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84화 (84/404)

84.수긍하는 자

“이건?”

“이건 파는 물건이 아닙니다.”

카일이 당황한 얼굴로 토일의 물음을 끊어냈다. 인부 두 명이 안쪽 깊숙한 곳에 감춰 놓은 물건을 찾아서 나온 것이다.

카일은 서둘러 두 사람이 들고 있는 물건을 거둬 안쪽으로 사라졌다.

‘어디에 쓰려고 만든 거지? 분명 커다란 알같이 생겼던데 말이야.’

허둥거리는 카일의 모습에 토일은 의아함을 숨기지 못했다.

카일은 물건을 창고 깊숙한 곳에 안전하게 가져다 놓고는 다시 가죽으로 감쌌다.

“구석에 둔 것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아무래도 더 꼼꼼히 감춰 놓아야겠어….”

카일이 창고 밖으로 나왔을 때에는 수레 위로 옹기와 도자기가 가득 실려 있었다.

“여기까지 도자기는 21점에 옹기는 94점입니다.”

막 수레에 마지막 옹기를 실은 상단일꾼이 말했다.

“그럼 도자기 21점에 한 점당 2골드씩 42골드, 옹기는 1점당 50실버씩 470실버. 그렇다면 47골드이니 둘을 합해 89골드. 여기에 공작가로 가져갈 위스키 값까지 합쳐서 100골드로 맞춰주겠네.”

“너무 많이 주시는 것 아닙니까?”

“그런 말 말아라. 원래는 더 줘야 하는데 미안할 뿐이다.”

“이 정도면 충분히 많습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카일과 토일은 집안으로 들어섰다. 집에서는 마티슨이 멀린 그리고 보일이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왔느냐?”

“남작님께서는 아직 들어오지 않으셨습니까?”

“여전히 마당에 계신다.”

“혹시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습니까?”

“음… 하늘 탑 이야기 말이냐?”

보일 역시 남작과 짧게나마 이야기를 마친 것 같았다.

“어떻게 하시기로 하셨습니까?”

“그걸 어찌 내게 묻는 것이냐?”

“예에?”

“그렇지 않느냐? 어차피 난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 자경단을 내버려 두고 내가 움직일 순 없으니 말이다.”

“그건… 그렇죠.”

“그러니 내가 관여할 것이 뭐 있겠느냐. 고작해야 ‘카일! 네가 트라발트 공작령에 다녀오너라!’라고 할 말밖에는 없구나.”

“그것도 그렇긴 하네요.”

카일이 순순히 대답하자 의아했는지 보일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너무 쉽게 수긍하는 것이 아니냐?”

“뭐, 저도 저밖에 갈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냐?”

“그런 거죠. 자경단 중에 갈 사람이 없잖아요. 한가한 사람은 저밖에 없으니, 제가 가야겠죠.”

“그럼 걱정할 것 없구나.”

대화는 간단히 끝났다. 보일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술을 마셨고, 카일은 덤덤하게 뒷마당으로 향했다.

오히려 둘의 대화를 멍하니 듣고 있던 마티슨과 토일이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카일과 보일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멀린은 조용히 흥미로움이 맺힌 미소를 지었다.

“무슨 대화가 그런가? 트라발트 공작가라면 왕국의 최고 권력자 중 한 명이네. 자네는 걱정도 되지 않나?”

“어쩌겠습니까? 어차피 가야 한다면 빨리 가는 것 좋습니다. 더 늦어져 좋을 게 없죠.”

“허, 이 사람 너무 태평하군.”

알 수 없는 부자 관계라 생각하며 마티슨은 술을 삼켰다. 그러나 보일도 마음 편히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다. 제국이 오크 랜드를 우회하여 남부를 공격한다면 다핸 남작령, 그중에서도 보일이 이끄는 자경단이 가장 먼저 피해를 입을 게 분명했다. 때문에 시간을 끌기보다는 빠른 결정을 내린 것이다.

또한 보일은 이번에 카일을 세상으로 내보낼 생각이었다.

보일은 젊은 나이에 샤론 마을에 정착했으나 보일의 부친, 그러니까 카일의 할아버지는 성인이 되기 전부터 용병이 되어 수많은 실전을 거듭해 지금의 검술을 만들어냈다. 보일 역시 카일보다 한살이 많은 18세에 처음 용병이 되어 십수 년을 활동해 왔었다.

비록 상급 검술이 완성된 것은 자신의 대이긴 하지만, 검의 길에 들어선 카일을 위해서라도 이번 기회에 실전과 함께 세상을 경험하게 해주는 게 좋다 생각한 것이다.

“걱정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전 카일이 잘 해결하고 무사히 돌아 올거라 생각합니다.”

평온히 말한 보일은 그날 밤 오랜만에 창밖으로 전서구를 날렸다.

* * *

쉬익-

카일이 뒷마당으로 나왔을 때에도 시안느는 여전히 수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일은 마쳤느냐?”

“네.”

“언제 출발할 생각이냐?”

“상단이 출발할 때 같이 떠날 생각입니다.”

“그럼 시안느와 저 아이도 같이 데려가거라. 이니엘 영애도 이제는 백작가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저와 함께 말입니까?”

“아무리 시안느가 기사라고는 해도 저 둘이서만 백작령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지 않겠느냐. 트라발트 공작령은 중부에서도 동쪽으로 치우쳐 있으니, 공작령에 갔다가 동부의 그린넨 백작가로 향하면 될 것이다.”

“흠… 알겠습니다. 그럼 남작님께서는….”

“이 몸으로 어딜 가겠느냐. 난 당분간 이곳에 있을 생각이다. 이미 후작 각하께도 한동안 이곳에 있겠다는 서한을 보냈으니, 걱정할 것 없다.”

“혼자 계시려면 힘드시지 않겠습니까? 아버지께서는 자경단에 머무실 때가 많습니다. 제가 떠나면 외곽순찰도 나가셔야 하고.”

“보일 대장이 자주 올 것이라 했으니 괜찮다.”

“그나마 다행이군요.”

“혹 시간이 될 때 북부 힐튼 영지를 들여다 봐주면 고맙겠구나. 그렇다고 부담을 줄 생각은 없다.”

덤덤함을 가장한 남작의 음성에선, 오랜 시간 영지를 비워두어 생겨난 불안함이 미미하게 묻어나오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고맙구나.”

살짝 올라갔던 남작의 입꼬리가 순식간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럼 전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무래도 떠나기 전 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영애와 시안느 경에게는 남작님께서 이야기해 주십시오.”

카일이 마당 한쪽에 놓여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잠이 든 영애를 보며 말했다.

“알겠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카일은 남작에게 꾸벅 인사하곤 대장간으로 향했다.

* * *

“일찍 일어나셨네요.”

이른 새벽녘. 간단하게 수련을 마친 카일이 밖으로 나와 있는 멀린을 발견하곤 말을 걸었다.

“항상 일어나던 시간이라 자연스럽게 눈이 떠지더군요. 헌데 카일 군은 저보다 훨씬 빨리 일어난 것 같네요.”

“저도 이 시간이면 일어나 수련을 합니다. 지금은 마을 사람들이 적어 마을을 돌기 좋거든요.”

“열심히 군요. 느껴지는 마나의 양을 보니 이미 상당한 경지에 든 것 같습니다만.”

멀린의 말에 당혹한 카일이 물었다.

“마법사는 체내의 마나량까지 알 수 있는 것입니까?”

“일반적인 마법사는 적어도 6서클 이상이 되어야 가능합니다. 하지만 전 체질적으로 일반적인 마법사와는 차이가 있어, 조금 더 쉽게 마나의 향기를 느낄 수 있지요.”

“마나에도 향기가 있다니 신기하네요.”

“하하! 실제로 마나에 향기가 난다는 것은 아닙니다. 뭐랄까, 마나를 몸 안에 품은 사람 주변으로 모여든 마나가 향기처럼 다시 퍼져 나가는 것을 느낀다고나 할까요? 그런 걸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뿐이죠.”

“신체 내부의 마나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모여든 마나를 느낀다는 말이군요.”

“정확합니다. 마나를 많이 품은 사람은 체내의 마나가 외부와 반응을 일으킵니다. 그러면서 더 많은 마나가 몸 주변으로 몰려들게 되지요.”

“마법사라 그런지 마나의 움직에 대해 자세히 아시는군요?”

“하하 당연합니다. 마법사는 이렇게 응집된 마나를 이용해 마법을 발현하니, 모를 수가 없지요. 고서클에 오를수록 더 많은 마나가 몰려들어 고차원적인 마법을 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럼 마나를 많이 받아들일수록 더 수준 높은 마법을 펼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이론적으로는 그렇습니다. 대신 서클이 버텨줘야 합니다. 최소한 4서클은 되어야 서클이 외부에서 들어온 마나를 버틸 수 있다고 하지요.”

“그럼 4서클 이하의 마법사는 인위적인 마나를 견디지 못한다는 말인가요.”

“명확히 하자면 견디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서클이 마나를 받아들이지 못해 허공으로 흩어내 버립니다.”

카일이 관심을 보이자, 멀린은 저도 모르게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처럼 자세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4서클을 고위 마법사의 범주에 포함을 시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일단 인위적으로 흡수한 마나로 인해 신체의 마나가 일시적으로 늘어나며, 몸 주변의 마나도 덩달아 증가합니다. 여기에 자신이 보유한 마나를 동화시켜 고차원의 마법을 발현시키지요.”

“하지만 마법사의 마나와 기사나 용병이 사용하는 마나는 다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마법사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까?”

“오러라 불리는 것 역시 근본은 마나입니다. 때문에 본격적으로 몸 안에 오러를 가두는 소드 유저만 되어도 몸 주변으로 마나가 몰려든답니다. 경지가 높을수록 더 많은 마나가 모여들죠.”

“하지만 기사나 용병들은 이런 마나를 전투에 사용하지 않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만.”

“대신 회복에 이용하죠. 오러를 급속도로 소진한 기사나 용병들 중 경지가 높은 자가 더 빨리, 그리고 더 많은 마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미 주변에 조밀한 마나가 모여 있으니, 몸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쉽게 이루는 것이죠.”

차근차근 이어지는 멀린의 설명에 카일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멀린의 말대로 경지가 올라갈수록 소진한 오러를 신속하게 채울 수 있었다.

더구나 카일은 태극권을 이용해 일시적으로 마나를 압축시켜, 몸 주변으로 고밀도의 마나를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런 만큼 멀린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었다.

“보통은 알아듣지 못하던데, 상당히 쉽게 이해를 하시는군요.”

“네? 아… 멀린 님이 설명을 잘하셔서 그런가 봅니다.”

카일은 어물쩍 대꾸했다. 그러자 멀린의 눈동자에 흥미로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예전에 다른 기사분들이나 용병분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 쉽게 이해를 하지 못하시더군요. 왜냐하면 그들은 경험이 없으니까요.”

“경험… 이라니요?”

“마법사들이 이런 부분을 잘 아는 건 바로 마나 집적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시적으로 주변의 마나를 고밀도로 높이는 방법이죠. 집적진 안에서는 마나 수련에 큰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마법도 쉽게 발현된답니다. 하지만 한번 집적진을 가동하려면 수백 골드가 소모되기 때문에 섣불리 사용할 수 없는 마법이죠.”

“그런 마법진도 있었군요. 처음 들어 봅니다.”

“마법진 자체는 간단합니다. 자금만 있다면 쉽게 만들 수도 있지요. 대부분의 고위 귀족 가문이나 유명한 기사 가문, 또는 마탑에도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에게 설명을 드리면 어느 정도 이해를 하시죠. 경험이 있으니 말입니다.”

보통 이러한 마나 집적진은 4서클 이상의 마법사라면, 누구나 발현할 수 있는 간단한 마법이었다. 하지만 마법진의 크기도 크고 소모되는 마법 재료도 많은 만큼 설치가 굉장히 귀찮은 마법이었다. 때문에 이러한 일은 대부분 3서클 이하의 평민 하급 마법사가 마법진을 그리고, 4서클 이상의 고위 마법사가 발현만을 담당했다. 멀린도 귀족가를 방문해 마법진을 그렸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멀린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집적진이 있다면 일시적으로 주변에 고농도의 마나를 집약시켜 수련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아쉽지만 전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보시다시피 이곳은 그리 여유가 있는 곳은 아닙니다. 마법사도 없지요.”

“흠… 그도 그렇군요.”

멀린이 카일의 집 주변을 돌아보며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아! 통곡의 협곡으로 언제 출발하실 생각이십니까?”

“저야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좋습니다.”

“그럼 되도록 빨리 가시지요. 이번에 상단을 따라 외부에 나갈 일이 생겨, 아무래도 상단이 돌아가기 전에는 일을 끝내야 할 것 같습니다. 외부로 나가는 일이라 준비할 게 이것저것 많더군요.”

“전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이제 확인만 하면 되니까요.”

“확인요?”

“그렇습니다. 제가 통곡의 협곡으로 향하는 이유는 확인을 하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멀린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카일은 갸우뚱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 * *

마티슨은 토일이 자신에게 전해질 술을 공작에게 올렸다는 말에 크게 화를 내지 않고 넘어갔다. 상단을 위해 급하게 이루어진 일이니 마티슨도 성을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신 보일이 증류하지 않은 수수술을 가져오자, 술을 진탕 마시고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수련을 하고 오는 것이냐?”

밤새 술을 마셨다고는 느껴지지 않을 만큼 멀쩡한 모습으로 씻고 나온 보일이 집안으로 들어온 카일에게 질문을 던졌다.

“네.”

“지금 갈 생각이냐?”

“아무래도 서둘러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준비할 것도 있고 해서.”

“알겠다. 준비하고 가면 될 것이다. 멀린 님에 대해서는 이미 매튜와 필론에게 말해 놓았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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