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105화 (105/404)

105. 다핸 남작성1

아일론 상단이 다핸 남작 성에 도착한 것은 생각보다 이른 오후였다.

간단한 검문과 신분을 확인했지만, 그저 대략적인 인원만 파악할 뿐 검문이 까다로운 것은 아니었다.

“우린 여기 풍요의 들녘에 머물고 있겠네.”

“알겠습니다.”

카일이 시안느와 이니엘 영애를 데리고 말을 몰아 영주 성으로 향했다. 이니엘 영애와 함께 여행을 하려면 적당한 위장 신분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그린넨 백작 가문을 상징하는 인장을 사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랬다간 여행은커녕 백작 가문에게 잘 보이려 아부하는 자들에게 시달리거나, 원수를 만나 납치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날 것이다.

“다핸 남작님이 저희의 부탁을 들어주실까요? 아무리 힐튼 남작님의 서신을 가지고 있다지만, 위장 신분을 만들어 주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닌걸요.”

“위장 신분이 아닙니다. 온전한 정식 신분패죠.”

걱정이 한가득 담긴 이니엘 영애의 음성에 카일이 웃으며 말했다.

“네?”

“지금 남작님께 요청드리려는 신분패는, 성인이 되지 못한 자유민이 여행을 할 때 받는 임시 신분패입니다.”

각 영지에 묶여있는 평민이나 농노가 아닌 자유민은 왕도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어, 신분을 왕도에서 직접 관리했다. 때문에 성인이 되지 못한 자유민은 거주하고 있는 영지의 영주에게 임시 신분패를 받아 왕도로 올라와, 자유민으로 등록하고 정식 신분패를 받아야만 했다. 왕도가 나서서 자유민을 관리하는 까닭은 자유민들 대부분이 귀족가의 방계들이나, 왕국에 큰 공을 세워 자유민 신분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언제든 다시 귀족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이 있어, 주의 깊게 살펴야 했다. 물론 많은 자유민들은 평민과 다를 바 없이 생활했지만, 부유한 상인층이나 장원을 가진 대지주의 경우 하급 귀족 가문 못지않은 호화를 누렸다.

“임시 신분패는 자유민이 영지에 거주하고 있다는 걸 확인해 줄 뿐입니다만, 정식 신분패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수의 자유민들은 생활이 넉넉하지 못해, 왕도로 올라가 정식 자유민으로 등록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정식 신분패를 얻는 일련의 과정이 상당한 골드를 소모하는 터라, 대부분은 자유민 신분을 포기하고 영지에 귀속된 평민이 되거나 임시 신분패만 소지한 채 평생을 살아갔다.

그러니 남작가에서 발급한 자유민 신분패는 사실상 정식 신분패와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럼 카일도 이제 왕도로 올라가 정식 신분패를 발급받을 건가요?”

“네. 용병으로 등록하면 자유민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다곤 하지만, 이 둘의 신분 차이는 뚜렷하니까요.”

평민과 자유민의 격차는 명확했다. 이를 절감할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전란이 발생했을 때의 징집 여부에 있었다.

자유민은 각 영지에 부속된 평민이나 농노와 달리 징집의 대상이 아니었다. 하여 자유민이 병사가 되는 건, 자원해서 입대하는 방법이 유일했다. 이때에도 전장에 나선 자유민은 부역의 의무가 없어 정식으로 급여를 받는 십인장이 되거나, 실력을 인정받아 백인장이 될 수도 있었다. 다만 자유민에겐 영지에 소속된 자들에게 지급되는 무딘 창날도 주어지지 않았다. 직접 자원해 왔으니 무기와 갑주는 알아서 마련하란 의미였다.

신분에 따른 차별은 공을 세웠을 때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평민이나 농노가 아무리 큰 공을 세워도 그 공은 소속된 영주와 영지에 돌아갔다. 그러나 자유민 출신 병사는 공을 온전히 인정받아 신분이 상승했고, 부와 명예를 얻었다.

이런 차등은 용병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럼 트라발트 공작령으로 갔다가 바로 왕도로 갈 건가요?”

이니엘 영애가 눈을 반짝 빛내며 물었다. 거리상 공작령에서 바로 왕도로 가는 것이 훨씬 가까웠다. 다핸 남작령에서 동부 그린넨 백작 가문까지의 거리와 트라발트 공작 가문까지의 거리는 큰 차이가 없었다. 허나 동쪽에 위치한 그린넨 백작 가문을 들렸다 왕도로 향하게 된다면, 길을 멀리 돌아가게 됐다. 여정이 길어지는 셈이니 이니엘 영애가 기대하는 건 당연했다.

“일정은 공작령에 도착한 뒤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 같습니다.”

“흠… 그런가요.”

이니엘 영애가 다소 실망한 표정으로 대꾸했지만 카일은 모른 척 말을 몰았다.

비록 이틀 정도지만 슬슬 말 위에서도 안정감을 찾아가고 있었다.

“멈춰라!”

카일 일행이 남작 성에 다가서자 정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창을 세우며 소리쳤다.

카일을 비롯한 일행들은 천천히 말에서 내렸다.

“샤론 마을에서 온 카일이라 합니다. 영주님을 뵙기 위해 왔습니다.”

“샤론 마을?”

“그렇습니다. 여기 자경 대장인 아버지의 서신이 있습니다.”

카일이 접어둬 품속에 보관하고 있던 종이를 꺼내 병사에게 내밀었다.

“샤론 마을의 자경 대장님이라면, 보일 천인 대장님 말입니까?”

“네.”

“잠시 기다리십시오.”

병사 하나가 쪽문을 통해 안으로 달려 들어간 사이, 남은 병사들이 조심스럽게 소곤거렸다.

“저분이 그분인가?”

“그런가 본데…. 나이는 어린것 같은 데 정말 크군!”

“자넨 누가 나올 것 같은가?”

“당연히 단장님 아니면 소영주께서 나오지 않겠나?”

“난 좀 다르게 생각하는데.”

“혹시….”

끼이이익

듣기 싫은 소음이 울리면서 병사들의 수군거림은 끝을 맺었다. 병사들은 서로를 향해 다급하게 눈짓했다.

성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보일의 직책이 기사계급인 천인장이라 해도, 그의 아들인 카일의 방문에 귀족 가문이 왔을 때처럼 성문을 연다는 건 과도한 대우였다. 그렇기에 병사들이 호들갑스럽게 무언의 대화를 나눈 것이다.

하지만 카일과 시안느, 이니엘 영애 그리고 워드는 그저 담담하게 성문이 완전히 열리길 기다릴 뿐이었다.

시안느와 이니엘 영애는 항상 있었던 일이라 놀라지 않았고, 카일은 오늘 처음 방문한 남작 성이라 이런 사정을 잘 알지 못했다.

워드는… 그냥 관심이 없었다.

“카일!”

성문이 열리자 가장 먼저 달려 나온 사람은 커다란 눈망울이 아름다운 열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였다.

“이런… 잊고 있었다.”

카일이 난처한 얼굴로 뛰어오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그렇게 뛰어가시면 넘어지세요.”

그녀의 뒤로 이제 20살쯤 되어 보이는 여인이 허겁지겁 따르고 있었다. 코트형 레더 아머에 붉은 금속제 방어구를 착용한 전형적인 기사 복장을 한 그녀는 날렵한 체형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아, 아가씨.”

카일은 바람처럼 달려와 안긴 작은 소녀를 당황한 듯 어설프게 다독였다.

소녀는 다핸 남작의 딸로 올해 열세 살이 된 멜리안이었다.

“카일! 여긴 어쩐 일이야? 멜리안 만나러 온 거야?”

멜리안이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카일을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웠던지, 옆에서 보고 있던 시안느와 이니엘 영애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아가씨! 이러시면 안 돼요.”

여기사가 급히 멜리안을 떼어놓았다.

“흥! 세인도 카일이 왔다는 말에 연무실에서 바로 달려왔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

멜리안이 토라진 듯 고개를 획 돌리며 입술을 비죽거렸다.

“아니에요. 수련이 조금 전에 끝났을 뿐이에요.”

변명을 늘어놓던 세인이 붉어진 안색을 감추려 고개를 푹 숙였다.

“누가 그 말을 믿을 줄 알고. 세인은 한번 연무실에 들어가면 늦은 저녁에야 나오잖아. 근데 오늘 갑자기 수련이 일찍 끝나다니. 하나도 못 믿겠는걸.”

“아니… 아니에요.”

계속되는 멜리안의 폭로에 귓불까지 붉어진 세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저러다가 얼굴이 터지는 건 아닐까 싶을 무렵, 커다란 고함소리가 세인을 구해 주었다.

“승부다, 카일!”

소리를 지른 건 화려한 방어구를 착용하고 있는 청년이었다. 그는 다짜고짜 검을 뽑아 들고 카일에게 뛰어들었다.

“와! 미친 오빠다.”

멜리안은 쇄도하는 검을 보고도 태평히 자리에 서 있었다. 세인은 멜리안을 안고서 황급히 물러났다.

“어휴. 역시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군.”

카일이 앓는 소리를 내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어느샌가 카일의 손엔 검이 쥐어져 있었다.

꽝-

두 사람이 충돌하는 것과 동시에, 달려들었던 청년이 그대로 뒤로 튕겨 날아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부연 흙먼지가 가라앉자 보인 건 바닥에 널브러져 대자로 뻗어 버린 청년의 모습이었다.

“소영주님!”

넋을 놓고 있던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정신을 잡곤 허둥지둥 달려갔다.

일부는 창을 세워 카일 일행을 경계했다.

“크크, 하하하.”

그때였다. 바닥에서 뒹굴고 있던 청년이 미친 듯이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와~ 미친 오빠, 머리를 크게 다쳐서 정말 미쳤나 봐.”

세인의 뒤에서 눈만 빠끔히 내민 멜리안이 종알거렸다. 비틀비틀 일어나던 청년 멜토우가 충격을 받은 듯 그대로 주저앉더니, 고개를 획 돌려 멜리안을 쏘아보았다.

“악! 미친 오빠 화났다.”

멜리안이 세인의 뒤로 숨어버리자, 피식 웃음을 흘린 멜토우가 주섬주섬 일어났다.

“물러나라.”

멜토우의 명령에 백인장이 난처한 얼굴로 소영주 멜토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저 대결일 뿐이다. 소란 떨지 말아라. 아버님께서도 아무런 명이 없지 않느냐.”

그제서야 백인장은 다핸 남작이 창밖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소영주인 멜토우가 단 한 수에 쓰러졌다는 것을 목격했으면서도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물러나라!”

백인장의 명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창을 거두었다.

“오랜만이다. 카일… 아니, 형님.”

“형님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카일이 부담스럽다는 것처럼 손사래를 쳤다. 멜토우가 씩씩하게 카일의 어깨를 툭 쳤다.

“자,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들어가지. 아버님께서 기다리신다. 세인도 같이 가지.”

카일의 옆에 서 있는 시안느와 이니엘 영애에게도 따라오라는 손짓을 한 멜토우는 앞장서서 걸었다.

“오빠! 난? 나도 가면 안 돼?”

“넌 조용히 방안에 들어가 있어. 안 그럼 이 미친 오빠가 화낼지도 몰라.”

멜토우가 자신의 허리에 매달려있는 멜리안을 보며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흥, 바보 같애.”

인상을 팍 구긴 멜리안이 카일의 곁으로 쪼르르 달음질해 갔다. 그리곤 옷깃을 잡고 수줍게 말했다.

“카일. 아버님과 이야기가 끝나면 꼭 멜리안을 찾아와야 해요.”

멜리안은 카일의 대답도 듣지 않고는 한쪽에 서 있는 시녀를 따라가 버렸다.

이니엘 영애는 저 소녀가 방으로 달려가 새 옷을 꺼내 입고 한껏 단장할 거라는데 자신의 보석함을 걸고 확신할 수 있었다.

“여깁니다.”

앞장서서 걸어가던 멜토우 소영주의 말에, 잠시 상념에 빠져 있던 이니엘 영애가 정신을 차렸다.

“들어가시지요. 영애”

멜토우 소영주가 허리를 굽히며 정중히 말했다. ‘영애’라는 단어에 시안느와 이니엘 영애는 몸을 딱 굳혔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남작님께서는 영애의 비밀을 지켜주실 겁니다.”

카일이 안심하라는 것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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