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세인1
그 무렵 카일은 정원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니엘 영애와 시안느가 배정받은 방이 내밀한 곳에 위치해 있다 보니, 허락받지 않은 외부인은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원칙적으로 이곳엔 영애인 멜리안이 머물고 있어야 했지만, 남작 부인이 세상을 떠난 뒤 어린 딸을 혼자 둘 수 없던 영주는, 소영주인 멜토우의 옆방에 멜리안의 방을 만들어 주었다. 남매는 투닥거리면서도 오순도순 사이좋게 지냈다. 밖으로 나온 세인은 곧장 카일에게로 향했다. 미리 언질 받았던 요청을 들어주기 위해서였다.
“수련장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카일이 세인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은 사방이 높은 성벽으로 막혀 있는 작은 연무장이었다.
“영주님과 소영주님께서 수련을 하시는 곳이랍니다.”
“성에 이런 장소가 있었군요. 전 수련장이라면 죄다 지하에 있을 줄로만 알았습니다.”
“가문마다 조금씩 수련장을 만든 곳이 달라요. 성 지하에도 많이 만들지만, 대부분은 성안 깊숙한 곳에 조그마한 수련장을 꾸려 놓는답니다.”
말을 마친 세인이 한쪽에 놓여 있는 작은 탁자로 카일을 이끌었다.
“아무래도 남작님과 소영주님의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아요. 잠시 앉아 기다리세요. 차를 끓여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세인은 카일의 대답이 기뻤는지 환하게 웃으며, 화로에 작은 무쇠 주전자를 올리고 찻잔을 내어 왔다. 그녀가 가져온 찻잔은 황동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주로 귀족 가문에서 사용하는 금이나 은으로 만든 찻잔에 비해 소박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왕도의 귀족들에게 팔고 있는 옹기와 도자기의 생산지는 다름 아닌 다핸 남작의 영지인 샤론 마을이었다.
하지만 정작 남작 가문에서는 오래전부터 사용해 오던 황동 찻잔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남작은 물론 눈앞에서 진지하게 찻잎을 우리고 있는 세인까지. 카일이 끓여낸 차를 마셔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차를 담은 고급스러운 도자기를 보지 못한 자가 없었다. 하지만 누구도 찻잔을 탐낸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카일의 뇌리에 들었다. 새삼스럽고도 생경한 상념이었다.
카일과 보일이 자유민이긴 해도,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가 사용할 도자기나 찻잔 정도는 얼마든지 만들어내라 요구할 수 있었다. 재료 수급이 어려울 뿐이지 제작 과정이 힘든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쯤은 한 지방의 영주로서 얼마든지 요구할 수 있는 권리였다.
물론 보일 부자에게 나쁜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조금 더 세심한 배려를 한 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조금 전 보았던 영주의 소박한 집무실만 보아도 귀족으로서 최소한의 사치만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난번 카일 님께서 주셨던 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꽤 괜찮은 차랍니다. 드셔보세요.”
쪼르르 흘러내리는 찻물에서 은은한 박하향이 올라와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 주었다.
“캐트닙 차군요.”
“역시 잘 아시는군요. 아무래도 기온이 점점 내려가고 있어서요. 캐트닙 차를 마시면 몸이 조금 따뜻해질 거예요.”
세인의 말대로 캐트닙 차는 발열 작용이 있어, 지금처럼 기온이 떨어지는 계절에 마시기에는 더없이 좋았다.
찻잔을 기울이던 카일의 눈에 잠시 망설이는 세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혹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나요?”
한참을 머뭇거리고 있던 세인은 카일이 먼저 물어오자, 결심을 끝냈는지 입을 열었다.
“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무슨 부탁인가요?”
“저와 대련을 한번 해주실 수 있으세요?”
“대련 말입니까? 그 정도야 어렵지 않습니다.”
카일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단장인 켈토를 따라 여러 번 마을에 왔던 세인은 카일과 맞붙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생각보다 영리했고 검에 대한 소질이 상당해 카일과 보일을 놀라게 했다. 그동안 자신의 후임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애쓰던 켈토가, 정작 딸아이가 가지고 있던 재능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연히 세인의 재능을 발견한 켈토는, 딸에게 자신의 모든 검술을 전수하며 후계자로 키우고 있었다. 때문에 세인도 켈토를 아버지 대신 스승인 마스터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잘 부탁드려요.”
세인은 호흡은 가다듬고 검을 뽑았다.
그녀의 검은 다른 일반적인 롱소드 달리 검폭이 좁고 길었다. 언뜻 레이피어로 보일 형태였으나, 레이피어에 비해서는 검폭이 넓고 짧았다. 게다가 검신에선 요요한 붉은빛이 흘렀다. 현재 세인이 쥐고 있는 검은 양손을 모두 사용할 수 있게 손잡이 길이를 늘여놓아 기형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먼저 공격하셔도 됩니다.”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세인이 곧장 검을 앞으로 찔렀다. 이전에 벌였던 대결에서보다 배 이상 빨랐다. 세인의 검술은 조용하고 차분한 그녀의 성격과 달리 날카로우면서도 정교했다. 완전히 집중한 세인은 카일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대결이 시작되고 한참이 흘렀지만 카일은 공격 한번 해보지 못하고 막고만 있던 것이다.
물론 세인의 공격이 아무리 날카롭고 빨라도, 카일은 그보다 더 강력한 검술을 구사해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허나 지금까지 세인의 방어에 집중하고 있었던 이유는 지금 세인이 구사하는 검술이 무척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검술의 일부가 아니라 거의 대부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주춤주춤 물러난 카일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세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획 돌려 남쪽을 노려봤다. 필시 최남단 어딘가의 마을에서 껄껄거리고 있을 누군가를 향한 눈초리였다.
‘이 양반이 가문의 뿌리까지 뽑아줄 생각인가?’
어이가 없던 나머지 카일은 안면을 세게 문질렀다. 그치만 뭐 어쩌겠는가. 이미 가르친 검술이었다. 그것도 보일이 직접 전수했으니 뭐라 할 말도 없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세인의 말에 카일은 그만 뒷목을 잡고 쓰러질 뻔했다.
“검술은 보일 대장님께서 알려 주셨어요. 나중에… 카일 님이 오시면, 꼭 나머지 부분에 대해 가르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어요.”
세인의 붉어진 얼굴이 더욱 붉어지다 못해 빨갛게 달아올랐다.
지금 세인은 보일의 검술 24식의 원형을 거의 대부분을 전수 받은 상태였다.
여태껏 보일의 검술 24식의 원형을 온전히 넘겨받은 사람은 카일이 유일했다.
보일의 제자인 메튜와 필론도 이제 20식을 전수 받았을 뿐이었다.
여기서 나머지 부분에 대한 가르침을 받으란 것은, 카일이 변형 발전시킨 새로운 30식 검술을 뜻하는 말이었다.
집안의 비전 중 비전이라 할 수 있는 30식 검술은 가문의 사람이 아니라면 배울 수도, 배워서도 안 되는 검술이었다. 그러니 이 검술을 세인이 익히려면, 가문의 사람이 되어야만 한단 소리였다.
다시 말해 보일은 지금 카일에게 말하고 있었다.
‘세인이 마음에 들었다. 가문의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어떻겠느냐!’ 라고 말이다. 기사단장 켈토가 얼굴에 철판까지 두르고 세인에게 수련행을 명하며 카일을 따라가게 한 것도, 사전에 보일과 말을 맞춘 것이 분명해 보였다.
‘어쩐지 틈만 나면 세인 아가씨의 장점을 늘어놓더라니.’
한숨을 내쉰 카일은 뺨을 빨갛게 물들인 세인을 응시했다.
세인은 이니엘이나 시안느에 비해서도 눈에 띌 만큼 미인이었고, 차분하며 영리한 여인이었다.
그런 여인이 24식 검술의 가치는 물론 검술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가르침이 어떤 것을 뜻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이걸 어쩐다.’
카일은 아직 누군가를 직접적으로 좋아하는 마음이 있는 건 아니었다. 시안느와 이니엘 그리고 세인과 멜리안, 이 네 명 모두에게 긍정적인 감정만 있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그녀들 모두 미인인 데다 각자의 개성과 매력이 있어, 누구를 선택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세인이 카일에게 제일 잘 어울리는 사람이긴 했다, 비록 네 여인 중 가장 가문이 쳐지지만, 그래서 오히려 용병이 되려는 카일에게 더욱 잘 맞았다. 그린넨 백작 가문의 영애인 이니엘과 함께하게 된다면, 그린넨 가문의 거대한 그늘에서 그들의 장기 말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안느 역시 플랜스 기사 가문을 차치하더라도, 그녀가 몸담은 그린넨 백작가와 조부인 힐튼 남작까지 염두에 두어야 했다. 어쩌면 이니엘 영애를 택했을 때보다 더 험난한 길을 가야 할 수도 있었다.
멜리안 역시 남작 가문의 영애이니, 가문의 사람으로서 많은 것을 양보해야만 할 것이다. 보일은 이 모든 것을 고려해 비록 카일보다 3살이 많지만, 세인이란 여인이 더 카일에게 어울릴 거라 판단했는지도 몰랐다.
“아버지께서 22식을 전수해 주셨으니, 나머지 2식을 더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다른 검술은… 여행을 하며 생각해 보겠습니다.”
카일의 말에 세인의 얼굴이 기쁨으로 물들었다. 아버지인 켈토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이미 보일에게 지금 가르치는 검술의 의미를 충분히 들었고, 새롭게 정립한 비전의 검식이 따로 있다는 말도 들었다.
그러니 지금 카일이 온전한 24식 검식을 가르쳐 주겠다는 소리는, 그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더불어 그녀에게 비전의 검술까지 전수해 준다면, 카일은 그녀를 그의 반려로서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 * *
그녀가 카일을 마음에 둔 것은 정말 우연한 도움을 통해서였다. 다핸 남작가 기사단장의 딸인 동시에, 남작 가문의 여인인 그녀는, 다른 귀족 가문의 여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녀가 밤을 새워 검을 수련해도 그녀의 부친인 켈토는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부친인 켈토를 비롯한 소영주인 멜토우, 그리고 당시 열 살인 멜리안과 함께 오지 마을인 샤론 마을로 가게 되었다. 그때 처음 카일을 만났다.
사실 켈토는 카일보다는 보일과 딸인 세인을 이어줄 생각이었다. 카일은 자질이 뛰어나고 검술 실력도 좋았지만, 나이도 세인보다 3살이나 어렸을뿐더러 다핸 남작이 자신의 딸인 멜리안과 맺어주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비록 나이는 많지만, 상급 엑스퍼트인 보일을 세인의 짝으로 염두에 둔 것이다. 어차피 귀족 가문의 여인으로 정략결혼은 흔한 일이었고, 보일보다 더 나이가 많은 귀족가의 늙은이에게 시집가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무엇보다 세인은 정략결혼을 통해 데릴사위로 받아들여진 켈토의 딸이었다. 남작의 영애도 아닌 가문의 여인이란 신분인 터라, 정략혼에 관련된 논의가 나온다면 가장 먼저 팔려가듯 떠나야 하는 신세였다. 오히려 보일 천인장이라면 낯선 곳으로 떠나지 않고 영지에 남을 수 있으니, 세인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현실에 수긍하고 체념한 채, 그날도 여느 때처럼 늦은 저녁 홀로 검을 잡고 휘두르고 있을 때였다.
“검이 너무 무거워요.”
“누구냐!”
고개를 획 돌린 세인의 차가운 추궁에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어둠 속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신체에 비해 검이 무겁고 투박해요. 검술 자체도 거칠어서 아가씨와는 전혀 맞지 않아요. 하지만 검술은 바꿀 수 없으니, 검이라도 교체해야 그나마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을 거예요.”
“누구냐고 물었다.”
세인이 검을 겨누며 싸늘하게 물었다. 이때만 해도 세인은 웃는 법을 몰랐다. 그녀는 언제나 냉랭하고 서늘한 기운을 뿜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