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다핸 남작성2
“어떻게 된 일이죠. 설명을 듣지 않는다면 들어갈 수 없어요.”
시안느가 강경한 태도로 카일을 쏘아보았다. 그녀는 믿었던 카일에게 배신당했다는 생각에 손이 떨릴 지경이었다.
“흠… 그럼 제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형님께서 잘 설명해 드리십시오.”
멜토우는 눈치 빠르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제 복도에는 카일과 분노한 시안느, 그리고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카일을 응시하는 이니엘 영애만이 남아 있었다.
“음…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처음부터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말해 주세요.”
이니엘 영애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럼…흠… 남작가로부터 연락을 받은 시점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힐튼 남작님께서 다리가 부러지신 후, 아버지께선 남작님의 서신을 받아 곧장 영주성으로 향하셨습니다.”
힐튼 남작은 이니엘 영애처럼 소리 없이 숨어든 것이 아니라, 공식적으로 남작가를 방문한 손님이었다. 그렇기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는 반드시 영주 성에 정식으로 통보해야만 했다.
“다행히 힐튼 남작님께서는 기사단의 일과 부상을 당한 일에 적당한 이유를 만들어, 다핸 남작가와 후작가에 알렸습니다. 그리고 당분간 이곳에 머물며 몸을 회복하겠다고 하셨죠.”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마파린 후작의 입장에서도 최고의 전력인 힐튼 남작님의 부상을 최대한 숨긴 채, 안전하게 상처를 치료할 곳이 필요했겠죠.”
“그렇습니다. 샤론 마을만큼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테니까요.”
“그보다는 엄청난 실력자가 옆을 지키고 있으니, 남작님의 안전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서겠죠.”
엄청난 실력자가 상급 엑스퍼트인 보일을 뜻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카일은 시안느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저 차분히 숨을 고르곤 대화를 끌어나갔다.
“저와 아버님, 힐튼 남작님은 이번 일이 이렇게 마무리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린넨 백작가에서 영애의 행적을 찾고 있지만, 중부나 서부 쪽을 집중적으로 수색하고 있으니, 당장 큰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카일의 안색이 씁쓸함으로 물들었다.
“무슨 문제가 있었다는 거죠?”
“다핸 남작가의 처지를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비록 책임이 없다고 해도 다핸 남작의 입장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했습니다. 무려 왕국의 10대 검사가 자신의 영지를 방문했다가 큰 부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그의 주군은 북부의 맹호 마파린 후작이고요.”
시안느보다 이니엘 영애가 먼저 카일의 말을 알아들었다. 다핸 남작 가문은 남부 지역에서도 그리 강한 가문이 아니었다. 고작 남부 오지의 작은 영지들끼리 아웅다웅 세력싸움을 하던 남작가로서는, 잠자는 거대한 드레곤의 코털을 건드린 생쥐 신세가 되어버린 거나 마찬가지란 소리였다. 드레곤이 콧바람만 불어도 남작가는 바람에 날리지 않게 온 힘을 기울일 수밖에 없을 터였다.
“전전긍긍하던 다핸 남작께서는 늦은 저녁, 은밀히 아버지를 찾아오셨습니다.”
“남작가에 힘이 되어 달라는 요청이었겠군요.”
“그리 다르진 않습니다. 힐튼 남작께서 이곳에 도착하셨을 때 아버지와 검을 나눈 적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결과는 무승부. 물론 남작님이 최선을 다하진 않았겠지만요. 이 정보를 들은 다핸 남작님은 힐튼 남작님에 맞설 사람은 영지에 오직 아버님뿐이라 생각하셨던 겁니다.”
완전히 예상을 벗어난 카일의 말에 이니엘 영애가 입가를 가렸다.
“설마 힘이 되어 달라는 게 아니라, 힐튼 남작님을 제압해 달라고 한 건가요?”
“아무리 남작님이 다치셨더라도 상대는 최상급을 바라보는 엑스퍼트 상급의 실력자입니다. 직접 억류하려면 영지의 힘을 총동원해도 막대한 피해가 뒤따를 겁니다. 그러니 남은 방법은 아버지께 부탁하는 방법밖에는 없었죠.”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그랬다간 마파린 후작가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일단 남작님을 제압한 뒤라면 후작가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겠죠. 하지만 너무 무모해요.”
“두 분께서는 하나 생각지 못한 게 있습니다.”
“네?”
“그건 또 무슨 소린가요?”
“왜 꼭 남작가 혼자 후작가를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후작가에는 수많은 적대 세력이 있습니다. 그중 이곳과 가장 가까운 강대한 가문이 있지요.”
카일이 침참된 눈빛으로 이니엘 영애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때서야 깨달음을 얻은 이니엘 영애가 신음처럼 웅얼거렸다.
“우리… 가문인가요.”
“그렇습니다. 힐튼 남작님을 제압한 뒤, 그린넨 백작 가문과 협상을 한다면 남작가로서는 오히려 후작가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린넨 백작 가문과 마파린 후작 가문 간 싸움을 붙인 후, 뒤로 빠지겠다는 생각이었군요.”
“더불어 힐튼 남작님을 넘긴 대가로 동부 그린넨 백작가의 지지를 받을 수 있겠죠. 아무래도 멀리 있는 적보단, 가까이에 있는 아군이 더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카일의 말마따나 북부의 대귀족인 마파린 후작가가 엄청난 영향력을 지녔다 하더라도, 그린넨 백작 가문과 전쟁이 벌어지면, 산간벽지의 작은 남작 가문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것이다. 설령 남작가에 보복을 하려 해도 북부와 정반대인 남부까지 온전한 힘을 투사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더군다나 그린넨 백작 가문의 영역과 다핸 남작령은 후작가 보다는 무척 가까웠다. 북부에서 병력이 출발하더라도 그린넨 백작 가문이 충분히 막아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건 부수적인 이익에 지나지 않아요. 더 큰 이득은 바로 카일과 보일, 두 사람을 온전히 남작가에서 품을 수 있다는 거겠죠.”
“역시 아가씨께서는 총명하시군요. 정확하십니다. 남작가가 바라는 건 저희 부자를 압박해 이번 일에 동참하게 만든 뒤, 온전히 가문에 받아들이는 것이었죠.”
그들 사이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마른 침을 삼킨 카일이 신중히 말을 골랐다.
“오래전 일입니다만, 샤론 마을에는 원래 아버님께서 직접 길러낸 9명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중 일부를 남작가에서 기사로 서임하려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남작가에서 보일 대장님의 검술을 노렸단 말이군요.”
나직한 영애의 목소리에 카일이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중 일부, 아니 대다수가 이에 동조해 절 사로잡으려 했죠. 그래서 전 덤벼들었던 사람들의 오른쪽 손목을 잘라내 버렸습니다.”
“세상에….”
“사실 처음엔 그냥 죽일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오랜 시간 직접 검을 쥐여주고 가르친 아버님을 생각하니, 차마 그럴 수가 없어 검을 쥐는 손을 날려 버렸죠.”
“그건 검사에게 있어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이에요.”
시안느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카일에게 이런 잔인한 면이 있었는지 몰랐던 것이다.
“너무 그렇게 보진 말아주십시오. 손목을 잘라냈지만, 그에 대한 보상은 확실히 했으니까요. 손은 배신에 대한 대가일 뿐입니다.”
“변절을 했다면 차라리 죽이지 그랬어요. 그 어떤 보상도 검을 빼앗긴 고통을 대신할 수 없어요.”
“그렇지만 그게 검을 돌려주는 거라면 달라지지요. 그들은 아직도 검을 들고 오크와 싸우고 있답니다.”
“어떻게….”
“칼을 꼭 오른손으로 쥘 필요는 없지요. 시안느도 왼손으로 스틱 방어술을 익히지 않았나요? 검술이라 하여 다를 건 없습니다.”
“아!”
카일의 말에 시안느가 탄성을 질렀다. 그녀는 지금껏 검술은 오른손으로만 익혀야 한다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던 것이다.
“아무튼 그 일이 있은 뒤부터 영주님은 작전을 바꿔, 마을로 영애와 소영주님을 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기사 단장님께서도 자신의 따님인 세인 님을 데려오셨죠.”
“혼인을 통해 엮이려 했던 거군요.”
검술을 직접 노리던 이전과 달리, 카일과 인연을 맺기 위한 방향으로 선회한 것이다.
무력이나 압력으로 해결할 수 없다면 직접적인 인연, 즉 혈연을 맺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영애든 기사단장의 딸이든 이어지기만 한다면, 보일의 검술과 상급 엑스퍼트라는 전력을 얻게 되니 남작으로서는 이보다 좋은 방법이 없었다.
무엇보다 멜리안과 세인 둘 다 카일에게 마음이 있었고, 카일 역시 두 사람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
또한 카일의 뛰어난 검술 실력에 반한 소영주가 툭하면 검을 들고 덤벼들었지만, 카일은 귀찮아하지 않고 대결을 받아주었다. 뿐만 아니라 검술까지 조금씩 알려주었기에, 남작은 이러한 인연에 모험을 걸고 보일과 카일을 설득하려던 것이다.
“저도 아버님도, 남작님께서 이번 일을 이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힐튼 남작님도 짐작하지 못하셨죠.”
이니엘 영애는 다핸 남작을 이해한다는 낯빛을 띄웠다.
“귀족 사회의 생리는 단순하지 않아요. 오히려 다핸 남작님의 대처는 현명하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런가요?”
“지금이야 힐튼 남작님의 부상치료가 먼저라 침묵하고 있지만, 정식으로 다핸 남작가를 방문한 힐튼 남작님이 크게 다쳤잖아요. 마파린 후작으로서는 어찌 되었든 다핸 남작에게 책임을 물어야 해요. 크든 작든 말이에요.”
“하지만 이번 일은 다핸 남작님과 관계가 없다고 힐튼 남작님께서 밝히셨습니다. 굳이 다핸 남작님이 책무를 지실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카일의 말에 이니엘 영애가 고개를 저었다.
“이해를 못 하고 있군요. 이건 누구의 잘잘못이 아니라 귀족가의 체면이 달린 문제에요. 공식적으로 영지를 방문한 후작 가문의 기사가 전멸했고, 힐튼 남작의 다리가 부러졌어요. 누가 누구를 죽였는지가 아니라, 어디서 누가 죽었는지가 중요하단 말이에요.”
비로소 카일은 사건의 심각성을 알았다.
영지에서 영주는 왕이나 같은 존재였다.
영지와 영지 간의 일은 국가와 국가 간의 일로 취급됐다. 즉, 존재를 숨기지 않고 찾아온 힐튼 남작과 기사단은 정식 사절이나 마찬가지였다. 한 나라를 방문한 사절이 병이 든 것도 아닌 영지에서(영지가 아닌 오크 랜드지만)전투 중 죽거나 다쳤다면, 왕국의 체면 때문이라도 방문한 국가에 책임을 물어야 했다. 사절을 보낸 국가의 힘이 강대하면 강대할수록 부담은 무거워졌다. 마찬가지로 마파린 후작 가문은 북부의 맹주였다. 이번 일을 경시하기엔 마파린 후작 가문의 피해가 너무 컸다. 힐튼 남작의 부상은 묵인하더라도 기사단 하나가 온전히 전멸했으니, 그냥 넘어가긴 힘든 일이었다.
“왜 힐튼남작님께서는 이런 얘기를 하지 않으신 걸까요? 마파린 후작을 오래 모셨다면, 이런 문제가 생길 거란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셨을 텐데요.”
골똘히 생각하던 두 여인은 어렵지 않게 답을 내놓았다.
“인제 보니 힐튼 남작님께선 치료를 핑계로 남아 볼모를 자처하신 거군요.”
“볼모!”
힐튼 남작은 여러 이유를 들어 샤론 마을에 남겠다 했었다. 그러나 마파린 후작이 과연 그 말을 그대로 믿었을까?
어쩌면 후작가는 거동이 힘든 힐튼 남작이 다핸 남작가에 볼모로 잡혀있다 판단을 내렸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지금까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던 걸 수도 있었다.
만약 힐튼 남작이 서둘러 치료를 마쳤어야 했다면, 샤론 마을에 남아 있지 않고 신관이나 최상급 포션을 구했을 것이다.
“남작님은 스스로 다핸 남작의 볼모가 되어 후작가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어요. 남작을 데려오기 위해 기사단을 파견할 수도 없어요. 잘못 움직여 적들에게 노출된다면, 후작가 최고의 전력인 힐튼 남작을 잃을 수 있으니까요.”
이미 한 개 기사단을 잃어버린 후작가에서 힐튼 남작까지 잃게 된다면 후작가의 날개 한쪽은 온전히 꺾여 나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그에 대한 비난은 온전히 후작이 감당해야만 했다. 이는 귀족의 위신이 훼손당한 일보다 더 큰 사건으로 번질 가능성을 야기했다.
바로 북부의 분열이었다.
한 개의 기사단과 북부 최고의 기사를 잃은 후작이 외부의 침입에 이어, 내부의 분열을 과연 막을 수 있을까?
어리숙한 사람이라도 이런 모험은 하지 않을 것이다.
“후우우….”
피곤한 얼굴로 긴 한숨을 내쉰 이니엘 영애가 상황을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