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코퍼 용병대1
마을을 떠난 아일론 상단은 천천히 다핸 남작성을 향했다.
남작성까지는 빠른 말을 몰면 하루 만에 도착할 수 있는 거라지만, 좁고 거친 길을 달려야 하기에 약간의 우회가 필요했다. 결국 아일론 상단은 하루가 더 지나서야 다핸 남작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덕분에 처음 말을 타는 카일도 겨우겨우 뒤처지지 않고 상단을 쫓을 수 있었다.
“괜찮아요? 표정이 좋지 않아요.”
카일의 곁에서 나란히 말을 몰아가던 이니엘 영애가 경직된 카일의 얼굴을 보곤 걱정스레 물었다.
아무리 상단의 이동속도가 느리다고 해도, 이제 갓 승마를 배운 사람이 한나절 이상 말을 몰아간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강인한 체력과 타고난 균형 감각을 가진 카일이 아니었다면 단 몇 시간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카일도 이젠 한계에 달했는지, 이마 위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좀, 힘들긴 합니다만… 아직까지는 괜찮습니다.”
카일은 간신히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지만 안타깝게도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푸훗.”
옆에서 말을 몰며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시안느가 참았던 웃음을 내뱉었다.
대뜸 울리는 웃음소리에 카일이 시안느를 바라봤다. 잠시 당황한 시안느가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짐짓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카일이 미간을 일그러트리자 시안느가 당황한 듯 황급히 변명했다.
“미안해요. 일부러 웃은 건 아니에요. 그냥… 오크 랜드를 제집처럼 드나들고, 무서운 웨어 울프도 겁내지 않던 사람이 고작 말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다는 생각에….”
시안느가 손사래 치며 사과했지만, 여전히 얼굴엔 웃음을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처음부터 모든 걸 잘하는 사람은 없죠. 전 빨리 배우는 편이라 말도 곧 잘 탈 겁니다.”
짐짓 화가 난 체하면서 카일은 불퉁히 말했다.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카일이 성질 난 듯 말하자, 당황한 이니엘 영애가 서둘러 사과를 했다. 이니엘 영애가 말을 타겠다고 고집만 부리지 않았다면, 그들은 지금쯤 편안히 마차를 타고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카일도 무리해 가며 승마를 배우지 않아도 되었을 터였다.
“아, 아닙니다. 어차피 용병이 되려면 말 타는 법은 배워둬야 했습니다. 이렇게라도 익혀 놓는 게 도움이 될 겁니다.”
이니엘 영애가 시무룩한 얼굴을 하자 카일이 허둥지둥 대꾸했다. 그리고 허벅지 안쪽에서 올라오는 고통을 억지로 참으며 처져있는 이니엘 영애를 애써 위로했다. 억지로 입매를 끌어올린 카일의 낯은 우스꽝스럽기 그지 없었다.
“풋.”
또다시 들려온 웃음소리에 카일은 머리를 획 돌려 시안느를 노려보았다. 시안느는 이번에도 손으로 입을 가리며 고개를 돌려 딴청을 부렸다.
“푸훗.”
이번에 울린 실소는 시안느의 것이 아니었다. 놀란 카일은 단 하나 남은 범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 침울했냐는 양 이니엘 영애는 상체를 들썩이고 있었다.
“…젠장.”
카일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이제서야 두 여인에게 놀림을 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호호호.”
“하하.”
억울해 보이는 카일의 낯빛에 결국 시안느와 이니엘 영애는 참았던 폭소를 터트렸다.
그리고 들려온 워드의 음성은 카일을 절망에 빠트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멍청한 놈.”
억울해진 카일은 뒤를 바라봤다. 워드는 여전히 모든 것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무심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할 카일이 아니었다.
한나절 동안 말 한마디 없던 워드의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이 ‘멍청한 놈’이란 사실에 충격에 빠진 카일이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허리를 조금 더 펴야 해요.”
“예?”
좌절하고 있던 카일에게 시안느가 나직이 일러주었다. 그녀의 숨소리에선 아직도 웃음기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힘들겠지만 허리를 조금 더 펴야 해요. 아무래도 처음 말을 타고 오래 있다 보면 자세가 무너지기 마련이죠. 말타기는 경험도 중요하지만, 바른 자세를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도 중요해요.”
시안느의 말에 카일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보일이 간단하게나마 승마술을 알려주었지만, 말을 처음 타는 사람이 남부 끝자락 마을에서 중부 트라발트 공작령까지 간다는 건 무척 고된 일이었다. 그런데도 보일이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았던 것은 누구보다 훌륭한 스승이 그의 곁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말의 움직임에 적응하는 게 먼저예요. 다행히 카일은 균형 감각과 체력이 뛰어나니, 자세만 바로잡아주면 말타기는 금방 배울 수 있을 거예요.”
상냥한 시안느의 조언에 지쳐있던 카일은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리곤 감탄하는 눈빛으로 시안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녀는 기사 집안 출신일 뿐 아니라 이니엘 영애의 호위 기사였다.
기사란 말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말을 다룰 줄 모른다면 기사라 할 수 없었다. 특히 동부의 맹주인 그린넨 백작가의 영애를 호위하는 기사인 만큼, 일반 평기사보다 모든 면에서 더 뛰어난 실력을 갖췄다 볼 수 있었다.
보일도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공작령까지 가는 동안 어련히 알아서 시안느가 알려주겠거니 하고 생각한 것일 터였다.
“가는 동안 자세가 흐트러지면 제가 바로바로 지적해 줄게요. 그러니 너무 초조해할 필요는 없어요. 마음이 급하면 몸이 굳기 마련이니까요.”
“고맙습니다.”
“뭘 이 정도로요. 다행히 상단이 움직이는 속도가 느려서, 승마를 배우기에는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시안느가 웃으며 말을 했다. 어쩌면 두 여인도 긴장으로 잔뜩 굳어 있는 카일을 풀어주기 위해, 짓궂게 행동한 것일지도 몰랐다.
* * *
“칫.”
상단의 가장 후미에서 들려오는 여인들의 깔깔거림에, 비터는 못마땅한 기류를 풍기며 이마를 찌푸렸다. 비터의 사나운 눈초리는 어설프게 말고삐를 쥐고 있는 거구의 사내를 향해 있었다.
“팔자가 좋군! 어린놈이 벌써부터 양옆으로 계집을 끼고 말이야.”
비터의 옆에 있던 마크 역시 쓴웃음을 머금고 뒤를 슬쩍 돌아봤다. 정확히는 카일의 오른쪽과 왼쪽에 있는 시안느와 이니엘 영애를 훔쳐본 것이다.
사실 이 두 사람은 귀족가의 영애들 사이에서는 대단한 미녀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용병들이 쉽게 볼 수 있는 외모가 아니었기에, 자꾸만 흘깃거렸던 것이다.
“쯧. 행여나 함부로 집적댈 생각은 마라. 옷차림이야 제법 평민들이나 용병 흉내를 냈지만, 낮은 신분은 절대 아닌 것 같으니까.”
“하긴… 일반적인 평민 계집이 저렇게 능숙하게 말을 다룰 리가 없지, 용병도 아닌데 말이야.”
이니엘을 보던 마크가 말했다.
겉으로는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 있지만, 작은 동작 하나마다 우아한 태도가 그대로 묻어나 있었다. 어릴 때부터 들에 나와 일한 탓에 거친 손과 검게 타버린 얼굴빛을 지닌 여느 평민 여인과는 달리, 이니엘은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에 탐스러운 붉은 머리칼, 푸른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절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결정적으로 마크의 말처럼 오지 마을의 평민 여인이 저렇게 능숙하게 말을 다룬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오히려 어설프게 말을 몰아 상단의 뒤를 힘겹게 따르는 카일의 모습이 더 정상적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코퍼 대장도 지켜만 보고 있는데 우리가 어쩌겠어.”
마크가 선두에 선 용병대장 코퍼를 바라보며 웅얼거렸다.
현재 아일론 상단의 호위를 맡은 코퍼 용병대는 인원이 5명뿐인 소규모 용병대지만, 오랫동안 아일론 상단의 호위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만큼 실력도 좋은 건 물론이요, 맡은 의뢰를 끝까지 완수해 신뢰가 높은 용병대 중 하나였다.
하지만 코퍼 용병대는 워낙 작은 용병대라, 상단호위를 5명의 용병이 모두 도맡아 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상행 때마다 실력과 경험 있는 하급용병들을 추가로 모집해 상단을 호위하고 있었다.
비터와 마크 역시 코퍼 용병대장의 눈에 띄어 상단호위에 참여한 개인 용병이었다.
“흥! 계집들만 건드리지 않으면 될 거 아니야. 듣기로는 저 녀석 이번에 용병이 되려고 한다던데, 용병들의 세계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 줘야지. 건방진 녀석.”
비터가 시근덕거리자 마크가 근심 어린 낯빛을 띄웠다.
“그래도 괜찮을까? 저 녀석 마법사님과 제법 친분이 두터운 것 같은데….”
마크가 불안한 듯 말했다.
순간 비터의 안면이 파리하게 질렸다. 샤론 마을로 향하는 길에 합류한 사내가 왕립 마탑 출신의 마법사, 그것도 4서클의 고위 마법사란 사실은 멀린과 아일론 상단 간의 단기계약이 이루어지면서, 공공연해진 비밀이었다.
잠시 고뇌하고 있던 비터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이번 일은 용병들 일이야. 아무리 마법사라도 끼어들 수는 없어.”
“아무리 용병들 일이라지만… 마법사들이 얼마나 괴팍한지 너도 잘 알잖아.”
마크는 쉽사리 걱정을 내려놓지 못했다.
흔하진 않지만 용병들 세계에도 3서클 이상의 마법사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용병 세계에서도 귀한 대접을 받았다. 대부분 커다란 용병대나 용병 가문에 소속되어 높은 대우와 보수를 받지만, 간혹 하급용병들을 가드로 고용해 홀로 다니는 마법사들도 있었다. 마크와 비터 두 사람 모두 한동안 용병 마법사의 가드로 고용된 적이 있어, 그들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물며 지금 상단에 있는 마법사는 4서클의 고위 마법사였다.
이 정도 수준의 마법사라면 코퍼 용병대장이라도 쉽게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만일 마법사가 카일을 보호하기로 마음을 먹기라도 할 시, 고작 하급용병에 지나지 않는 두 사람이 상대할 방법은 없었다.
마크의 말에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비터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마법사가 나서준다면야 오히려 더 좋지.”
“무슨 말이야.”
“용병이 되려는 자가 마법사의 뒤에 숨어 용병 세계의 룰을 어긴다면…. 후후 과연 용병 길드에서 저 녀석을 받아 줄까?”
마크가 휘둥그렇게 눈을 떴다.
“너 설마 저 녀석과….”
흐려지는 마크의 말꼬리에 비터는 그저 차갑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 * *
“형님!”
느릿느릿 말을 몰아가던 코퍼가 곁으로 다가온 작달막한 사내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냐, 아튜.”
“저 녀석들 뭔가 일을 꾸미는 것 같은데 말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튜가 멀리서 수군거리는 마크와 비터를 가리켰다. 뒤에서 따라오는 카일과 두 여인은 상단에 중요한 손님이라고만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코퍼와 아튜만은 두 여인, 그중에서도 평민 복장을 한 여인이 고귀한 가문의 영애란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만약 저 여인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자신과 상단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줄 터였다.
“쯧, 걱정 말게. 아무 일도 없을 테니.”
“예?”
“아무리 아둔해도 저 여인들이 귀족가의 영애란 건 저 녀석들도 눈치챘을 거야. 그러니 걱정할 것 없네. 무모하게 일을 만들 녀석들을 데려오진 않았으니.”
“하지만 저 녀석들 카일에게 시비를 걸면 어쩝니까? 카일이 아일론 상단에 무척 중요한 사람이란 건 형님도 알지 않습니까.”
눈썹을 문지르는 아튜의 행동에선 근심이 뚝뚝 묻어나왔다. 아일론 상단은 중소 상단에 불과하지만 코퍼 용병단의 중요한 수입원 중 하나일 뿐 아니라, 오랫동안 친분을 쌓아온 만큼 절대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카일이 다칠까 걱정이 되는 것이냐?”
“형님도 카일이 상단에 납품하는 그 물건에 대해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 물건은 바로 도자기와 옹기였다.
유일하게 아일론 상단만이 취급할 수 있는 도자기와 옹기는, 늘 수량이 부족해 골드가 있다고 해도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흠… 그건 좀 문제가 있겠는데.”
흘긋 카일을 돌아본 코퍼가 콧잔등을 찡그리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