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고스트2
고스트 기사단은 공작가의 숨은 힘 중 하나로, 제국에서도 알고 있는 사람이 극히 드문 베일에 싸인 기사단이었다.
“왜 이번 일에 직접 나서려는 것이냐? 이번 일은 공작 가문의 일이 아니라, 공작인 내 야망을 위한 일이다.”
공작의 말에 사내의 얼굴에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공작가의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 아이를 이번 일에 끌어들인 겁니까?”
사내의 눈동자가 냉랭하게 가라앉았다.
“역시 그 녀석의 죽음 때문인 것이냐?”
“그때 분명 약조하셨습니다. 그 아이는 고스트로 키워질 것이라고. 그 녀석은 제 뒤를 이어 고스트의 수장이 돼야 했습니다.”
그는 유령이 되어 어둠 속에서 공작가와 공작을 위해 수많은 일을 해 왔다. 덕분에 혼인도 하지 못했고 자식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자신과 같은 처지의 그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 애는 조카이자 아들이었고, 고스트를 물려줄 후계자였다.
“그건….”
입술을 벙긋거리던 공작은 이내 다물었다.
어쩌면 사내와 약조를 어기고 그 녀석을 데려온 것부터가 잘못이었는지도 몰랐다. 이제 와 후회가 들었으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녀석의 복수를 할 생각이냐?”
“고스트에게는 고스트만의 규칙이 있습니다.”
“녀석은 보이지 않는 마법 무구에 죽었다. 누가 그 아이를 죽였는지 모른다. 어떻게 복수할 생각이냐.”
의자에 앉은 공작은 습관적으로 손에 든 와인잔을 돌렸다.
“요즘도 블랙 와이번을 찾아 제국을 뒤지고 다니는 멍청한 짓을 하고 다닙니까?”
“블랙 와이번은 화이트 와이번과 함께 희귀 와이번 중 하나다. 너도 시카니스의 가치를 잘 알고 있을 텐데?”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라면 시카니스를 찾기 위해 제국을 뒤지는 바보 같은 짓을 하진 않을 겁니다. 녀석은 제국에 없을 테니까요.”
“무슨… 말이냐?”
“와이번은 드레곤이 만든 마법 생물이란 사실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자가 있겠느냐.”
“허면 어째서 드레곤이 와이번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까?”
공작은 섣불리 답을 내놓지 못했다. 잠시 기다리던 사내는 공작이 우물쭈물거리자 알아서 해답을 내놓았다.
“와이번은 드레곤을 보호하기 위한 가디언이었습니다.”
“가디언!”
“그렇습니다. 와이번이 맹약자를 위해 목숨을 바칠 정도로 헌신적인 보호를 쏟는 것엔 이러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맹약자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가디언의 숙명에 따라 새로운 맹약자를 찾아 나섭니다.”
“와이번이 맹약자를 잃는 즉시 다른 맹약자를 찾는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 첫 번째 대상이 바로 맹약자를 죽인 상대라면?”
공작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그게 무슨…!”
“맹약자를 죽였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상대가 죽은 맹약자보다 강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상대가 다른 와이번과 맹약을 맺지 않았다면, 와이번에게는 최고의 맹약자라는 말이 되는 겁니다.”
공작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사내의 말대로라면 현재 블랙 와이번은 제국이 아니라 왕국에 있다는 소리였다.
“허나 이는 모두 너의 추측이 아니냐?”
“블랙 와이번이 돌아왔을 때 중급 엑스퍼트 기사를 대기시켜 놓았다고 들었습니다.”
“만약을 대비해 실력 있는 기사를 대기시켜 놓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중급 엑스퍼트를 보고도 시카니스가 떠났다는 건 이미 맹약자를 선택했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우리 고스트 기사단의 복수대상은, 현재 시카니스와 맹약을 맺고 있는 자일 겁니다.”
“그럼 샤론 마을로 가야 하는 것 아니냐?”
“저도 처음에는 샤론 마을로 가려 했지만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무슨 말이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파괴적인 무기! 오크 랜드와 인접한 오지마을에 그런 고서클의 마법 무구가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사내의 타당한 의심에 공작은 수긍했다.
“하긴 그것도 그런가. 나 역시 무구의 정체를 알기 위해, 빛의 마탑 장로인 데너리스에게 물었으나 해답을 얻지 못했다. 데너리스가 말하길 마법인지도 정확하지 않다고 했다. 오히려 강력한 물리력으로 생긴 관통상에 가까워 보인다고 했지. 그런 상처를 입히는 게 가능한 마법 무구가 고작 구석진 마을에 있을 리가 없지.”
“바로 그겁니다. 때문에 저희 고스트는 왕국의 레드 백(RED BACK)이 중간에 끼어든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래드 백(RED BACK)은 크로노스 왕국에만 서식하는 붉은등거미로, 덩치는 작지만 한번 물리면 소드 엑스퍼트라도 살아남기 어려울 정도로 위험한 맹독을 가진 거미였다.
크로노스 왕국에서는 이 붉은등거미의 이름을 따 방첩조직을 만들었다.
“붉은 거미! …역시 그들인가.”
“검은 여우를 좇는 게 바로 붉은 거미의 일입니다. 이번 일에 가담한 검은 여우를 쫓아 왔을 게 분명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군.”
“지금까지 블랙 와이번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붉은 거미 요원과 맹약을 맺었다면 가능한 일이지! 그들은 신분이 철저하게 감춰져 있는 자들이니까.”
“이 추측이 사실이라면, 놈들을 끌어내기 위해서라도 왕국을 흔들어 놓아야겠지요.”
사내의 말에 공작이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이번 일은 서남부로 집중될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목적으로 계획된 일이었다. 이 이상 사건을 벌인다고 해도 공작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없었다. 하지만 사내의 말처럼 복수가 목적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손해를 보더라도 해야만 하는 일이 바로 복수였다. 더군다나 크로노스 왕국에 블랙 와이번이 있다면 공작으로서도 반드시 회수해야만 했다. 최악의 경우, 회수가 불가하다면 살려둬서는 안 되는 존재이기도 했으므로.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는 공작을 바라보던 사내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정은 공작 각하께서 하시는 일이니 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어차피 저희 고스트는 공작의 명이 있어야 제국을 벗어날 수 있으니….”
사내가 걸어 나왔던 어둠 속으로 돌아갔다.
“살아 돌아올 수 있겠느냐?”
감고 있던 눈을 뜬 공작이 사내의 등을 보며 물었다.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살아 돌아오너라! 살아서 돌아온다면… 정식으로 널 가문에 알리겠다.”
공작의 말에 사내는 몸을 가볍게 떨었다.
“전 그저 유령일 뿐입니다.”
“널 유령이라 생각해 본 적 없다. 비록 한 배에서 태어나진 않았지만 넌 내 동생이다. 이 사실을 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제 존재가 밝혀지면 분란이 생길 겁니다.”
“그럴 일은 없다. 공작으로서 가문의 장악력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누구보다 잘 알지 않느냐? 누구도 내 명을 거역할 수도 자릴 넘볼 수도 없다.”
자신감 넘치는 공작의 목소리에 사내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가 금방 자취를 감췄다.
“전 고스트로 만족합니다. 전대 가주의 명에 따라 유령이 되어 공작가를 지킬 뿐입니다. 다른 욕심은 없습니다.”
그리고 사내는 공작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암흑 속으로 몸을 감췄다.
* * *
“이건?”
손에 들려 있는 총을 본 보일은 당황한 듯 카일을 바라보았다.
“숲에서 돌아온 이후 계속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더니, 이걸 만들고 있었던 것이냐?”
“떠나기 전에 꼭 만들어 드리고 싶었어요. 가지고 싶어 하셨잖아요.”
“이런 마법 무구라면 오크를 더 효율적으로 막을 수 있지 않겠느냐?”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혼자 쓰셔야 해요. 총이 귀족들에게 알려진다면 어떻게 사용될지 알 수 없으니까요. 총이란 게 꼭 오크에게만 사용되지는 않을 거예요.”
“걱정 말거라!”
보일은 손에 들고 있던 총을 유심히 살펴봤다.
보일에게 주의를 주긴 했지만, 사실 카일은 총이 대량으로 만들어질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어떤 물건이든 대량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재료 수급이 원활해야만 했다. 그러나 총은 재료 수급부터 문제가 많았다.
강철이 발달하지 못한 세상에서 폭발력을 견딜 수 있는 총열의 재료는 미스랄이 함유된 합금뿐이었다.
하지만 미스랄을 고 합금할 경우 대량으로 생산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설령 고 합금 미스랄을 이용해 틀을 만들고 주물을 통해 총열을 만들더라도, 총신 전체를 균일한 강도로 합금해야 한다는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더군다나 총열 안에 강선을 판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카일의 경우 나선형의 강철 막대기에 오러를 불어 넣어 구멍을 뚫고 강선을 파낼 수 있었다.
그러나 엑스퍼트에 오른 긍지 높은 기사들이, 하급계층인 대장장이들을 대신해 총열을 깎고 구멍을 뚫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큰 비용을 들인다면 용병을 고용할 수도 있겠지만, 효율도 떨어지고 총기 제작비용만 상승시킬 뿐이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총의 핵심인 몸체였다.
카일은 수년에 걸쳐 나사 하나 부품 하나하나를 직접 깎아, 정교하게 총을 만들었다. 그 기계적 세심함이 집약된 부분이 바로 방아쇠와 약실을 이어주는 몸체인 방아틀 뭉치였다.
이런 기계적인 장치는 그 원리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쉬이 만들지 못하는 부분이었다.
“흠… 전에 보던 것과는 많이 다른 것 같구나.”
“네! 하지만 사용하기는 더 쉬울 거예요.”
보일의 손에 들려 있는 총은 카일이 앞서 만든 소총과는 차이가 있었다. 카일의 총이 전체적으로 구경이 작고 날렵한 형태를 지녔다면, 보일의 총은 구경이 큰 두 개의 총열을 가진 투박하고 둔중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총열을 꺾어 사용하는 중절식 소총인데, 사거리는 좀 짧지만 파괴력은 더 높아요. 그래서 몬스터, 특히 오크를 상대하기는 더 유용할 거예요.”
이번에 만든 총은 강선을 파지 않은 2개의 총열에, 작은 자탄 여러 개가 들어간 탄환을 한발씩 쏘는 산탄총이었다.
급하게 만들다 보니 단순한 엽총 방식의 중절식 소총의 형태를 띠게 되었으나, 사거리가 대략 100m 정도에 작은 쇠 구슬 5~6개가 넓게 퍼지면서 날아가는 산탄 방식이라, 짧은 거리에서 정확도와 파괴력은 더 높았다.
“멀린 님께서 총열 안쪽에 하급 마나석과 각인을 새겨 주신 덕분에, 따로 스크롤은 필요가 없을거에요. 대신 탄환을 만들 때 각인을 새겨야 하지만, 각인 마법을 새길 수 있는 장치도 이미 만들어 놓았으니,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씩 만들어 두면 사용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거예요.”
보일의 총은 세 개의 각인이 만나야만 탄환이 쏘아지도록 제작이 되었다.
첫 번째는 총 안쪽에 박혀 있는 마나석, 두 번째는 탄환, 그리고 마지막으로 탄환을 내려치는 해머까지. 최종적으로 세 개의 각인이 만나는 순간, 약실 안에서 익스플로젼 마법이 발현되며 총탄이 발사되는 원리였다.
카일은 보일이 사용할 총 역시 스크롤을 이용해 탄환을 만들어 사용하게 하려 했었다.
마침 마을에서 사용하기 위해 보일이 사둔 스크롤도 있었고, 카일 본인이 사용하려 사들인 스크롤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이것이 마법 무구란 말입니까?”
기다란 쇠막대기 형태의 총을 본 멀린이 한 말이었다.
일반적으로 하이 퀄리티의 아티팩트는 결점이나 불순물이 함유되지 않은 최상급의 마나석을 보석처럼 가공해 장신구 형태로 제작했다.
비싼 만큼 사용자 대부분이 지체 높은 고위 귀족이나 왕족들이 주로 이용했던 터라, 품위가 떨어지지 않게 아름답고 화려하게 만든 것이다.
고급 또는 중급 아티팩트의 경우, 사용자 대부분이 왕실이나 가문을 대표하는 기사단이나 와이번 나이트들이었다. 때문에 주로 검이나 스피어 그리고 방어구에 마법을 부여했다. 그리고 가문이나 왕실의 문장을 고급스럽게 장식해 권위를 나타냈다.
이렇게 만들어진 무기와 방어구를 통상적으로 마법 무구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