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다핸 남작성3
“남작님을 제압해 달라는 요청을 듣고 제 신분을 밝히셨군요.”
“네, 그린넨 백작 가문까지 얽혀있단 걸 알게 되면, 무작정 힐튼 남작님을 제압해 달라고 말할 수 없을 테니까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제 신분을 알고 힢튼 남작님을 제압하려는 생각을 포기하신 건가요?”
“음… 사실 아버지께서 남작님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가 가장 컸습니다. 여러 귀족 가문이 복잡하게 얽힌 일입니다. 우리 부자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일이죠. 그리고 감춰야 할 비밀도 있고.”
보일의 입장에서 가장 간단한 해결책은 힐튼 남작을 제압한 후, 이니엘 영애와 함께 그린넨 백작 가문으로 보내는 방법이었다. 다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대로 힐튼 남작이나 이니엘 영애를 백작가로 보낸다면, 카일이 블랙 와이번과 맹약을 맺었다는 게 밝혀지고 말 것이다.
사람들이 이를 알게 되는 즉시 달려들 게 뻔했다.
언젠간 카일에게 블랙 와이번이 있다는 사실이 세상에 밝혀질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진 최대한 시간을 늦춰 카일 스스로의 힘으로 이겨나갈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고 싶은 것이 보일로서는 최선이라 생각한 것이다.
“잠깐만요. 아직 납득되지 않은 것이 있어요. 보일 대장이 거절했다곤 하지만 다핸 남작님께서 보일 대장 말만 믿고 힐튼 남작님을 포기했을까요?”
다핸 남작은 보일보다 더 간편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그린넨 백작 가문에 알리기만 해도 다핸 남작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상급 엑스퍼트도 혼자 백작 가문의 기사단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지켜야 할 사람이 있는 보일은 정면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힐튼 남작을 내어줄 것이다. 다만 어렵게 쌓아온 신뢰 관계를 잃긴 하겠지만, 영지를 위험에 빠트리는 것보다는 카일과 보일을 포기하는 게 다핸 남작에겐 더 이로웠다.
그런데도 다핸 남작이 힐튼 남작을 포기하고 이니엘 영애에게 신분패를 만들어 주려는 것은, 영지의 안전을 담보할 만큼 큰 무언가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글쎄요. 그동안 남작가와 저희 부자가 쌓아온 믿음 덕분 아닐까요.”
두루뭉술하게 에둘러댄 카일은 다른 질문이 나오기 전에 말꼬리를 돌렸다.
“그럼 이제 남작님을 만나셔도 되겠습니까?”
“좋아요. 이번에도 카일을 믿겠어요.”
카일이 고맙다는 눈짓을 하며 문을 열었다. 그 뒤를 시안느와 이니엘 영애가 따랐다.
“이야기가 길어지는 것 같아, 미리 차를 끓여 놓았네.”
“늦어서 죄송해요. 다핸 남작님,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그린넨 백작 가문의 셋째 이니엘 드 그린넨입니다.”
“플랜스 가문의 시안느 파브엘 입니다.”
“어서 오게. 다핸 남작이네. 시안느 경도 앉게.”
다핸 남작이 밝게 웃으며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남작님.”
“넌 볼 때마다 크는구나! 하하, 어서 오너라 카일.”
“기사 단장님께서도 계셨군요.”
“그래 오랜만이구나. 설마 빈손으로 오진 않았겠지?”
기사 단장 켈토가 카일에게 넌지시 물었다.
“아버지… 영주님도 계시는데.”
옆에 앉아 있던 세인이 난처한 얼굴로 기사 단장의 팔을 붙잡았다.
“어흠, 죄송합니다. 영주님 제가 그만….”
“하하 괜찮네. 사실 나도 물어보려 했거든.”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는 다핸 남작과 기사 단장의 모습에선 불안함과 초조함이 한 톨도 보이지 않았다.
시안느와 이니엘 영애는 괜한 걱정을 했나 하는 의문에 얼떨떨함을 감추지 못했다.
“빈손으로 오다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하 그럼 그렇지! 나중에 찾으러 가겠네.”
기시 단장 켈토는 맡겨 놓은 물건을 찾아가겠다는 것처럼 당당하게 굴었다. 그동안 후계자를 찾지 못해, 근심에 쌓여 있던 예전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최근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줄 이를 찾아냈기 때문이었다.
“자자, 시간이 없으니 짧게 이야기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여기 카일이 부탁한 신분패 입니다. 처음엔 가짜 신분을 만들까도 생각했으나, 발각될 경우 문제가 될 소지가 있어 영지에 남아 있는 자유민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비슷한 나이의 여인들을 추려내어 딱 적당한 자를 찾아냈습니다.”
“다행이군.”
“나이는 17세, 푸른 눈에 금발. 이름은 로즈입니다만 어차피 영지에 등재된 인명록이니, 수정 가능합니다.”
“17살이면 곧 왕도로 떠나야 하지 않나요? 한 달 뒤면 성인이 되니까요.”
“이 소녀는 작년 이맘때 병이 들어 죽었습니다. 왕도에는 아직 통보하지 않아 인명록에 그대로 등재되어 있을 겁니다.”
“가족은… 가족은 없나요?”
“어미는 아이를 낳다가 죽었고, 아비도 용병으로 참전했다가 죽었습니다. 아마 몇 해 전 제국과의 국지전에서였을 겁니다. 당시 아비가 공을 세워, 적지 않은 보상이 로즈라는 딸에게 나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 나도 기억이 나는군. 보상이 제법 후했던 것 같았는데?”
“영주님께서 특별히 명을 내려 보호해주신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살았습니다마는, 병마는 피하지 못했습니다. 제법 오래 병을 앓았습니다.”
“저런…. 그런데 치료는 받지 않은 건가?”
“아닙니다. 치료사도 불러보고 대지의 여신 레아의 사제도 불렀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 아이를 찾아낸 것도 당시 영주님께서 내린 지시에 소녀를 지키던 병사가 말해 주어 떠올려 낸 겁니다.”
기사 단장과 영주가 소녀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것은, 로즈라는 여인으로 위장해야 하는 이니엘 영애에게 정보를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으음. 이름을 바꿀 수 있나요?”
“가능합니다. 원하는 이름을 말씀해 주시면 인명록에 등재해 놓겠습니다. 따로 로즈라는 여인에 대해서는 책자로 준비했습니다. 중요한 내용은 미리 알아두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럼 이름은 이엘로 하겠어요.”
“흠… 아무래도 원 이름과 비슷한 게 불렀을 때 어색하지 않고 좋겠죠. 이엘이란 이름도 흔한 이름 중 하나니 의심도 사지 않겠고…. 알겠습니다. 밖에 세공사가 준비하고 있으니, 신분패는 내일 아침이면 완성될 겁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작님, 켈토 기사 단장님.”
“감사는 카일에게 하는 게 좋겠군. 저 녀석, 이번 일에 제법 큰 걸 내어놓았으니 말이야.”
‘제법 큰 걸 내어놓았다’라는 다핸 남작의 말을 놓칠 이니엘 영애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게 무엇인지 질문을 하려 했으나, 카일은 틈을 주지 않았다.
“아닙니다. 그저 인연이 닿았을 뿐입니다.”
“그런 연이라면 오랫동안 이어졌으면 좋겠구나.”
다핸 남작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카일을 보며 말했다.
“참. 이번에 용병이 되겠다고 하던데?”
“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만, 더 큰 이유는 대륙을 돌아보고 싶어서입니다.”
“아버지!”
카일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누가 뭐래도 멜토우였다.
“안돼.”
“하지만…!”
“신분을 잊지 말아라. 넌 소영주다.”
남작의 단호한 말에 멜토우가 머리를 떨궜다. 그때 기사 단장이 툭 끼어들었다.
“하하. 소영주님은 안되지만, 우리 세인은 가능하지요.”
“자네 설마!”
“세인. 너도 이제 수련행을 떠날 때가 된 것 같구나.”
기사 단장 켈토가 은근한 미소를 띠었다.
수련행은 정식 기사가 되기 전 대륙을 돌며 경험을 쌓은 것을 지칭했다.
하지만 이런 행위는 거의 사라지다시피 해, 현재는 몇몇 유서 깊은 기사 가문에서나 행할 뿐 대부분의 기사 가문에서는 사라진 전통이었다.
더군다나 기사 단장 켈토의 가문인 몰티엔 가문은 명문 기사 가문도 아니었고, 명을 내린 켈토 역시 수련행을 위해 대륙을 떠돈 적이 없었다. 때문에 지금의 수련행은 다분히 의도된 행동이었다. 방 안에 있던 사람 모두가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 그러나 기사 단장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히 굴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세인만이 모든 부끄러움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녀 역시 기사 단장 켈토가 수련행을 내린 까닭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세인의 대답은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마스… 터께서 내린 명이라면….”
세인은 아버지가 아닌 스승으로서 기사 단장의 지시를 따르겠다 하고 있었다.
아직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은 기사에게 최우선시되는 명이 바로 마스터의 명이었다. 더군다나 이번에 내린 명은 수행, 즉 가르침을 내리는 일환이라 남작도 막을 수가 없었다.
“당했구나.”
남작이 분한 눈초리로 기사 단장을 노려보았다. 두 사람의 눈에는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단호함이 있었다. 이 둘이 남남이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사적으로는 한 가족이었기에 가능했다.
“당장 멜리안을….”
남작이 고집을 부리려는 순간, 멜토우가 급히 일어나 그를 말렸다.
“아버지! 멜리안은 이제 열세 살이에요. 어딜 보내시려고요. 제가 가겠습니다. 절 보내 주십시오.”
“안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넌 소영주다. 가문을 이어받아야 할 사람이 어딜 간단 말이냐.”
“작위를 물려받기 전, 대륙을 둘러보고 견문을 넓히는 것도 중요한일이라 생각합니다.”
“아직 가문에서도 배워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두 사람이 아웅다웅하자, 기사 단장 켈토가 여유롭게 자리에서 일어나 세인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아무래도 남작님과 소영주님의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습니다. 그만 일어나시지요. 방을 안내해 드리겠어요.”
세인이 생긋 웃으며 시안느와 이니엘 영애를 돌아봤다. 그녀의 밝고 청아한 미소를 본 시안느와 이니엘 영애가 자신들도 모르게 서로 손을 꼭 마주 잡으며 동맹 의지를 다졌다.
세인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고풍스럽게 꾸며진 작은 방이었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탁자와, 냉기를 막기 위해 붙인 랑브리는 붉은 나뭇결이 은은하게 살아있어,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이곳과 옆에 있는 방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종을 울려주세요. 그럼 대기하고 있는 시녀가 들어와 시중을 들어 드릴 겁니다.”
세인이 직접 종을 울리자, 시녀 두 명이 들어와 치마를 살짝 들고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낙후된 남작가의 시녀들이지만 귀족가의 시녀로서 제대로 교육받은 모양새였다. 이니엘은 속으로 내심 감탄했다.
“카일의 방은 어디인가요?”
“카일 님의 방은 소영주님의 옆방입니다. 소영주님께서 특별히 분부하셨습니다.”
“그렇군요.”
이니엘 영애는 입가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실망한 모양이었다.
두 여인이 머물게 된 방은 손님들이 머무는 별채가 아니라, 영주의 직계 가족들이 머무는 내성 깊숙한 곳이었다.
그만큼 두 여인을 높이 예우해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두 여인도 남작가와 가문에 누가 되지 않게 귀족으로서 행동해야 한다는 말과 같았다.
이미 날이 저물어 가고 있는 이상, 손님인 그녀들은 내성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기는 힘들었다. 사실상 다음 날 아침까지 방안에 갇힌 신세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