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88화 (88/404)

88.추적

‘카일이라 했던가? 대단하군! 지금까지 공격을 모두 막아내다니. 놀라운 집중력과 빠른 검술이다. 이래서는 오래 끌 수가 없겠는데….’

사내가 심각한 낯빛으로 카일의 뒤에 멍청하게 서 있는 마법사를 쳐다봤다.

처음 나무를 파괴시킬 때만 해도 높은 실력을 가진 마법사인 같았는데, 막상 상대해본 마법사는 어떠한 대응도 하지 못하는 초짜 마법사처럼 어리바리했다. 만약 제대로 된 마법사였다면 분명 이 싸움은 오래 끌지도 못하고 끝이 났을 것이다.

‘아니. 처음 공격이 실패하고 물러났을 때 이 싸움은 끝이 났겠지.’

마법사들에게 가드가 있는 이유는 주문이 완성하기 전 가해지는 단 한 번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서였다.

지금처럼 수십 번의 공방이 오갈 때까지 마법사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건,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단 뜻이었다. 마법사에게 문제가 있든가, 아니면 경지만 높고 전투를 경험해 보지 못한 실험실 속 마법사든가.

“다른 방법이라…. 아! 방법이 있어요. 방법이!”

잠시 생각에 잠겼던 멀린이 명랑하게 소리쳤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한참 주문을 웅얼거리던 멀린은 눈을 뜨며 단어를 외쳤다.

“라이트!”

멀린의 손 위로 주먹보다 작은 둥근 빛 덩어리가 떠올랐다.

오랫동안 주문을 외운 것에 비해 초라하기 짝이 없는 1서클 마법이었다.

“주문을 오래 외우시던데….”

카일의 음성엔 고작 그게 다냐는 의미가 녹아 있었다. 떨떠름한 표정의 카일이 말을 이었다.

“라이트 마법이군요.”

“그렇죠.”

“라이트 마법이 이 상황을 바꿀 수 있습니까?”

“당연하지요.”

멀린이 자신만만하게 한쪽을 향해 빛 덩어리를 던졌다.

* * *

사내는 마법사가 오랜 시간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다급하게 달려들었다. 주문이 길어진다는 말은 그만큼 고위급 마법을 펼치겠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죽어라!”

깡-!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낸 검이 연속적으로 멀린을 공격했지만, 카일은 철벽과 같이 방어를 했다.

하지만 막상 마법이 완성되자 나타난 건 조그마한 빛 덩어리일 뿐이었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사내는 허탈함에 휘두르던 검도 멈췄다. 그리고 얼이 빠진 건 카일도 마찬가지였다.

‘기회!’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사내는 서둘러 정신을 차리곤 틈을 노려 마법사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 눈앞으로 밝은 빛의 구체가 쇄도했다.

“헉!”

눈부신 빛에 사내는 직감적으로 몸을 틀어 뒤로 물러났다. 그사이 잠시 방심하고 있던 카일이 어느새 다가와 검을 휘둘렀다.

“이런 젠장.”

간신히 카일의 공격을 피했을 땐 또 다른 빛의 덩어리가 자신에게 날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카일이 바짝 따라붙었다. 사내는 다급하게 뒷걸음질 치며 더욱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빛의 구체는 쉴 틈을 주지 않으려는 지 계속해서 날아오고 있었다.

“이거 제법 효과가 있군요.”

사내의 뒤를 쫓던 카일은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빛의 덩어리를 보며 숨을 골랐다. 사실 실제로 멀린이 던진 빛의 덩어리는 단 하나뿐이었다.

하나에 불과했던 빛의 덩어리가 날아가면서 하나에서 두 개로, 두 개에서 네 개로 분화하여 주변을 가득 메운 것이다.

아무리 아티팩트로 몸을 감춘다고 해도, 허공을 빼곡히 채운 빛의 덩어리를 건드리지 않고 카일이나 멀린에게 다가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하하!”

한동안 정신없이 움직이던 사내가 갑자기 멈춰 섰다. 그러자 수십 개의 빛 구체가 사내의 몸에 부딪혀 주변으로 비산했다. 번쩍이는 빛의 파편을 따라 사내의 흐릿한 형태가 드러났다.

그때였다.

부서져 날아오르던 빛의 덩어리가 좌우로 비켜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사내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검은 가죽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이 착 달라붙는 흑색 레더 아머를 입은 날렵한 체구의 사내는 중검을 한 손에 들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검을 나누던 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뻔뻔한 모습이었다.

“이제야 모습을 드러냈군.”

카일이 싸늘하게 사내를 노려봤다.

“그러게 말이야. 설마 이렇게 모습을 드러낼 줄은 생각도 못 했군. 일루젼 아티팩트만 있다면 빠져나가지 못할 곳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저러나 날 어떻게 찾아낸 건지 궁금하군.”

“당신은 누굽니까? 왜 우릴 공격한 겁니까?”

“먼저 공격한 것은 저 마법사인 것 같은데?”

사내가 실소하며 말했다.

멀린이 먼저 숨어 있던 나무를 공격했으니, 엄밀하게 말하면 사내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말장난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당신이 오래전부터 마을을 감시하고 있었던 걸 알고 있습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당신은 누굽니까? 왜 우릴 감시하고 있었던 겁니까?”

“흠, 곤란한 질문을 하는군. 미안하지만 말해줄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 알려주지. 난 누군가를 죽이려고 이곳에 온 것은 아니다. 그저 지켜보는 것이 임무일 뿐이다.”

“임무라…. 결국 누군가의 명을 듣고 이곳에 있다는 말이군요.”

“좋을 대로 생각해라.”

“그럼 더더욱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 알아야겠군요.”

“흥, 그런 일이 가능할까? 아무리 마법사가 있다고 해도 날 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딱히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주변을 둘러봐도 빠져나갈 곳은 보이지 않는데, 설마 하늘로 날아서 도망갈 생각입니까?”

카일이 한껏 빈정거렸으나 사내는 기분이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되려 기묘한 기류를 흘리더니 맞장구치기까지 했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군!”

사내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곳은 나무들이 쓰러지며 하늘을 가리고 있던 무수한 나뭇가지들이 사라져, 별빛이 그대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설마, 당신….”

카일은 그때서야 멀린이 가진 수정구에 떠올랐던 두 개의 점을 떠올렸다. 하나가 카일 본인이라면, 가까운 곳에 있던 다른 불빛의 주인이 누구일지는 뻔한 일이었다.

“꺄아악~.”

요란한 괴음과 함께 누군가 하늘을 베어낸 것처럼 수직으로 긴 선이 그어졌다. 그 사이로 황금빛 동체를 가진 와이번이 공간을 비집고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알겠나? 날 잡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 사실을.”

사내는 비웃듯이 말하곤 그대로 몸을 감췄다.

“이거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멀린은 호기심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와이번을 상대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와이번 밖에 없었다.

드레곤에 의해 만들어진 와이번은 대단한 항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대부분의 와이번들이 착용한 방어구에는 대 마법 방어진이 그려져 있어, 마법으로 와이번을 직접 공격하기는 힘들었다.

때문에 와이번 나이트나 라이더들의 스피어는 와이번을 공격하기보다는 와이번 나이트나 라이더를 직접 공격하는 역할로 사용되었다.

결국 사내를 상대할 방법은 카일 역시 와이번을 불러내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말이었다. 멀린으로서는 카일이 맹약을 맺은 와이번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휴… 이런 건 생각지도 못했는데.”

카일은 깊은 한숨을 쉬며 아공간을 빠져나오고 있는 골드 와이번을 보았다.

‘시카니스.’

‘기다리고 있었다.’

카일의 부름에 시카니스가 곧바로 대답해왔다.

* * *

다시 암흑에 몸을 묻은 사내는 모습을 드러낸 골드 와이번을 향해 곧장 달려갔다.

‘그러고 보니 오랜만이구나.’

사내는 자신의 골드 와이번을 바라보며 그리움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오래전 와이번과 맹약을 맺었지만, 와이번을 타고 하늘을 날아 본 것은 그리 많지가 않았다. 사내는 긴 시간 동안 정찰과 감시, 요인암살이나 정보 교란에 특화된 일을 해왔기에 눈에 띄는 모습을 외부에 노출 시켜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와이번은 하늘 탑에서 감시를 받고 있는 만큼 쉽게 꺼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사내가 와이번의 오너로서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와이번과 맹약을 맺는 순간부터 오랫동안 훈련을 받은 덕이었다.

‘하긴 이곳은 오크 랜드와 인접한 곳이니, 저들만 사라진다면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겠지.’

하늘 위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골드 와이번은 하늘을 한 바퀴 선회하더니, 땅에 닿을 정도로 낮게 저공비행을 했다. 그때 모습을 드러낸 사내가 훌쩍 뛰어올라 와이번의 발을 잡고 등 위로 가볍게 올라섰다.

“에일럿! 저들을 공격….”

사내의 말이 끝나기도 전, 머릿속으로 골드 와이번 다급한 에일럿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빠져나가다니? 기수를 낮춰라! 저들을 죽여야 한다.”

‘새로운 아공간이 열렸다. 강대한 기운을 가진 존재가 아공간을 빠져나오고 있다. 난 상대가 되지 못한다.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가길 권한다.’

골드 와이번 에일럿의 말에 경악한 사내가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어디에도 아공간을 빠져나오는 와이번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에일럿의 말이 틀렸다고 볼 수도 없었다. 와이번의 몬스터에 대한 감지 능력은 놀라울 정도로 광범위했다. 에일럿이 탐지했다면 틀렸을 리가 없었다.

“어디에도 와이번은 보이지 않는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내의 머리카락은 거친 바람에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이건!”

본능적으로 머리를 치켜든 사내는 곧장 와이번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동체를 가진 검은 와이번은 세상에 단 하나뿐이었다.

“블랙 와이번, 시카니스가 왜 이곳에.”

사내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세상에 나온 블랙 와이번은 제국 아이젠 공작가의 블랙 와이번이 유일했다.

그렇다는 건 저 와이번이 공작가에서 사라졌다 알려진 블랙 와이번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공작가에서는 사라진 블랙 와이번을 찾기 위해 제국을 뒤지고 다니고 있었다.

새롭게 와이번과 맹약을 맺은 자가 나타나면 의도적으로 충돌을 일으켜 와이번을 확인하고 다닐 정도였다. 이로 인해 수많은 분란을 만들며 적을 늘려가고 있었지만, 블랙 와이번을 찾기 위한 공작가의 만행은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블랙 와이번의 전략적인 가치가 높기 때문이었다.

“제국을 뒤집어도 찾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구나.”

블랙 와이번이 크로노스 왕국의 구석진 마을에 있는 것도 모르고, 애꿎은 제국을 뒤집어 놓았으니, 와이번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에일럿. 곧장 제국으로 돌아간다. 전속력으로 날아라! 서둘러 이 사실을 공작가에 알려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통신 아티팩트를 통해 신호를 보내는 것이지만, 제국까지 신호를 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알겠다. 꽉 잡아라. 속도를 최대한 높이겠다.’

“부탁한다.”

사내의 말에 골드 와이번이 날개를 활짝 펴 하늘로 날아올랐다.

빠른 바람을 타기 위해 고도를 높이려는 것이다.

그 사이 블랙 와이번 시카니스가 쓰러진 자이언트 블루 우드 위로 가볍게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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