. 카일을 용병으로 만들려 밖으로 내보내긴 했으나, 위험이 닥쳤다면 그는 최선을 다해 카일을 보호하려 들 것이다.
그는 마을 사람이나 영지의 안전보다. 가족인 카일의 안위가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카일도 마찬가지였다. 보일이 아들을 최우선에 두 듯, 카일은 아버지를 가장 앞에 두었다. 남작가에 남거나 영지에 남아 있다면 남작은 최악의 순간, 카일을 이용해 보일을 끌어내려 할 것이다. 하지만 카일이 영지를 이미 떠났다면 상황은 달라졌다.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적을 만난다면 혼자남은 보일은 얼마든지 도주를 택할 수 있었다. 보일은 의리와 명예를 지키는 기사가 아닌 용병이었으므로.
“아버지께서는 위험이 닥치면 필시 최선을 다해 마을을 보호하려 하실 겁니다. 하지만 영지에 제가 머물러 있다면 아버지께서는 절대 제 옆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절 보호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전 아버지를 믿습니다. 제가 없어도 무사할 거라고.”
세 여인 중 누구도 카일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카일의 생각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었다. 보일의 유일한 약점은 카일뿐이기 때문이었다.
“제가 영주님에게 알리고 오겠습니다.”
“명심해야 할 게 있습니다. 절대 그들을 자극해서는 안 됩니다. 그저 멀리서 지켜만 봐야 합니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세인은 망설임 없이 영주 성으로 향했다.
“우린 필요한 것만 산 뒤, 아가씨께서 돌아오면 서둘러 출발하겠습니다.”
카일이 돌아서서 걸어갔다.
* * *
“저 녀석입니까?”
4명의 사내가 카일과 함께 여러 식재료를 사고있는 두 여인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중 거대한 바스터 소드를 등 뒤로 메고 있던 사내가 팔짱을 끼운 채로 말했다.
“맞아, 버크. 저 녀석이 바로 샤론 마을 자경 대장의 아들이다. 지난번 마을에 갔을 때 스치듯 본적이 있다. 덩치가 워낙 커서 기억하고 있었지.”
허리에 십여 개의 작은 단검과 롱소드 한 자루를 찬 사내가 입가를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아덱이 봤다면 확실하겠지, 대장, 실력은 어떤 것 같습니까?”
“글쎄? 아직 싸우는 모습을 보지 않아 모르지만, 고작 17살이니 소드 유저에도 오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자경 대장을 생각해 본다면 소드 유저 초급 정도일 순 있겠군.”
코퍼가 자신의 검집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진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일단 비터란 녀석이 벼르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내 권위로 찍어 누르고 있었다.”
“비터라면 대장이 용병대에 받아들이려고 데려온 놈 중 하나 아닙니까? 소드 유저 상급으로 실력도 있고, 무게감 있는 성격이라 들었는데 상행 중에 문제를 일으키려 한 겁니까?”
“저 녀석을 봐라. 곧 여인들로 주변에 장벽을 칠 기세다. 용병이 될 애송이 녀석이 저러고 여인들을 달고 다니는데, 기분 좋을 녀석들이 얼마나 될까?”
못마땅한 것처럼 미간을 우그러트린 버트가 툴툴거렸다.
“그것도 저 녀석 능력이지. 힘세고 몬스터만 잘 때려잡는다고 사람이냐? 저런 것도 다 능력이다, 능력.”
“뭐야. 너 지금 누굴 말하는 거야!”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버크가 씨근덕거리며 곁에 있던 황금빛 머리칼을 질끈 묶은 사내를 노려봤다. 키는 버크 보다 작지만 탄탄하면서도 균형 잡힌 몸에,허리엔 폭이 넓은 브로드 소드 한 자루를 차고 있었다.
“버크, 브린! 그만.”
코퍼가 두 사람 사이를 중재했다.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다.”
“그러니까 저 녀석 허리춤에 있는 게 운석으로 만든 검이다, 이거 아닙니까? 그중 하나를 우리가 가지겠다는 것이고요.”
브린이 유독 ‘우리’를 강조했다.
운석검을 노리는 코퍼를 제외한 다른 세 사람은 이번 일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운석검을 얻어도 결국 코퍼의 차지일 뿐, 남은 사람들은 얻을 게 없기 때문이었다. 고작해야 코퍼가 가진 골드 몇 푼이 전부일 것이다.
그렇다고 카일의 검 두 개를 모두 가질 순 없었다. 한 자루야 선의라고 강조할 수 있다지만 두 자루는 강압에 의해 빼앗긴 거나 다름없었다. 아일론 상단은 이 사태를 가만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용병 길드와도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카일은 용병이 아니지만, 보일은 아직 용병의 신분패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원래 검의 주인이 보일이고 아들에게 잠시 맡겼다고 주장한다면 길드가 나서게 될 터였다. 그리고 용병 검투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그들 모두 덤벼도 중급 엑스퍼트로 알려진 보일을 당해 낼 수 없었다.
“너희들에게는 충분히 보상하겠다.”
코퍼가 마뜩잖다는 것처럼 브린에게 말했다. 브린이 실력이 높다고 해도 엑스퍼트인 코퍼를 당해 낼 수는 없었다. 보통 때라면 이쯤에서 물러났을 브린이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번엔 브린도 물러나지 않고 코퍼를 보며 강하게 말했다.
“보상이라고 해 보았자 대장이 가지고 있는 골드 수십 개 정도 아닙니까. 운석검이라면 못해도 수백 수천 골드는 할 겁니다. 저희들에게 돌아가는 양이 너무 적지 않습니까?”
코퍼는 몸을 완전히 돌려 브린은 마주했다. 냉랭한 그의 눈동자는 평소의 정직하고 우직한 코퍼의 눈동자가 아니었다. 그의 눈동자는 어느새 살기로 가득했다.
“원하는 게 뭐지?”
등 뒤로 식은땀을 주르륵 흘린 브린은 입술을 꽉 깨물어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검 말고 다른 것을 요구하십시오.”
“다른 것?”
“좋은 검은 골드만 있으면 공작령의 아이언 거리에서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운석검이다. 조금 전 수백 수천 골드의 가치가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녀석에게 그보다 더 대단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브린은 코퍼의 살기를 참아내느라 식은땀을 죽죽 흘리고 있었다.
“대단한… 가치?”
그리고 그 노력은 보상 받았다. 어느새 코퍼는 살기를 거뒀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흥미로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