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사라진 의지
“저… 저건!”
사내는 보일의 집을 바라볼 수 있는 지붕 위에 올라 밤을 지새웠다.
보일의 집이 워낙 외진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정확하게 누가,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확인할 순 없었으나 가까이 접근하는 건 불가능했다.
상급 엑스퍼트로 의심이 가는 보일이 있는 이상, 섣불리 거리를 좁혔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불 보듯 뻔했다. 사내는 자신이 지난번처럼 또 한 번 운이 좋게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물론 그러한 예상은 정확했다.
집안에는 보일보다 더 높은 경지의 힐튼 남작이 있었다.
지금은 두 다리가 부러졌다고는 해도, 기운을 감지하는 것은 이제 상급 엑스퍼트에 막 오른 보일보다 더 넓은 범위였다.
만약 사내가 집 주변으로 접근을 했다면, 보일이 사내의 접근을 감지하기 이전에 힐튼 남작이 그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때문에 사내는 보일의 집 근처를 어슬렁거리지 않고, 보일의 집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지붕 위에 숨어 밤을 보낸 것이다.
그리고 현재, 사내는 새벽 무렵 집을 벗어난 두 사람의 뒤를 급히 뒤쫓고 있었다.
“마법사.”
밝은 구체가 낡은 로브를 입고 있는 사내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저건 분명 마법사가 발현한 라이트 마법이었다. 일반적인 라이트 마법보다 작기는 하지만, 분명 하나의 구체가 아닌 두 개의 구체가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 말인즉슨 더블 캐스팅!”
비록 1서클 마법이라고 해도 더블 캐스팅은 아무나 펼칠 수 있는 마법이 아니었다. 최소 4서클 이상의 고위 마법사만이 펼칠 수 있었다.
그러나 더블 캐스팅의 핵심은 펼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오랫동안 유지를 할 수 있느냐에 있었다.
더블 캐스팅으로 펼친 마법을 아무런 부담 없이 유지할 수 있다는 건 상대가 최소한 4서클 이상, 어쩌면 5서클 이상의 고위 마법사일 수 있다는 말이었다.
“상급 엑스퍼트에 다수의 엑스퍼트들, 그리고 4~5서클 이상으로 추정되는 마법사까지! 도대체 이곳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지?”
사내가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임무는 마을을 살펴, 특이 사항을 보고하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보고된 것은 벽지인 샤론 마을에 상급 엑스퍼트 기사로 추정되는 고위급 기사와 다수의 엑스퍼트 기사들이 상주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위험한데, 여기에 마법사가 끼어든다면 위험은 배로 늘어났다.
고위 마법사와 상급 엑스퍼트의 조합은 대단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사라진 전투 마법사들의 자리를 아티팩트가 메우고 있다고 해도, 왕국의 전략 병기라 할 수 있는 상급 엑스퍼트와 최근 거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고위 마법사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상당히 심각한 일이었다.
“추적한다.”
결단을 내린 사내는 지붕 위에서 뛰어내려 카일과 멀린의 뒤를 쫓았다.
* * *
“좋군!”
거대한 자이언트 블루 우드의 숲속을 걸어가던 멀린이 낮은 탄성을 터트렸다.
남부의 하늘 탑 역시 오지의 높은 산맥 위에 있지만 이렇게 거대한 나무들이 살아 숨 쉬는 숲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큰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지만, 작은 잡목이나 식물들이 앞을 가리지 않았고, 낮은 습도 덕에 숲의 기운을 더 깊이 느낄 수 있어 상쾌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카일의 안면은 한껏 찌푸려져 있었다.
카일과 멀린은 이른 새벽, 날이 밝기 전 목책을 넘어 숲길을 걸었다. 최대한 신속하게 숲을 가로질러 통곡의 협곡으로 향하기 위함이었다.
카일이 멀린을 통곡의 협곡으로 데려가는 이유는 순전히 아일론 상단 때문이었다.
아일론 상단이 몬스터, 특히 오크 부산물 수급을 위한 중요한 거래처로 여긴다면, 샤론 마을 역시 아일론 상단을 오크 부산물을 판매할 수 있는 중대한 거래처로 생각했다.
그만큼 서로 의지하고 있는 부분이 막대해, 보일은 아일론 상단이 영입하려는 멀린의 부탁을 쉽게 거절하지 못한 것이다.
또한 상대가 4서클의 마법사인 이상, 중급 엑스퍼트인 카일이 함께한다면 몬스터의 공격은 어렵지 않게 막아 낼 거라 생각한 면도 있었다.
그러나 통곡의 협곡으로 향하는 카일의 발걸음은 계속해서 느려지고 있었다.
카일과 멀린 단 두 사람이 출발한 만큼 지난번 이니엘 영애와 움직일 때처럼 짐이 많은 것도, 그렇다고 멀린이 마법사라고 해서 체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속력을 내지 못하는 건, 순전히 멀린이 주변의 풍경을 감상하며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카일은 마치 정원을 거닐듯 여유롭게 구는 멀린의 모습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고위 마법사인 멀린의 행동을 탓하진 못했다.
어디까지나 카일의 역할은 멀린을 통곡의 협곡까지 데려갔다가 다시 데려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휴. 이렇게 천천히 가시면, 요새에 도착하지 못하고 중간 쉼터에서 밤을 보내야 합니다.”
그러나 참다못한 카일은 한동안 멈춰 서서 자이언트 블루 우드를 올려다보고 있는 멀린에게 말했다.
“흠, 그 쉼터라는 곳에서 밤을 보내면 안 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야영을 해야 합니다. 아무래도 외부에서 자야 하는 만큼 잠자리가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오크들의 습격도 걱정해야 합니다.”
“그래도 중간 쉼터라면 어느 정도 방어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만.”
“쓰러진 자이언트 우드 나무를 후면에 두고 만들어진 쉼터라, 정면만 방어하면 웬만한 공격을 막는 건 가능합니다. 하지만 오크들이 대규모로 무리 지어 침입할 경우 저 혼자 막아내기는 힘든 곳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오크들이 몰려든다면 저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겁니다. 공격 마법은 다소 떨어질지는 모르지만, 방어에는 자신이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다니…. 휴~ 알겠습니다.”
카일이 포기한 것처럼 긴 한숨을 쉬었다. 멀린이 저렇게까지 말을 한다면 카일로서도 더 재촉하기 힘들었다.
중간 쉼터에서 야영을 하는 게 확정되자, 카일은 협곡으로 서둘러 가겠다는 생각을 접고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멀린이 입꼬리를 올리며 카일의 뒤를 따랐다.
“바로 이곳이 자이언트 블루우드가 쓰러지면서 생긴 쉼터입니다.”
“오, 대단하군요.”
“그리 놀랄 것은 없습니다. 이런 곳은 제법 많이 있습니다.”
“이런 커다란 나무가 쓰러지다니….”
“아무리 거대한 나무도 수명이 다하면 죽기 마련이지요.”
“으음… 그렇군요.”
잠시 멀린이 쓰러진 나무를 쓸어보고 있는 동안 카일은 밤을 보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카일은 솜씨 있게 불을 피우고 모닥불 주변에 가져온 가죽을 깔았다.
그리고 가죽 가방 안에서 작은 솥을 꺼내 모닥불 위에 올렸다.
“익숙해 보이네요.”
“예?”
“야영에 아주 능숙해 보입니다.”
“매번 하던 일이니까요. 요새가 만들어졌지만, 오크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통곡의 협곡과 오크 랜드를 꾸준히 살펴 미리미리 대비해야 합니다.”
“힘들겠군요.”
“힘들어도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도 다행히 요새가 만들어지면서 순찰 범위가 상당히 줄어들었지요.”
“그렇습니까?”
가벼운 대화를 나누던 멀린은 불 위에 놓인 솥을 응시했다.
쉼터 한쪽에 만들어져 있는 작은 샘에서 떠온 물이 어느새 보글보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멀린도 오랫동안 혼자 하늘 탑에 살아온 만큼 음식을 만드는 것에 능했지만, 이렇게 야외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일론 상단과 이동할 때에도 일꾼들이 음식을 가져와 주었던 터라, 이렇게 직접 음식을 조리하는 모습이 신기하고 새로웠다.
물이 끓어오르자 카일은 가죽 주머니에 든 곡물가루를 물속에 털어 넣고, 반쯤 숙성시켜 훈연한 고기와 피를 섞은 다진 잡육을 내장에 넣어 만든 소시지를 모닥불 근처의 달궈진 돌판 위에 올렸다.
치이익-
지글지글 고기 익어가는 소리와 고소한 냄새가 주변으로 번져갔다.
“다 익었습니다. 드셔도 됩니다.”
카일이 가방 안에서 꺼낸 그릇에 스프를 가득 담은 후 잘 익은 고기와 소시지를 건넸다.
“맛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드셔 보십시오.”
“잘 먹겠습니다.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럽습니다.”
멀린이 눈을 반짝이면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굉장합니다. 야영 중에 이런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입을 우물거리던 멀린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감탄했다.
“입맛에 맞다니 다행입니다.”
“하늘 탑에 혼자 살던 그 긴 시간 동안 직접 음식을 해 먹었는데, 이렇게 감칠맛 나는 고기와 스프는 처음입니다.”
“제가 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저 고기를 굽고 스프를 끓였을 뿐인걸요.”
카일은 별일 아니라는 듯 겸양을 떨었으나, 단순히 고기만 굽고 끓인다고 이런 맛과 향이 날 수는 없었다. 야생짐승의 고기는 가축에 비해 잡냄새가 강하고 질겨, 그냥 구우면 먹기 곤욕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카일은 잡아 온 고기를 오랜 시간 동굴 안에서 저온 숙성을 한 후 훈연을 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노력을 해 잡냄새를 제거하고 고기를 연하게 만든 것이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이 소시지만 해도 독특한 향이 났습니다. 모르긴 해도 자신만의 비법이 있겠지요.”
카일은 대꾸하지 않고 그저 마지막 남은 고기를 입안에 밀어 넣었다.
멀린 역시 딱히 대답을 들으려 말한 것은 아니었기에, 카일을 따라 묵묵히 남은 음식을 먹었다.
“지난번, 왜 오크 랜드로 가려는지 물은 적이 있었지요.”
식사를 마치고 식기를 정리한 후 카일은 새로 물을 끓여 차를 우렸다. 그리곤 차를 담은 찻잔을 멀린에게 내밀었다. 찻잔을 받은 멀린은 문득 말문을 열었다.
“아… 네. 그런 적이 있습니다만….”
“아직도 그 이유가 궁금하십니까?”
“개인적인 일이라고 하셨잖습니까. 굳이 이야기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관심 없는 척 말은 했지만, 사실 카일은 아직도 멀린이 왜 오크 랜드로 가려 하는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멀린의 모습 어디에도 오크 랜드에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전 오크 랜드에 갈 생각이 없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짐작하고 있었습니까?”
“오크 랜드에 가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의지?”
“그렇습니다. 오크 랜드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곳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아무리 높은 경지를 이룬 사람이라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합니다. 단순히 어떤 곳인지 궁금하다고 향할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니까요.”
“흠… 그럼 왜 날 통곡의 협곡까지 안내하고 있는 것입니까? 저에게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면 굳이 안내할 필요가 없을 텐데요. 단순히 아일론 상단의 부탁 때문입니까?”
멀린의 물음에 카일이 머리를 저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오크 랜드는 위험한 곳입니다. 의지가 없는 사람은 갈 수도 없지만, 설령 가려 해도 안내하지 않습니다. 분명 멀린 마법사님께서는 오크 랜드로 가려는 의지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목책을 넘어 숲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멀린 님의 의지가 사라졌습니다.”
“그런가요? 의지가 사라졌다라… 그래,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멀린이 수긍했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품속에서 작은 수정구 하나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