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103화 (103/404)

103.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아일론 상단은 해가 서서히 저물어가는 저녁이 다 되어서야,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넓은 공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은 샤론 마을로 향하는 길목에 만들어진 쉼터였다. 아일론 상단은 오랜 시간 상행을 이어 오며, 작은 공지에 불과했던 곳을 조금씩 넓혔다. 현재 이곳은 마차 한 대와 짐만 차 5대가 들어가도 남을 정도로 넓은 공간을 만들었다.

마차와 수레는 공터를 중심으로 둥글게 배치해 방책으로 삼은 후, 마른 나무를 모아 중앙에 불을 피웠다.

불이 피어오르자 상단 일꾼들은, 재빨리 수레에서 커다란 솥을 꺼내 본격적으로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동안 용병들은 마차를 중심으로 경계를 서기 시작했다.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상단 일꾼 중 하나가 카일 일행이 모여 있는 곳으로 찾아와 점잖게 말하고 돌아갔다.

오랜 기간 샤론 마을과 왕래를 한 만큼, 상단 일꾼들도 카일이 상단에 중요한 손님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여기에 마법사까지 일행과 친분이 두터워 보이자, 더욱 정중하고 조심스럽게 대하고 있는 것이다.

식사는 딱딱한 보리빵에 약간의 고기가 들어간 묽은 스프였다.

이동 중 먹는 야외음식으로서는 제법 괜찮았다. 다만 귀족가의 영애인 이니엘에게는 조금 많이 투박한 음식이라 할 수 있었다. 시안느가 시무룩하게 웅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했는데….”

귀족은 야영을 하더라도 음식과 예법에 신경을 썼다. 마파린 후작가의 추적을 피할 때나 오크 랜드로 향할 때에는 부득이하게 거친 음식을 먹었지만, 지금처럼 한가하게 이동할 때엔 부드러운 밀 빵이나 고소한 스튜 정도는 있어야 귀족 영애의 식사라 할 수 있었다.

“괜찮아요. 마을에서도 이 정도 음식은 익숙하게 먹었잖아요. 그리고 전 지금 귀족이 아니라, 자유민 소녀에 불과해요. 이런 것엔 익숙해 져야지요.”

평민은 영지를 벗어나기 힘들지만, 자유민이라면 여행을 얼마든지 자유롭게 즐길 수 있었다. 하여 이니엘 영애는 부러 자유민으로 신분을 위장한 것이다.

물론 귀족 출신의 자유민들이 있다지만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 야영 중 귀족들처럼 정찬을 즐기는 부유한 자유민은 더더욱 적었다. 애당초 그렇게 돈이 많았더라면 마차를 타지, 말을 타고 움직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니엘 영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처럼 빵을 뜯어 먹었다. 그러나 사실 지금 이니엘 영애의 손에 들린 보리빵과 묽은 스프는 샤론 마을에서 먹었던 것과 달리 형편없었다.

마을에서 카일이 손수 만들어 줬던 음식들은 귀족들도 맛보기 힘든 귀한 고기와, 숲 깊숙한 곳에서만 자라는 각종 과실과 귀한 버섯을 재료로 만들었기에, 상단에서 나온 음식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었다.

지금 이니엘 영애의 말은 그저 무안해하는 시안느를 달래기 위한 언사에 지나지 않았다.

“아가씨….”

이점을 잘 알고 있는 시안느가 힘없이 머리를 떨궜다. 부 단주인 마티슨은 물론 토일까지 직위를 막론하고 상단의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음식을 먹고 있으니, 도무지 다른 음식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지금은 이런 음식이라도 먹어 허기진 배를 채워야만 했다.

그때 시안느와 이니엘 영애의 근처로 슬쩍 다가선 카일이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아쉬워라. 마차만 타고 왔어도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드렸을 텐데….”

카일이 짐짓 안타깝다는 듯이 팔짱을 끼웠다.

맛없는 스프와 딱딱한 보리빵을 억지로 씹고 있던 시안느와 이니엘 영애가 갑자기 머리를 획 치켜들었다. 순간 둘의 타오르는 눈빛과 마주친 카일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지만, 여기서 복수를 포기할 카일이 아니었다.

“크음. 이렇게 누군가 해주는 음식을 먹으니, 식욕이 절로 도는군!”

카일은 애써 딴청을 피우며 묽은 스프와 보리빵을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물론 정말 맛이 좋은 건 아니었다.

용병들에겐 거친 건량이나 육포를 뜯는 것보다 약간이라도 고기까지 든 따뜻한 스프에 보리빵이 제법 괜찮은 음식일지 몰라도, 매일 다양한 재료로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던 카일의 입장에서는 밍밍한 스프와 딱딱한 보리빵이 성에 찰리가 없었다.

그저 자신을 놀렸던 시안느와 이니엘 영애를 향한 소심한 앙갚음에 지나지 않았다.

“흑….”

그러나 카일의 복수심은 곧 당황으로 바뀌고 말았다.

날카롭게 카일을 째려보던 이니엘 영애의 커다란 눈에 갑자기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것이다. 결국 이니엘 영애는 어깨를 옹송그리곤 소리죽여 흐느끼기 시작했다. 시안느 또한 원망 가득한 눈으로 카일을 쏘아보고 있었다.

“어… 그게 아니라….”

그저 낮에 받았던 놀림이 떠올라 잠시 골려주려던 것뿐이었는데, 둘이 눈물을 떨구자 카일은 쩔쩔매며 말을 더듬었다.

“그냥, 장난친 겁니다. 장난!”

당황한 나머지 카일이 이리저리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두 여인은 아무 말 없이 흐느끼기만 했다.

“아! 잠시만.”

자리에서 앉았다 일어섰다, 안절부절못하던 카일은 한 가지 떠오른 생각에 가죽가방으로 내달렸다. 그리곤 가방 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다시 돌아온 카일은 이니엘 영애와 시안느에게 다가가 주머니를 내밀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냥 잠깐 장난을 친 것뿐이니, 그만 화를 푸세요. 여기 버섯과 산열매를 말린 겁니다.”

“정말… 인정하는 거죠. 카일이 잘못한 거라고.”

시안느가 서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예!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그러니 그만 울음을 그치세요.”

카일은 따질 겨를도 없이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카일의 머릿속은 어서 빨리 두 여인의 울음을 그치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럼… 앞으로 화 안 낼 거죠.”

“물론이죠. 제가 화를 왜 내겠습니까? 앞으로는 절대 놀리지도 않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이건 잘 먹을게요.”

“후우.”

이윽고 들려오는 이니엘 영애의 밝고 활기찬 목소리에 카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밝고 활기찬 목소리?’

몸을 축 늘어트리고 있던 카일은 느릿느릿 굽혔던 허리를 세웠다.

“와~ 이거 너무 맛있어요. 시안느도 어서 먹어봐요.”

설마설마하던 카일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장면은, 자루 안에서 꺼낸 말린 산열매 과육을 오물거리며 활짝 미소를 짓고 있는 이니엘 영애가 시안느에게 새로운 과일을 내미는 모습이었다.

한껏 입꼬리를 끌어올린 시안느는 영애가 내민 말린 과육을 받아들곤 우물거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는 사실을 깨달은 카일은 황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시안느가 그랬어요. 분명 카일에게 맛난 먹을거리가 있을 거라고.”

“처음 계획은 아가씨께서 불쌍한 표정을 짓는 거였어요. 그럼 마음이 약해진 카일이 먹을 걸 내놓을 줄 알았거든요.”

“하지만 카일이 꿈쩍도 안 하고, 놀리기까지 하길래 살짝 계획을 바꿨죠.”

마치 재미난 이야기를 하듯, 시안느와 이니엘 영애가 번갈아 가며 자신들이 세웠던 계획을 주저리주저리 풀어 놓기 시작했다.

“분명 방금 약속했어요. 성질내지 않는다고!”

“설마 여인과의 약속을 어기는 남자는 아닐 거라 믿어요.”

시안느의 마지막 말에 카일은 입을 꾹 다물었다. 허탈한 표정으로 아껴 먹으려 했던 음식들이 사라져 가는 걸 멍하니 지켜봐야만 했다.

“바보 같긴.”

그런 카일을 가만히 지켜보던 워드가 낮은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바보 같다니…. 워드라고 이런 상황에서 다를 것 같아요?”

잔뜩 골이 난 카일이 워드를 쏘아보며 씩씩거렸다.

“흥. 난 처음부터 여인과 다투지 않는다. 멍청한 놈.”

충격적인 말을 연이어 남긴 워드는 쯧쯧 거리면서 자리를 떠났다.

“카일, 화난 거예요? 설마 약속을 어기려는 건 아니죠?”

짐짓 울음기 섞인 이니엘 영애의 음성에 카일이 힘없이 돌아서며 손을 저었다. 그 순간 카일의 귓가로 두 여인의 깔깔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아! 정말 난 멍청한 걸까.’

카일을 심마에 빠지게 하는 난제였다.

* * *

카일 일행이 식사를 마칠 때쯤에도 용병들은 여전히 밥을 먹고 있었다.

이곳은 마을과도 상당히 떨어져 있었고 넓은 숲과 이어진 곳이라, 심심치 않게 오크들이 출몰했다. 때문에 용병들도 주변을 경계해야 하기에 조를 나누어 식사를 하다 보니, 시간이 늦어진 것이다. 돌아온 용병들은 쫄쫄 굶은 배를 부여잡고 스프를 들이켰다.

하지만 그렇게 고대하던 식사를 하고 있음에도 용병들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젠장! 누군 열심히 경계를 서느라 식은 스프에 딱딱한 보리빵을 먹고 있는데, 저 녀석은 아무것도 안 하고 계집들과 웃고 떠들고 있다니.”

막 돌아와 식은 스프를 들이켜던 중년의 하급 용병 하나가 투덜거렸다.

카일은 용병들과 충돌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부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으나, 여인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만은 용병들도 들은 모양이었다.

“조용히 해. 그러다 코퍼 대장에게 불려가지 말고. 비터도 조금 전에 코퍼 대장에게 불려갔었잖아.”

“칫, 나도 알아. 게다가 저 녀석, 마법사님과도 친분이 두터운 것 같았어. 괜히 마법사님 눈 밖에 날 생각은 나도 없다고.”

“마법사님뿐이냐? 코퍼 대장에게 찍히면, 앞으로 아일론 상단의 상행에 끼워주지 않을지도 몰라.”

“여기 그런 거 모르는 사람 있어? 그러니 열이 받아도 참고 있는 거지.”

불만을 늘어놓던 용병들의 눈길이 하나둘 코퍼에게로 향했다.

아일론 상단의 상행은 험한 오지를 왕래해야 하지만 그만큼 보수도 후했고, 끼니 때마다 따뜻한 음식을 만들어, 부 단주부터 말단 일꾼까지 똑같이 나누어 먹었다. 대부분의 상단이 보리빵이나 건량만 주는 것에 비하면 질이 상당히 좋은 축에 속했다.

이런 점 덕에 아일론 상단의 상행에 참가했던 용병들은 다음에 다시 참여하길 간절히 원했다. 때문에 상행의 호위를 총괄하는 용병대장인 코퍼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 * *

우여곡절 끝에 식사를 마친 카일은 주변을 둘러보다 곧장 숲속으로 들어갔다.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은 시간, 본격적으로 몬스터들이 활동하며 사냥을 할 즈음인 이때가 숲에서는 가장 위험한 시간이었다.

“저, 저 붙잡아야 하는 거 아니야? 저러다 잘못되기라도 하면….”

“놔둬! 설마 죽기야 하겠어? 저 녀석 샤론 마을 출신이잖아.”

“그래도 위험할 것 같은데….”

“저 녀석 일행들도 가만히 있잖아. 걱정할 것 없어.”

용병들은 걱정스러운 듯 숲 쪽을 바라보며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그러나 이미 사라져 버린 사람을 뒤따라가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카일은 기다란 나뭇가지 대여섯 개를 지고 숲을 빠져나왔다.

“녀석, 그래도 숲에서 살아남는 재주는 있나 보네.”

“칫! 죽을 줄 알았더니만….”

몇몇 용병들이 카일이 싸매고 온 나뭇가지에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저 녀석 나뭇가지는 뭐 하려고 잘라온 거지?”

“글쎄? 땔감은 아닌 것 같은데.”

용병들의 시선이 하나둘씩 카일에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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