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가신1
“이게 뭔지 아십니까?”
“마법사들이 종종 수정구라는 것을 사용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멀린 님이 들고 계시는 게 바로 그 수정구란 것이겠지요. 하지만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건 지난 10년간의 모든 노력이 집약된 일종의 아티팩트라 할 수 있지요.”
일견 엄숙하게까지 들리는 멀린의 음성에 카일이 수정구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십 년을 노력해 만든 아티팩트라면 분명 대단한 마법 무구란 생각이 든 것이다.
“음… 그렇다면 아마도 대단한 물건이겠군요.”
“궁금하시다면 보여 드릴 수도 있는데, 한번 보겠습니까?”
“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애당초 카일 님께 보여 드리려고 꺼낸 물건인걸요.”
말린이 흔쾌히 수정구에 마나를 집중시켰다.
“디텍터(detector)”
멀린의 짧은 주문과 함께 수정구 안에서 순백의 빛이 나타나 반짝이기 시작했다. 빛의 점멸에 따라 작은 진동이 일어났다.
웅- 우웅-
“흠…?”
카일은 무언가 달라지기라도 한 걸까 싶어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번쩍이는 수정구는 그저 떨림을 반복할 뿐이었다.
새벽에 보았던 라이트 마법과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하하! 이 아티팩트의 진가는 바로 수정구 안에 있습니다.”
카일이 노골적으로 실망한 기색을 내비치자 멀린은 웃음을 터트리며 수정구를 내밀었다.
카일은 머리를 길게 내뺀 채 수정구 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수정구 안에서 빛의 점멸과 함께 두 개의 점이 선명하게 나타난 것이 보였다.
“이건….”
“하늘 탑을 축소해 놓은 겁니다.”
“하늘 탑!”
카일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블랙 와이번 시카니스와 맹약을 맺은 뒤, 카일은 힐튼 남작으로부터 와이번 나이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카일은 이곳에 전생의 레이더와 같은 역할을 하는 하늘 탑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늘 탑은 재현할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모르는 일이죠. 누군가 저처럼 만들어냈지만 감추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럼 이 수정구 안에 찍혀 있는 불빛들은….”
“아! 이것 말입니까? 이 점들은 와이번들의 위치를 나타내 줍니다.”
“와이번!?”
흠칫한 카일은 마른침을 삼키고 질문을 던졌다.
“수정구가 아공간석 속 와이번도 감지할 수 있습니까?”
“물론 가능은 합니다. 단, 지금처럼 아주 가까이 근접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멀린의 말에 카일의 얼굴빛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럼 수정구에 나와 있는 불빛들은….”
“수정구 중심에 가까울수록 와이번이 가깝게 있다는 말입니다. 아! 알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마법사 중 와이번과 맹약을 맺은 사람은 없답니다.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도 말이지요. 저 역시 마찬가지랍니다.”
멀린이 빙그레 웃으며 다 알고 있단 듯이 수정구와 카일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그럼 이 불빛이 가리키는 사람은 저란 말이군요.”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체념한 표정을 지은 카일이 말했다.
“제가 아니니 아마도 그렇겠지요. 와이번이 아공간석에 감춰져 있더라도, 아공간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의 파장은 피할 수가 없죠.”
“허….”
멀린의 말에 카일은 허망하다는 양 숨을 쉬었다. 그렇게 감추고 싶었던 와이번의 정체가 한순간에 드러나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럼 수정구는 아공간석 속 와이번을 얼마나 멀리까지 감지할 수 있습니까?”
“그리 넓지 않습니다. 반경으로 따진다면 대략 10m 정도의 거리가 될 겁니다.”
“그렇군요…. 그럼 이제 어쩌실 생각입니까? 제게 와이번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말입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습니다.”
“예?”
카일은 어리둥절히 멀린을 쳐다보았다.
“그럼 왜 제게 이런 사실을 밝히신 겁니까?”
“서로의 비밀을 한 가지씩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와이번과 맹약을 맺었단 사실과 하늘 탑을 만들 수 있다는, 이 두 가지 사실 말입니다. 이렇게 하면 서로 공유한 비밀의 크기만큼 믿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독특한 논리를 듣고 있던 카일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서로의 비밀을 나누고 싶었다는 건, 일단 멀린 마법사가 누구의 사주를 받고 온 것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결국 제게 원하시는 것이 있다는 말이군요.”
“원한다기보다는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부탁… 입니까?”
“그렇습니다. 부탁입니다. 이걸 들어주신다면 제가 가진 또 다른 비밀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으음. 일단 들어보겠습니다.
“전 오랫동안 세상에 나가 본 적이 없습니다. 어린 나이에 왕립 마탑에 들어와 수십 년을 살았습니다. 운이 좋았는지, 전 동료들이 마탑을 떠나갈 때도 마탑에 남아 새로운 마법을 배웠습니다.”
멀린은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왕립 마탑에는 제법 많은 평민 아이들이 있지만 모두 살아남아 마탑을 떠나는 것은 아니었다.
절반 이상의 아이들이 마법사의 실험에 의해 희생을 당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백마법이라고 해도 흑마법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흑마법이 더 잔혹하고 비상식적인 방법을 사용하거나, 마계의 마왕과 계약을 통해 힘을 끌어 올릴 뿐이지요. 백마법은 조금 덜 잔인할 뿐, 뭔가를 제물로 삼는다는 건 같습니다. 안정적인 마법 수식 하나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평민 아이들이 마법실험에 희생되기도 하니까요.”
“백마법이 평민 아이들의 희생을 통해 만들어지는 거였다니,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사실상 왕립 마탑에서는 마법을 가르쳐 준다는 명목하에 어린애들을 불러 모아, 인체 실험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이었다. 카일은 인상을 찌푸렸다.
“하하! 잠시 오해를 하셨군요. 전 마탑이 잘못되었다 비난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마탑은 제게 마법을 가르쳐 주고, 지금까지 절 보호해준 고마운 곳입니다.”
“예? 죽을지도 모를 마법실험을 한 마탑이 말입니까?”
“마탑이 아니었다면 전 굶어 죽었을 겁니다. 카일 님은 어떤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거리에서 굶어 죽겠습니까, 아니면 위험하기는 하지만 마법을 배울 수 있는 마탑으로 동행을 하겠습니까?”
“그야… 당연히….”
카일은 쉽사리 대꾸하지 못했다. 멀린은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양 말을 이어나갔다.
“전 마탑에 들어간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곳은 풍성한 음식과 따뜻한 잠자리는 물론, 수많은 위험으로부터 절 안전하게 보호해주었으니까요.”
카일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마 카일이라도 같은 상황이라면 마탑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마탑에서는 적어도 마법사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탑은 아이들을 데려갈 때, 선택권을 줍니다. 반드시 스스로의 의지로 결정을 하게 하지요. 만약 아이가 따라가길 거절한다면 절대 마탑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혹 그렇게 하는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
“마법사는 강력한 의지를 이용해 마나를 움직여 마법을 발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탑으로 향하는 문제 하나까지 스스로 결정하고, 그 책임을 온전히 져야 하는 곳 또한 바로 마탑입니다. 그래서인지 마법사들 중에는 괴팍하고 독선적이며 고집이 센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군요.”
언젠가 보일도 마법사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마법사는 체력이 약하지만, 고위 마법사일수록 의지력이 강해 고문이나 회유가 통하지 않는다고 했다.
“동료들이 떠난 후에 전 마탑의 지원을 받아 4서클에 올랐고, 곧장 남부 하늘 탑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평생 남부 하늘 탑을 관리하며 지낼 거란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평생이라니. 그건 감옥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사실 전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평생을 갇혀 지내야 하는 삶이 말입니까?”
“아! 아주 갇혀 지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끔 상단에서도 찾아오고, 가까운 마을에 들러 필요한 물품을 사 오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어찌 됐든 십여 년 동안 하늘 탑에 혼자 있었다는 거 아닙니까.”
“완전히 부정할 순 없겠군요. 뭐… 혼자이기는 했지만 하늘 탑에 새겨진 마법진도 연구할 수 있는 곳이니, 그리 나쁜 곳은 아니었습니다. 가끔… 아주 가끔은 혼자 있어 외롭기도 했지만, 아무 걱정 없이 생활할 수 있는 곳이었죠. 하지만 몇 달 전 하늘 탑 폐쇄 결정이 있습니다.”
멀린은 그때의 기억과 감정이 떠올랐는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하늘 탑이 폐쇄되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으니 좋은 것 아닙니까?”
“단순히 보면 그렇긴 합니다. 헌데 말입니다. 전 세상을 알지 못합니다. 젊은 시절 가끔 심부름으로 외유를 한 적이 있지만 아주 잠시뿐, 대부분은 마탑과 하늘 탑에서 지냈습니다. 그런 제가 가진 것 하나 없이 세상으로 던져졌습니다. 이런 제가 과연 세상에 쉽게 적응할 수 있을까요?”
“4서클 마법사라면 어딜 가든 환영받을 존재잖습니까.”
“…여느 3서클 마법사들처럼 어딘가 골방에 처박혀 아티팩트나 만드는 삶이겠죠. 하지만 그런 삶은 제가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왕 세상으로 나왔다면 그동안 갇혀 지내던 지난 인생을 떨쳐버리고, 이번에는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해 보고 싶어졌습니다.”
“허면 왜 이곳으로 오신 겁니까? 이곳은 넓은 세상과는 거리가 먼, 고립된 벽지 마을일 뿐입니다.”
“하늘 탑을 떠나기 얼마 전, 이곳 오크 랜드 접경지역에서 강한 신호를 잡아냈습니다. 물론 곧 하늘 탑의 탐지 범위 밖으로 사라졌지만 말입니다. 수십 년 동안 허가받지 않고, 보고되지 않은 와이번이 신호에 잡힌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것도 하늘 탑이 폐쇄되기 며칠 전 말입니다.”
멀린은 손에 쥐고 있던 수정구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제가 가야 할 곳이 바로 저곳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럼 절 찾아오신 이유가…?”
“카일, 당신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멀린의 갑작스러운 말에 카일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되물었다.
“지금 그 말씀은….”
“귀족 가문으로 따지면 가신이 되겠다는 말입니다. 당신과 함께 세상을 돌아보고 싶습니다.”
“제가 와이번과 맹약을 맺었다고는 하지만 고작 17살입니다. 가신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제가 어떻게 마법사님을….”
카일이 황급히 손을 저었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중급 엑스퍼트에 오를 정도의 실력자이고, 와이번과 맹약을 맺기까지 했습니다. 전 하늘 탑의 마법진을 연구해 이 수정구를 만들었지만 와이번을 탐색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앞으로 보완하고 연구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그런 만큼 반드시 주변에 와이번이 있어야 하죠.”
“그럼 차라리 수정구에 대한 이야기를 마탑에 알리는 건….”
하늘 탑은 왕국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왕실의 입장에서는 하늘을 통해 기습을 감행할지도 모르는 적국의 와이번 나이트를 사전에 막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바로 하늘 탑이었다. 그런 만큼 하늘 탑을 복원했다는 사실은 엄청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