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코퍼 용병대2
카일은 자경 대장 보일의 아들이긴 했지만, 덩치만 크지 이제 갓 17살이 된 애송이에 불과했다.
그리고 보일 대장이 대단한 검술을 익히고 있다 해도, 결국 용병검술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덩치가 큰 걸 보아하니 힘을 꽤 쓸 것 같지만, 비터와 마크는 햇수로 5년 이상 용병으로 굴러다닌 놈들입니다. 더군다나 저 둘은 벌써 소드 유저에 올랐습니다. 아무리 보일 대장에게검술을 배웠어도, 비터와 마크를 당해낼 수 없을 겁니다.”
염려가 한가득 담긴 아튜의 음성에 코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토일만 해도 벌써 몇 차례나 카일 일행을 찾아 불편한 점이 없는지 수시로 확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단의 속도도 최대한 늦춰 처음 말을 타는 카일을 배려해 주고 있었다.
중요한 물품을 운송하는 게 아니라 하더라도, 상행의 기본은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해 운임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다. 목적지에 하루 늦게 도착하면 용병들에게 지급해야 할 몫도 그만큼 늘어나기에, 손해가 증가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일론 상단은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다는 양 상행을 늦추고 있었다. 아일론 상단에 있어 카일이 중요한 사람임을 부인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넌 마크와 비터를 살펴봐. 이상한 움직임이 보이면 즉시 내게 보고하고.”
“그냥 보고만 있습니까? 미리 경고를 해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사실 둘을 제외한 다른 용병들도 카일을 탐탁지 않아 합니다.”
“쯧. 놔둬. 다른 녀석들은 마법사님이 겁나서라도 일을 벌이지 않을 거다.”
“하긴 그것도 그렇겠군요.”
납득했는지 아튜가 머리를 주억거렸다.
고위 마법사가 찾아보기 힘든 만큼 위험한 존재라는 걸 모르는 용병은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마법사 멀린은 대부분의 시간을 포장을 입힌 마차 안에만 있었다. 가끔 밖으로 나왔을 때에도 카일 일행과 잠시 이야기를 나눴을 뿐, 다른 사람과는 만나지 않아 두 사람의 친분이 두텁다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요주의 인물인 저 두 사람만 예의 주시해라.”
“알겠습니다. 형님.”
“멍청한 놈. 벌써 몇 번을 말해! 형님이 아니라 대장이라니까. 뒷골목 출신 아니랄까 봐.”
“헤헤, 습관적으로다가… 죄송합니다 형님. 아, 아니 대장.”
아튜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순박한 겉모습과 달리 아튜는 제법 이름 있는 뒷골목 길드의 부두목 출신이었다. 나름대로 잘 나가던 그가 코퍼를 따르게 된 건, 길드원의 배신으로 죽을 위기에 처한 아튜를 코퍼가 구하면서부터였다.
“그럼 일단 형, 크흠. 대장의 말처럼 하고 있겠습니다.”
습관처럼 형님이라는 단어를 뱉으려던 아튜는 코퍼가 눈을 부라리자 후다닥 말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곤 슬슬 뒷걸음질 쳐 멀어졌다. 코퍼는 굳이 아튜를 붙잡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코퍼는 비틀거리는 카일을 응시하며, 허리에 매달려 있는 검집을 가볍게 쓸어 올렸다.
잠시 생각을 골몰하던 그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랐다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 * *
“흠. 이상하군.”
“예?”
지금껏 존재감 없이 뒤를 따라오던 워드의 말에 카일이 되물었지만, 워드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없이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카일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워드를 따라 앞서가는 아일론 상단, 정확히는 용병들에게로 향했다.
“음… 확실히.”
카일은 주의 깊게 앞서가는 용병들을 살폈다.
마을에서 사람들과 그다지 어울려 지내지 않았다 해도 전생과 이생을 모두 합치면 40년을 넘게 살아왔다. 더군다나 전생에 고아로 살아오다 보니 늘어난 것은 눈치뿐이라, 주변에서 느껴지는 적대적인 시선을 모를 수 없었다.
“너무 느슨했어.”
카일이 자신을 책망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지금껏 말을 타는 데만 집중하다 보니 주변을 둘러볼 여력이 없었다. 익숙하지 않은 말타기에 정신력을 쏟아야 했으니, 눈치를 채는 게 늦은 것이다. 더군다나 아일론 상단은 마을뿐 아니라, 카일과도 몇 년 동안 꾸준히 거래해오며 친분을 쌓아 왔기에, 한순간 마음을 놓아버린 탓도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카일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시안느가 슬그머니 질문을 던져왔다.
“아무래도 용병들은 우리 일행의 합류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습니다.”
“네?”
“어….”
카일의 말에 시안느와 이니엘 영애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나절 이상 상단을 따라왔지만, 용병들이 일행을 향해 적대적인 행위를 보이거나 따로 시비를 걸어 온 적은 없었다. 더군다나 카일 일행은 상단의 가장 후미에서 따라오고 있어, 용병들과 직접 부딪힐 일도 적었다.
“이봐 우리 통성명이나 하지.”
그때였다.
카일의 곁으로 용병 한 명이 말을 천천히 몰아 다가왔다. 그 용병은 170 언저리로 보이는 키에 다소 마른 체형을 지니고 있었다.
허리춤엔 달걀 정도 굵기에 끝으로 갈수록 뾰족해지는 1m 남짓 길이의 검이, 검집도 없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손잡이 부분은 미끄럼 방지용 가죽끈이 단단히 매듭지어져 있었다. 독특하면서도 실용적이고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그야말로 자유로운 용병의 표본 같은 자태였다.
“내 소개부터 하지. 난 용병 비터라고 한다.”
비터가 쌀쌀맞은 태도로 카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카일이 타고 있는 말이 보통 말보다 큰 샤이어종일 뿐 아니라, 카일의 체구 역시 워낙 남다르다 보니 대화를 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옆으로 다가선 비터의 몸집은 상대적으로 더 작아 보였다.
“샤론 마을의 카일입니다.”
카일은 비터를 내려다보며 정중하게 말했다, 그러나 아래를 내려다보는 카일의 눈빛에선 기묘한 위압감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비터는 잠시 움츠러드는 마음을 억지로 다잡고 카일을 노려봤다.
“용병이 되려 한다지?”
“그렇습니다만.”
대뜸 비터가 쏘아붙이자 카일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싸늘한 표정과 냉랭한 태도는 분명 시비를 걸기 위해 왔다고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용병에 대해 아나?”
“검을 팔아 골드를 번다고만 들었습니다.”
어찌 보면 용병을 비하하는 말이라 할 수 있지만, 이보다 정확하고 간략한 표현은 없을 것이다.
“확실히… 맞는 말이군.”
카일은 자신의 말에 비터가 길길이 날뛰며 분노할 줄 알았으나, 뜻밖에도 비터는 화를 내기는커녕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태도가 온화하게 바뀐 것은 아니었다. 비터는 냉담한 음성을 유지하며 말했다.
“용병이 검을 팔아 골드를 버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용병 세계엔 나름대로 규칙이 있지.”
“규칙 말입니까?”
“그래, 규칙. 용병이 되기 위해서는….”
“잠깐!”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두 사람의 대화를 끊었다.
“대장님!”
비터가 고개를 돌리자 언제 왔는지 용병대장인 코퍼가 그들의 앞에 다가와 있었다.
“비터. 잠시 카일과 대화를 하려 하는데, 자리 좀 피해 주겠나?”
코퍼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점잖은 축객령을 내렸다.
“하지만 제가 먼저 카일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미안하게 되었네. 중요하게 카일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런다네. 내가 부탁을 하지.”
코퍼의 말은 부탁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사실 이는 명령에 가까웠다. 개인 용병들은 상단이 부리는 용병이 아니라 코퍼가 상행을 위해 고용한 이들이었다. 상행이 끝나고 용병 계약이 끝날 때까지 비터를 비롯한 개인 용병들은 코퍼의 명을 들어야 했다.
그런데도 코퍼가 부탁하는 것처럼 말했다는 건, 거절했을 때 따라올 피해를 비터가 온전히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대장과의 얘기가 끝나면 다시 오도록 하겠습니다.”
눈알을 굴리던 비터는 어쩔 수 없다 판단을 내렸는지 선선히 물러났다.
“고맙네.”
코퍼가 돌아가는 비터를 보며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코퍼가 돌아가는 비터를 향해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입술을 짓씹으며 돌아가던 비터는 마지막으로 카일을 사납게 노려보곤 말을 몰아 사라졌다.
“조심하게.”
온몸으로 적대감을 뿜어내는 비터를 황당이 바라보던 카일에게 코퍼가 넌지시 말했다.
“예?”
“자네도 눈치가 있으니, 용병들이 자네를 보는 눈이 곱지 않다는 것은 잘 알겠지?”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뻔하지 않나. 시기심이지.”
“시기심이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코끝을 긁는 카일을 보던 코퍼가 목소리 크기를 한껏 낮춰 말했다.
“양옆을 보게. 아름다운 두 미녀가 자네를 보며 웃음을 짓고 있네. 사내라면 누구라도 자네를 시기하지 않겠나.”
“그게 무슨….”
“저 둘과 무슨 관계를 지녔는진 중요하지 않네. 자네 옆에 아름다운 여인들이 있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니.”
카일이 황망한 표정을 짓든 말든, 코퍼는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이어갔다.
“그래, 이번에 용병이 될 거라 들었네.”
“예. 용병이 되어 이곳저곳 돌아볼 생각입니다.”
“그러니 더욱 조심해야 하지. 용병이 되기 전 바로 지금이 가장 위험한 시기라 할 수 있다 네.”
코퍼는 진중한 얼굴로 카일에게 충고했다.
“용병이 되려 하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용병이 되어 용병패를 받는 사람의 숫자는 한해에 수백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네. 왜 그런지 아는가?”
“죄송합니다만, 전 마을을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 영주 성도 이번이 처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용병에 대해서는 더더욱 아는 게 없지요.”
카일의 말에 코퍼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지마을에서만 살아온 카일이 용병의 삶에 대해 알기란 어려운 일일 것이다. 자경 대장인 보일이 오래전 용병계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고 해도, 십여 년이 지난 지금은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그렇다면 용병 길드의 현재 상황을 알려 주겠네. 용병 길드는 오래전부터 모든 용병들의 이익과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네.”
“용병 길드에 대해서는 아버지께 대략적으로나마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보일 대장이 좋은 용병이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네. 하지만 그때의 용병 길드와 지금의 용병 길드는 많이 달라졌네. 물론 지금도 용병들을 위한 길드란 것은 변함이 없지만, 그 방향이 개인 용병이 아니라 용병대와 용병 가문으로 옮겨갔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그것과 용병이 되려는 사람의 숫자가 줄어든 게 관련이 있습니까?”
“물론이지! 용병 가문이나 용병대의 힘이 점차 강화되면서, 아주 고약한 규칙이 만들어졌네.”
코퍼가 짐짓 씁쓸한 표정으로 이쪽을 연신 흘깃거리고 있는 비터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비터는 시선을 피하며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몇 해 전부터 용병, 그중에서도 오러를 다룰 줄 아는 용병이라면 누구든 용병이 되려는 자를 시험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네. 덕분에 용병을 지원하는 자들 중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지.”
“희생?”
“그래, 희생! 용병 길드는 용병의 실력을 점검해 능력에 맞게 용병패를 지급하므로, 시험을 그리 혹독하게 치르지 않네. 하지만 용병들은….”
“시험이란 명목하에 용병이 되려는 자를 괴롭히는 겁니까?”
“괴롭힘이 아니라 용병이 되지 못하게 만들었네. 죽이지만 않는다면 용병 길드에서 관여하지 않으니, 거리낌 없이 손을 쓰는 것이지.”
코퍼의 말에 카일은 물론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시안느와 이니엘 영애마저 얼굴을 찡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