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114화 (114/404)

114.음모

“흥미롭군.”

노인이 창밖으로 보이는 거구의 사내를 스치듯 바라보며 입술을 매만졌다.

“저 나이에 내 기운을 느끼다니….”

멀어져 가는 사내를 보던 노인의 눈빛에 묘한 망설임이 담겼다.

“주군께서 일을 처리하기 전까지 어떤 분란도 일으켜선 안 된다 하셨습니다.”

값비싼 비단옷을 걸친 왜소한 중년의 사내가 부드럽게 노인에게 경고했다.

“그래서 네놈이 나를 막겠다는 말이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주군의 명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드린 것뿐입니다.”

왜소한 중년의 사내는 노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잔을 들어 붉은 포도주를 마셨다.

“네놈은 이 늙은이가 무섭지 않은 게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 검술도 익히지 않았고 마법에도 소질이 없는 몸입니다. 어르신의 작은 손짓 하나에 죽을 목숨에 불과하지요.”

능청스러운 사내의 태도에 노인은 흥미가 사라진 듯 작은 창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을 감상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노인은 맞은편에 있는 중년의 사내에게 진득한 살기를 보냈다. 그러나 사내는 지금껏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노인을 상대하고 있었다.

“칫, 재미없군. 바로 너 같은 놈이 살수를해야 한다. 평범한 얼굴에 왜소한 체격,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심성까지 완벽해. 마음 같아서는 내 후계로 삼고 싶을 정도야.”

“고마운 말씀이나, 아시다시피 전 검을 잡을 수 없는 몸입니다.”

“크크크. 그래, 그러니 이제 네놈에겐 흥미가 없다. 조금 전 그놈이라면 몰라도 말이야.”

단 한 번도 동요하지 않았던 사내의 동공에 처음으로 작은 파문이 일었다. 저 노인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수십 년 동안 수천의 사람을 죽였고, 살인을 기반 삼아 자신만의 검술을 만들어 냈다. 덕분에 지금 이 자리에 와 있었다.

그만큼 성격도 사납고 괴팍해, 모든 사람을 눈 아래로 보고 조금만 거슬려도 죽여버렸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죽인 시녀와 시종만 해도 10명이 넘어갔다. 결국 참다못한 사내가 직접 노인과 같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딱 이것뿐이었다. 그저 주군의 명을 들어 시위를 하는 것. 처음 사내가 나타났을 때 노인은 사내에게 큰 관심이 있었지만, 그가 선천적으로 검을 익힐 수 없음을 알게 되자 흥미를 접었다. 지금 그의 관심은 오직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줄 후계를 찾는 것.

노인이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것 역시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갈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런 노인이 관심을 보였다. 지금껏 수많은 인재를 보고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노인이 말이다.

분명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자일 것이다.

“크크. 내 말에 반응하는 걸 보니 조금 전 그놈에게 흥미가 동하는 모양이구나.”

노인의 말에 사내의 눈에서 번쩍인 이채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어르신의 눈길을 끌었다면 보통내기가 아니란 소리군요.”

“지나가며 흘린 내 기운을 느꼈다. 단순히 재능만 높은 게 아니라 마나에 대한 친화력이 대단하단 말이지. 거기다 골격도 우수하고…. 아쉽다, 아쉬워. 저런 녀석은 평생을 가도 만나기 힘든 녀석인데….”

노인은 진정 통탄스러워 보였다.

“원하신다면 저 녀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크크크, 됐다. 지금은 저 녀석보다 중요한 일이 있으니, 다른데 주의를 돌릴 수 없다.”

“알겠습니다.”

사내가 선선히 긍정했으나, 그도 노인처럼 조금 전 지나간 사내에게 이미 관심이 생기고 말았다.

* * *

카일은 저 멀리 보이는 남작 성과 세인은 번갈아 바라봤다.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자신의 고민은 잊고 카일의 모습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잠시 고민을 끝낸 카일이 세인을 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돌아가시는 것이 아가씨께 최선의 선택이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카일은 잠시 멈칫 망설였다. 지금 하는 말은 아직 확신할 수도 없고 그저 이론적인 생각을 적립한 것뿐이라, 가능한 방법인지 알 수 없었다. 또한 이 방법은 상당히 복잡하고 은밀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여기 있을래요. 카일 님과 함께 있게 해주세요.”

카일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세인이 애처로이 말했다. 그리고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지금도 전 만족해요. 그날 카일 님이 없었다면 전 귀족가 여인으로서의 숙명을 피할 수 없었을 거예요.”

세인도 이후 알게 된 이야기지만 남작은 가문의 다른 여인들과 보일을 이어주려 몇 차례 정략결혼을 추진했었다. 남작뿐이 아니었다. 켈토 기사단장 역시 은밀히 몰티엔 가문의 여인과 보일을 엮으려 했으나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모두 거절당한 탓이었다.

지금 기사단장과 보일의 친분도 바로 이때 자주 샤론 마을을 찾은 켈토의 노력 덕분이었다.

보일은 아직도 죽은 카렌을 그리워했다. 샤론 마을을 떠지지 않고 있는 이유도 결국 카렌과의 추억 때문이라는 걸 세인은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때 카일을 만나 새로운 검술을 익히지 못했다면, 그녀는 이미 몇 년 전 늙은 아킨스 자작의 5번째 첩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남작은 세인을 다른 가문의 정략혼의 대상으로 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녀를 다른 가문에 내어준다는 건, 새롭게 정립된 검술도 같이 내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으십니까?”

“지금 돌아간다면 더 큰 후회로 괴로워할 거예요.”

세인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 방법이….”

“마티슨 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트라발트 공작령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토일이 다가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카일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 눈초리를 따라 카일은 뒤를 돌아봤다.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입술을 비죽 내민 시안느와 이엘이 고개를 획 돌려버렸다.

“조심하라고. 저 뒤쪽은 더 심각하니까.”

“아저씨….”

토일이 작게 경고했다.

용병들이 주변으로 잔뜩 몰려나와 카일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다만 조금 전 밝힌 세인의 신분 때문에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는 것이다.

세인은 기사단장의 딸이자 수련행을 떠나는 기사였다. 수련행을 떠난다는 건 예비기사에 불과하다는 것이나, 일단 일정 수준 이상의 실력을 보유하고 있단 말이었다.

아무리 남작가라지만 뒤떨어지는 예비기사를 세상에 내놓지 않을 것이다. 수련행을 떠나는 예비기사는 가문의 얼굴로서 명예와 함께, 그 가문의 무력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었다.

“곧 영지를 떠나야 하니, 지금 문제를 일으켜선 안 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을 거다. 그러니 조금 거리를 두고 쫓아오는 것이 어떻겠느냐? 지금은 저들을 조금 피하는 것도 분란을 막는 방법 중 하나다.”

“죄송해요. 제가 갑자기 상단에 합류하는 바람에 괜한 소란이 일어났네요.”

“오히려 내가 미안하구나. 네 덕분에 상단의 위기도 넘겼는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이런 말밖에는 없으니.”

토일이 쓰게 웃었다. 토일에게 카일도 중요하지만 안전하게 상행을 마치는 것도 중요했다. 비록 카일의 잘못은 아니지만, 지금처럼 용병들 대부분이 카일을 배척하는 상황에서는 떨어지는 게 카일이나 상단의 안전을 위해서도 좋을 것 같았다.

사실 이런 일은 코퍼 용병 대장이 적극적으로 카일을 보호하려는 의지를 보인다면 금방 해결될 일이었다. 실질적으로 모든 용병을 통솔하는 사람이 바로 코퍼 용병 대장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코퍼 용병 대장은 카일을 보호하는 듯한 모습을 취하면서도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게 오히려 용병들을 은근히 자극하고 있는 것 같아, 토일은 카일과 약간의 거리를 두려 하는 것이다.

“아니에요. 저도 용병들과 계속 불화가 생기는 것 같아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카일이 원한 것은 트라발트 공작령까지 무사히 갈 수 있는 길잡이였다. 그 외에 상단에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안느나 이엘은 동부를 거의 벗어난 적이 없던 터라 카일과 마찬가지로 길을 몰랐다. 제국에서 주로 활동해온 워드는 왕국 자체가 처음이라 말할 필요도 없었다.

카일도 멀린이 상단과 동행해야 하는 상황만 아니라면 벌써 상단과 떨어져 움직였을 것이다.

“그렇다면야…. 거리가 많이 멀어지면 혹 도움을 줄 수 없을지도 모르니, 너무 떨어지진 말거라.”

“걱정 마세요.”

토일과 카일의 대화가 끝나자 기회를 노리고 있던 비터가 카일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곧장 토일이 코퍼에게 상단의 출발을 요구했다.

느긋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코퍼도 갑작스러운 토일의 요구에 당황한 듯 멍하니 토일을 바라보았다.

카일이 왔던 길을 되돌아갔기 때문이었다.

“카일은 동행을 하지 않는 겁니까?”

“잠시 일이 있어, 카일은 조금 천천히 따라오기로 했습니다. 곧 뒤따라올 겁니다.”

토일이 담담하게 말했지만 코퍼는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 아니었다.

“흠… 알겠습니다.”

코퍼는 탐탁지 않은 기분을 숨기지 못했으나, 이견을 제시하진 않았다. 코퍼로서는 토일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조금 더 압박을 가해야 하는데….’

토일이 돌아가자 코퍼는 천천히 멀어져 가는 카일과 그 일행을 돌아보며 생각에 잠겼다.

“형… 아니, 대장! 대원들이 도착했습니다.”

헐레벌떡 달려온 아튜가 벙긋 웃으며 말했다. 일부 상단을 이끌고 아일론 상단의 남부 지부로 먼저 출발했던 코퍼 용병대의 대원 셋이 합류를 위해 돌아온 것이다.

이들은 이미 상행을 끝냈기 때문에 상단에 굳이 돌아올 필요가 없지만, 코퍼 대장이 트라발트 공작령에 도착하면 이번 상행이 완전히 끝나기에, 코퍼와 합류한 후 공작령에서 새로운 의뢰를 맡으려 돌아온 것이다.

“녀석들이 벌써 돌아왔다고?”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코퍼가 아튜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상행을 마친 후 곧장 달려온 거 같습니다. 갑자기 트라발트 공작령으로 가게 생겼으니, 앞뒤 가리지 않고 부리나케 온 거겠죠.”

트라발트 공작령은 왕도 다음으로 모든 물산과 사람이 집중되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도시와 다양한 무기들을 구할 수 있는 아이언 로드 있어, 용병이나 기사들 누구라도 가고 싶어 하는 도시였다. 하지만 대원들이 이렇게 다급하게 달려온 것은 아이언 로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용병, 아니 사내라면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곳.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간 사람은 없다는 향락과 사치가 가득한 레드 라이트 지구로 가기 위해 온 모양이었다.

“녀석들….”

피식 웃으며 돌아서려던 순간 코퍼의 머릿속으로 어떤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녀석들은 지금 어디에 있지?”

“지금 북쪽 성문 근처에서 잠시 쉬면서 배를 채우고 있습니다. 상단이 북문을 통과할 때 합류할 겁니다.”

야튜의 말에 코퍼가 발을 굴러 말 위로 뛰어올랐다.

“넌 천천히 상단을 이끌고 북문으로 오너라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다.”

“대장! 지부장이 찾을 겁니다.”

“북문에서 합류할 테니 적당히 둘러대! 녀석들이 온 건 비밀로 하고.”

코퍼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북문으로 말을 몰았다. 이른 아침이라 거리에 사람이 없어 코퍼는 순식간에 작은 점이 되어버렸다. 정답게 대화를 나누던 상대는 사라지고, 야튜만이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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