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가신2
“마법사들은 독선적이고 이기적입니다. 특히 왕립 마탑의 마법사들은 모두 정통 귀족들이라 파벌이 나뉘어 있습니다. 종종 피를 볼 정도로 극단적인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런 그들도 뭉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이지요.”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하늘 탑을 복원하는 일은 무척 중요한 일일 텐데요.”
“왕실의 입장에서는 평민인 제가 복원을 하든, 마탑의 귀족 마법사들이 복원하든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저 재건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죠.”
“어떤 일이 일어나든 방관할 거란 말입니까?”
“그럴 겁니다. 마법에 관한 일은 마탑이 알아서 결정하라고 하겠지요. 그리고 마탑에 이 수정구의 존재를 알린다면, 그들은 이걸 빼앗고 절 소리소문없이 묻어 버릴 겁니다. 마탑은 그만한 능력을 가진 곳이죠.”
멀린의 말이 끝난 후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카일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어떻게 제가 마법사를….”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그저 동행자 한 명이 생겼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동행자….”
“그렇습니다. 비록 지금 당장은 가진 것 하나 없어 카일 님의 도움을 받아야겠지만, 결코 짐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는 게 습관이 된 멀린이라 저렇게 말했을 뿐이지, 4서클 마법사를 짐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존재였다.
“저와 함께해주신다면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사실 혹시나 거절하진 않을까 내심 걱정을 했답니다.”
“곧 마을을 떠날 저에게는 마법사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럼 앞으로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멀린이 당장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카일이 허둥지둥 멀린의 팔을 잡았다.
“주군이라니 말도 안 됩니다. 멀린 님 말씀처럼 저 또한 그저 동행자라 생각해 주십시오.”
“그래도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기사들이 주군에게 기사의 맹세를 하듯, 마법사도 평생 섬길 자가 나타나면 스스로의 의지로 마나의 맹세를 합니다. 저 역시 마법사로서 모실 주인을 찾았으니, 제 결심을 표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니 부디 말리지 말아 주십시오.”
멀린의 강력한 의지가 깃든 말에 카일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나 멀린! 평생 단 한 명의 주인을 섬길 것을 심장 속 마나를 걸고 맹세한다. 만약 이 맹세를 어긴다면, 나의 모든 마나는 다시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다.”
멀린의 말이 끝나는 순간 공기를 떠돌던 마나가 요동쳤다. 멀린의 주변으로 몰려든 마나는 푸른빛과 함께 멀린의 심장 속으로 파고들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굳이 맹세까지 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제 의지를 보여 드린 겁니다.”
“제가 평생 마을을 떠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전 이곳 삶도 만족하고 있습니다.”
“저의 눈이 틀리지 않는다면 주군께서는 절대 이곳 안주하고 있을 분이 아니십니다. 분명 세상이 주군을 부를 겁니다. 설사 틀렸다고 해도 어쩌겠습니까? 이미 맹세를 했으니 따를 수밖에요.”
호쾌한 멀린의 목소리에 카일은 볼을 긁적였다.
“그 주군이란 말이라도… 듣기가 상당히 불편합니다. 그냥 카일이라 부르시면 안 됩니까?”
“어찌 주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겠습니까?”
“만약 주군으로서의 처음 내리는 명이라면 어떻습니까?”
“명이라면 따라야지요. 카일 님!”
“휴… 그나마 좀 낫군요.”
카일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카일 님께서 제 부탁을 들어주셨으니 보답으로 제 비밀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굳이 말씀해 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크고 작은 비밀은 누구에게나 있는 일이죠.”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만, 아무래도 카일 님은 알고는 계셔야 할 것 같아서요. 사실 전 4서클이 아닌 5서클의 회색 마법사입니다.”
“헉! 5서클!”
태연한 음성과 달리 멀린이 뱉은 단어의 파급력은 대단했다. 카일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 놀랄 일은 아닙니다. 제 마법은 일반적인 5서클 마법과는 다르니 말입니다.”
“다르다니요?”
“제가 익힌 마법은 앞서 말한 것처럼 회색 마법, 그중에서도 각인 마법이 주를 이루지요.”
“회색 마법? 그런 마법도 있습니까?”
“아마도 세상에 처음 나온 마법일 겁니다.”
“마법사님께서 직접 새로운 마법을 만들었다는 말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회색 마법은 새롭게 창안된 것이라기보다, 기존의 백마법과 흑마법을 조화시켰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겁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마법 학파들이 존재했다. 세세히 따지자면 끝도 없이 나열할 수 있겠으나, 큰 틀로 봤을 때 백마법과 흑마법으로 나뉜다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멀린의 회색 마법은 백마법과 흑마법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동시에, 둘 모두에 소속되는 새로운 마법 체계였다.
“조화의 마법이란 말씀이군요.”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제가 5서클에 올랐다고는 해도, 알고 있는 마법이라고는 대부분이 3서클 마법 수식뿐입니다. 4서클의 각인 마법을 제외한다면 말이지요.”
멀린은 멋쩍다는 기색으로 말을 이어갔다.
“하여 마법의 위력은 평범한 3서클 마법보다 높을지는 모르지만, 5서클 마법사보다는 떨어집니다. 하지만 다른 방법으로 5서클 위력의 마법을 펼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저는 회색 마법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물론 순수 5서클 마법에는 모자라겠지만요.”
“회색 마법이라…. 분명 대단한 위력의 마법일거라 생각합니다.”
“보고 싶으십니까?”
“보여줄 수 있습니까?”
“가신으로서 주군의 명을 어길 수는 없지요.”
카일을 올려다보던 멀린을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마침 적당한 대상도 있으니 보여드려도 좋겠군요.”
멀린이 쉼터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자이언트 우드를 흘깃거리며, 품 안에서 한 장의 스크롤을 꺼냈다.
“에너지 볼.”
파지직-
멀린이 3서클 에너지 볼을 발현하자 스크롤 위로 둥근 물체가 발광하며 떠올랐다. 섬뜩한 소리를 내던 에너지 볼은 순식간에 스크롤을 집어삼켰다.
화아악-
그 순간, 스크롤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기운이 에너지 볼을 잠식했다. 에너지 볼은 점차 회색으로 물들며 몸집을 키웠다.
주먹만 한 크기로 멀린의 머리 위에 떠 있던 에너지 볼은, 점차 어른 머리통만 한 크기의 회색 구체로 변모했다.
“가라.”
멀린의 목소리에 따라 에너지 볼이 자이언트 블루 우드에 작렬했다.
꽈광- 꽝
에너지 볼은 큰 폭발과 함께 수직으로 거대한 균열을 만들어냈다.
힘이 온전히 자이언트 블루 우드에 힘이 집중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멀린이 그만큼 정교하게 마법을 컨트롤 해 나무에 모든 에너지가 집중되게 했기 때문이었다.
꽈지지직-
세로로 양단된 나무가 서서히 넘어가기 시작했다.
“세상에….”
카일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쓰러지는 나무를 멍하니 지켜보았다.
자이언트 블루 우드는 오래된 고목일수록 나무의 밀도가 높아져, 오러를 발현해도 베어내기 쉽지 않은 나무였다.
그런 나무를 단순히 쓰러트린 것이 아니라 수직으로 양단했다는 사실에 카일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회색 마법입니까?”
카일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많이 놀라신 모양입니다. 하지만 제가 펼친 마법은 온전한 5서클의 마법이 아닙니다. 그저 3서클 에너지 볼에, 흑마법으로 각인한 스크롤을 조합한 마법에 불과합니다.”
“흑마법!”
놀란 카일이 묻고 싶은 게 많다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멀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머리를 돌렸다.
“아!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할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멀린이 자신이 쓰러트린 나무를 가리켰다.
“예?”
얼결에 멀린의 가리키는 곳으로 눈을 돌린 카일의 얼굴이 굳어졌다. 쓰러진 나무 사이로 이상한 움직임이 감지되었기 때문이었다.
쓰러진 나뭇가지가 아무런 힘도 가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 허공으로 들어 올려졌다.
“4서클 일루젼 마법 아티팩트를 소지한 감춰진 자라 할 수 있겠군요.”
“감춰진 자?”
“마을에 도착했을 때 나무에서 희미한 마법의 향을 느꼈습니다. 제대로 된 5서클 마법사가 펼친 마법이었다면 감지하지 못했을 테지만, 다행히 아티팩트를 이용해 몸을 감춘 것이라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십수일 전 아버지께서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신 적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때 놓친 자인 것 같습니다.”
그 일로 인해 카일이 돌아온 이후에도 자경단원들에게 비상이 걸린 일이 있었다.
“으음. 상급 엑스퍼트라면 충분히 마법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을….”
“위험!”
깡 까앙
멀린의 말이 끝나기도 전,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단검 한 자루가 튀어나와 멀린에게 날아들었다.
단검을 먼저 발견한 것은 멀린이지만, 정작 공격을 막아낸 사람은 뒤늦게 단검을 알아챈 카일이었다. 카일은 발검술을 이용해 날아오는 단검을 빠르게 튕겨낸 뒤, 몸을 회전시켜 멀린에게 달려드는 ‘감춰진 자’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러나 카일이 반격을 하려는 순간 이미 놈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시카니스!’
‘마법의 기운으로 몸을 감추고 있어, 근접하지 않는 이상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이런….’
마법 생물인 와이번은 마법에 대한 강력한 항마력을 가지고 있지만, 반대로 마법을 찾아내는 능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오, 아티팩트를 사용하는 데 아주 능하군요. 아마도 상당한 훈련을 받은 자인 것 같습니다.”
멀린이 눈을 끔뻑거리며 태평하게 카일을 보며 말했다.
“방금 죽을 뻔한 것은 아십니까?”
“다행히 카일 님께서 막아주셔서 멀쩡하잖습니까.”
위기라는 걸 모르는 사람처럼 구는 멀린의 모습에, 카일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위험!’
그때 위급한 경고음이 카일의 머릿속으로 울렸다.
“헉~.”
깡- 까앙 깡
카일은 본능적으로 움직여 멀린의 측면에서 날아드는 공격을 연달아 막아냈다. ‘감춰진 자’는 집요하게 멀린을 노리면서 공격과 후퇴를 반복하고 있었다.
“지금은 이 자를 먼저 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 그렇죠! 어디 보자… 좌측입니다.”
채앵 챙-
“이번엔 우측… 아니, 다시 좌측입니다.”
까아앙-
멀린은 쉴 새 없이 단검을 던지는 ‘감춰진 자’에 대해 알려주었지만, 변칙적으로 움직이는 적의 모습을 말로 전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멀린의 외침이 상대의 공격보다 한 박자씩 느려 손발이 엉키고 꼬이게 했다.
“말로 하지 말고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이렇게 계속 막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원래 방어를 하는 자보다 공격하는 자가 더 많은 체력을 소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로 멀린을 보호해야 했고, 언제 어디서 단검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 카일의 체력이 더 빠르게 고갈되고 있었다.
그러나 난감하기는 공격을 하는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느닷없는 마법사의 공격에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숨어 있던 나무가 공격을 당한 것이다.
더군다나 나무가 수직으로 두 조각이 나, 기존에 쓰러져 있던 나무에 더해 뒤쪽과 좌측, 우측이 막히게 되면서 갇혀버리게 되었다.
앞쪽은 마법사와 더불어 수준 높은 경지의 검술을 펼치는 덩치 큰 사내가 막고 있으니, 결국 빠져나갈 방법은 저들을 뚫고 나가는 방법뿐이었다.
상대 중 하나인 마법사는 자이언트 블루 우드를 단번에 파괴할 정도로 대단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거리를 벌리려는 때, 앞서와 같이 파괴적인 마법이 날아온다면 피할 방법이 없었다.
때문에 사내로서는 일단 마법사만이라도 서둘러 죽이고 이곳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나마 일루젼 마법이 인첸트 된 아티팩트가 있었기 때문에 시도해볼 만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카일이 시간이 흐를수록 공격을 막아내는 것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