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112화 (112/404)

112.스파이럴 모션

“물론 원 검술 자체도 마나를 몸 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너무 극단적인 강함만을 추구하다 보니 오히려 신체를 상하게 하더군요.”

“강한 검술일수록 마나 수련 때 고통이 따르게 되어 있어요. 그래도 받아들여진 마나가 안정되고 나면 회복이 금방 이뤄진다고 알고 있어요.”

“저도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 부자가 익힌 24식 검술은 좀 더 극단적이라고 할까요. 저희 부자야 워낙 타고난 신체적 우위 덕분에 큰 지장이 없지만, 다른 사람이 익히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때문에 아버지께서 검술은 전해주시되 호흡은 알려주시지 않은 겁니다.”

“아!”

세인이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검술의 검식은 사실 배우고 익히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검술과 일치시켜 익히는 호흡법엔 마나 수련을 할 수 있는 핵심이 있었다.

카일도 호흡법을 익히느라 몇 날 며칠을 보낼 정도였다. 그만큼 이 둘을 합치시키는 일은 어렵고도 중요한 일이었다. 검술의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세인은 지금까지 보일이 호흡법을 알려주지 않은 이유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알려준 검술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들 만큼 큰 가치가 있었을뿐더러, 보일이 그녀와 카일이 이루어지기를 얼마나 원하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헌데 지금 들어보니 보일이 검술과 연계된 호흡법을 알려주지 않은 건, 알려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알려줄 수가 없어서였다. 이는 온전히 카일에게 달려있었다.

“처음 제가 펼친 실전성이 제거된 검술은 안정적인 마나 수련을 위해 만든 겁니다. 언제까지 타고난 신체에 기댈 수는 없으니, 누구나 익힐 수 있는 호흡법과 연공검을 만든 것이죠. 후대에도 지금처럼 강인한 육체를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할 수 없으니까요.”

“그… 렇죠.”

세인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억눌렀다.

마나 연공검은 가문의 사람에게만 전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날 가문의 사람으로 받아줄 건가요? 그대의 반려로서….’

세인은 가만히 카일의 말을 기다렸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어떤 계기로 이 마나 연공검은 더 이상 익히지 않고 있었습니다. 허나 아무래도 아가씨께서 이 연공검과 인연이 생긴 것 같으니 전수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계기라면… 아! 섬광의 눈.”

세인이 언젠가 들었던 보일의 말이 떠올라 소리쳤다.

“그걸 어떻게….”

카일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이번에는 카일도 진심으로 놀란 모양이었다.

‘이 양반이 도대체 어디까지 말한 거야!’

설마 보일이 이런 것까지 세인에게 얘기할 줄 몰랐기에 카일은 남쪽을 바라보며 분노의 눈빛을 발사했다.

“죄송해요. 분명 비밀이라고 말씀하셨는데… 하지만 걱정 마세요. 보일 님이 말씀하셨던 모든 것들은 누구에게도 발설한 적 없어요. 아버지도 모르세요. 맹세해요.”

세인이 황급히 덧붙였다. 카일의 심기가 단단히 상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염려 마세요. 아가씨는 믿습니다.”

세인은 몇 년 전 카일에게 조언을 받아 변화한 검술을 아버지인 켈토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정도로 입이 무거웠다. 나중엔 켈토가 직접 찾아와 카일에게 사정을 하고서야 가문에 검술이 알려질 정도였다. 그런 세인이 맹세를 한다고 하니, 카일은 당연히 믿었다.

“다만 남쪽에 계신 어떤 분의 가벼운 입을 믿지 못할 뿐이죠.”

“그런….”

“연공검은 여행 중 알려드리겠습니다. 이미 검식은 알고 있으니 호흡법만 일치시키면 어렵지 않게 익히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때 문에서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영주와 소영주가 온 모양이었다.

“영주님과 소영주님 이십니다.”

병사의 말에 세인이 잠겨있는 문을 열었다.

“이야기는 끝이 났느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핸 남작이 여유로운 낯으로 물었다.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방금 도착했단다.”

느긋하게 수련장으로 들어오는 남작과 달리, 멜토우는 처진 어깨로 터덜터덜 꽁무니를 쫓아 왔다.

“그럼 전 나가보겠습니다.”

이제 세인의 시간은 끝이 났다. 지금은 온전히 카일과 영주인 다핸 남작의 시간이었다. 그녀도 이제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해야 하기에 준비할 것이 많았다. 물론 이미 오래전 보일에게 연락을 받았지만, 다시 한번 부족한 것은 없는지 체크할 필요가 있었다.

세인이 걸음을 재촉해 밖으로 나서자마자, 병사들이 두터운 문을 천천히 닫았다.

“어찌 되었느냐.”

몇 발자국 떼기 무섭게,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던 켈토가 후다닥 달려왔다.

하지만 세인은 방긋 입매만 휘어 보이고, 대답도 없이 걸어 나갔다.

“어찌 되었냐니까. 또 아비에게 말을 하지 않을 것이냐? 어차피 보일 그 친구에게 전서를 날려 보낼 것 아니냐! 그럼 아비도 곧 알게 될 것이다.”

몸이 달았는지 켈토가 세인의 옆에 붙어 물었지만, 세인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고얀 녀석!”

켈토가 닫힌 문밖에서 투덜거리더니 별안간 무언가 떠올렸다는 듯 마구간으로 향했다.

“말, 말을 가져오너라! 당장 샤론 마을로 갈 것이다.”

훌쩍 말에 오른 켈토는 남쪽으로 달렸다. 그리고 얼마 후 세인의 창밖으로 하얀 전서구 한 마리가 푸득거리면서 남쪽 방향으로 힘차게 날아갔다.

“고얀 녀석. 이 아비를 또 훈련 시켜!”

켈토가 말을 재촉했지만, 그의 안면은 근심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나저나 보일을 어떻게 구슬린다. 필시 또 전서구를 흔들며 놀리려들 텐데.”

켈토는 이마를 팍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하아. 딸이 보낸 전서구를 보려고 이 고생을 해야 하다니…. 정말 딸자식 키워봐야 아무 소용 없다.”

불평불만을 일삼으면서도 켈토는 채찍을 연신 휘돌려 말을 재촉했다.

그렇게 켈토가 허겁지겁 샤론 마을로 향하고 있을 무렵, 카일은 연무장에서 멜토우의 자세를 잡아주고 있었다.

“자세는 정확하게, 호흡을 간결하고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모든 동작이 느릿느릿하다고 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느린 것이 더 익히기 힘든 법입니다.”

카일의 엄한 목소리가 수련장을 울릴수록 멜토우의 얼굴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지금 힘드신 이유는 제가 가르쳐드린 혼원장을 제대로 수련하지 않아서입니다. 분명 누차 강조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카일! 가만히 손을 들고 서 있는 건 너무 지루하단 말이야.”

“혼원장은 하체를 단련하는 것도 있지만, 체내 깊은 곳을 단련하는 수련입니다. 이 수련을….”

“알아, 안다고…. 10년 이상 꾸준히 하면 오러가 근육과 장기에 스며들어 몸 전체를 더 강하고 단단하게 만들어준다는 거잖아. 하지만 지루한 걸 어떡해!”

“휴… 일단 지금 배우는 전신 스파이럴 모션(Spiral motion)을 정확하게 익혀야 합니다. 수련도 게을리하지 마시고요. 고작 8식이지만, 이 수련법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소영주님도 잘 알겠지요.”

멜토우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바보가 아닌 이상 지금 전수하는 전신 스파이럴 모션(Spiral motion)이, 카일을 지금의 강인한 검사로 만들어준 가장 큰 비전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바로 이 8식을 얻기 위해, 다핸 남작은 위험을 감수하고 힐튼 남작과 그린넨 영애의 비밀을 지켜줄 뿐만 아니라, 자유민 신분패까지 내어준 것이다.

“원래는 10식을 알려드리려 했지만, 혼원장 수련을 너무 등한시했습니다. 남은 2식은 이후 수련을 얼마나 했는지 확인한 후 전해 드리겠습니다.”

애초 카일은 8식만 전수해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멜토우와의 인연을 생각해 10식을 전수해 주려 한 것이다. 하지만 멜토우가 게으름을 피워 배움이 제대로 이뤄져 있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옆에서 설레는 기류를 마구 흘리고 있던 남작이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었다.

마나 연공법은 단 1식의 차이로도 모을 수 있는 마나의 양과 질이 달라진다. 그런데 무려 2식이 눈앞에서 날아갔으니, 남작의 눈에서 불이 뿜어나오지 않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걱… 정 말게… 수련장에 가둬두고서라도, 반드시 제대로 수련을 시킬 테니.”

“아, 아버지….”

다핸 남작은 한번 결정하면 어지간해서는 번복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일단 말을 했으니 분명 멜토우를 여기 수련장에 가두어 둘 게 자명했다.

그제서야 덜컥 겁이 난 멜토우가 망설임 없이 카일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물론 카일은 살짝 옆으로 피해버렸다.

“마스터! 부디 마스터를 따라 수련행을 갈 수 있게 명을내려 주세요.”

멜토우는 눈물이라도 떨굴 것처럼 울상을 지었다. 그러나 카일은 냉정하게 답했다.

“마스터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더불어 저도 영주님의 수련방식이, 소영주님께 꼭 필요한 것 같아 아주 흡족합니다.”

카일이 내심 사악하게 웃었다.

‘그러게 누가 수련을 등한시하라고 했나? 혼 좀 나야 다시는 안 그러겠지.’

카일의 말에 다핸 남작이 인자한 낯빛으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오, 멜토우 너의 마스터와 이 아비의 생각이 일치하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이냐! 오늘부터 너의 방은 여기 수련장이란다. 특별히 너의 안전을 위해 이 아비가 이곳이 20명의 병사를 주둔시킬 터이니, 걱정 말고 수련에 최선을 다하거라.”

남작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카일과 함께 사악하게 웃었다. 고작 두 명이 지키고 있는 수련장을 열 배인 20명이 지키게 하겠다는 것은, 도망도 치지 못하게 철저하게 막겠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럴 수가….”

멜토우가 절망한 채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신경도 쓰지 않고 수련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남작은 자신의 말을 반드시 지키려는 듯 명을 내리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병사 20명을 이곳에 배치해라. 소영주의 수련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유의하고.”

카일이 통쾌한 음성으로 남작에게 의견을 건의했다.

“영주님! 소영주님의 시중을 들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녀와 시종을 대기시켜 피치 못할 일에 대비하시지요.”

피치 못할 사정이란, 바로 생리현상으로 인한 핑계로 수련장에서 빠져나올 것을 대비하자는 말이었다. 항상 수련장 밖에 시녀와 시종을 둔다면, 배고픔 같은 생리적인 고통을 호소할 때 바로바로 대비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오오, 본 영주가 세심하지 못했구려. 당장 카일의 말대로 집사장에게 소영주를 보필할 시녀와 시종을 데려오라 전하게.”

“예, 철저히 봉행하겠습니다.”

큰소리로 대답한 문지기가 영주의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 안돼!”

그들의 목소리를 엿듣고 있던 멜토우는 그나마 남아 있던 조그마한 희망까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사실 카일이나 다핸 남작이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멜토우를 가둬둔 건, 혹 멜토우가 집을 나와 카일을 따라갈 것을 미리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멜토우는 몇 번이나 성을 탈출해 샤론 마을로 향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자리를 비울 수 없던 영주는 하릴없이 걱정해야만 했다. 샤론 마을은 오지의 마을로 아직 어린 멜토우가 몬스터를 만날 우려가 상당히 컸다. 벤더가 밀착 호위로 붙은 이유도 이러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벤더까지 다른 곳으로 보내버렸기에, 소영주로서는 꼼짝없이 갇혀 한동안 수련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 * *

“미친 오빠! 오빠, 어딨어!”

예쁘게 단장한 멜리안은 돌아다니며 멜토우를 불렀다.

“아이참. 이 미친 오빠는 어디에 있는 거야! 분명 카일이랑 같이 있을 거야”

“아가씨 어서 돌아가셔야 해요. 영주님이 아시면 크게 혼이 나세요.”

“분명 카일이 찾아오기로 했단 말이야.”

멜리안이 성안을 이 잡듯 뒤질 기세로 소리 지르며 돌아다녔다.

“시링도 봤잖아. 다과도 준비하고 예쁜 드레스로 옷도 바꿔 입었단 말이야. 봐봐, 이번에 새로 사 온 머리 장식도 했는데…. 왜 카일은 안 오는 거야? 분명 미친 오빠가 카일을 붙잡고 있는 게 분명해! 다 미친 오빠 때문이야.”

멜리안은 씩씩거리며 있는 힘껏 발을 구르며 걸어갔다. 화가 나도 단단히 난 것 같았다.

“아이고 아가씨, 어디 가세요.”

“아버지한테 미친 오빠를 당장 수련장에 가둬 놓으라고 할 거야!”

멜리안은 남작의 집무실로 바람처럼 내달렸다.

그 시각. 망연자실한 멜토우는 수련장 바닥에 주저앉아 귀를 후비고 있었다.

“아! 이젠 귀까지 미친 듯이 가렵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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