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빼돌리는 자
“그러니까… 매번 내 몫으로 술을 보냈단 말이냐?”
“그럼요. 당연히 보내드려야지요. 항상 이 정도는 보내 드렸잖아요.”
카일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식탁 위에 놓여있는 작은 옹기 단지를 가리켰다.
“한 단지씩 매번 말이냐?”
“그럼요. 토일 아저씨에게 부탁해서….”
카일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토일과 눈에서 화염을 뿜어내고 있는 마티슨을 번갈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제가 실수를 한 것 같군요.”
“네… 이….”
막 마티슨의 입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려는 순간, 때마침 집안으로 들어온 멀린을 토일이 급히 끌어당겼다.
“카일! 이분은 멀린이라는 분이다.”
엉거주춤 끌려 들어오는 멀린을 본 마티슨은 급히 억지 미소를 지었다.
카일은 이미 마티슨으로부터 멀린에 대해 들었기에 먼저 다가가 인사했다.
“카일이라고 합니다. 오크 랜드에 가려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음… 그럴 생각입니다.”
“실례되지 않는다면 왜 오크 랜드로 가려 하시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멀린이 고개를 저었다.
“개인적인 이유라….”
더 캐묻지 않겠다는 것처럼 카일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죄송합니다만 오크 랜드는 지극히 위험한 곳입니다. 더군다나 요즘은 오크들의 영역싸움이 한창이라, 입구인 통곡의 협곡까지만 안내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건 아까 보일 대장님께 들었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렇담 다행이군요. 입구까지 다녀오려면 적어도 삼일은 걸릴 겁니다.”
“저야 시간은 충분합니다.”
“그럼 내일 출발하시지요.”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통곡의 협곡까지 신속히 움직인다면 조금 더 시간을 단축할 수도 있지만, 멀린이 무엇 때문에 오크 랜드로 가려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조금 더 여유롭게 시간을 잡은 것이다.
“이야기가 끝나셨으면 이제 도자기와 옹기를 실어야 할 것 같은데….”
토일이 카일의 옆으로 다가와 슬쩍 말을 걸었다. 아직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마티슨을 피해 서둘러 밖으로 나가려는 속셈인 게 분명했다. 그러나 카일은 모르는 척,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 그렇군요. 가시죠, 창고에 넣어두었습니다.”
토일은 걸음을 옮기는 카일의 뒤를 황급히 쫓았다.
“휴~. 죽는 줄 알았네…!”
“중간에 술을 왜 빼돌리신 겁니까?”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처음에는 살짝 한 모금만 하려고 했는데, 너무 많이 마셔 버렸지 뭐냐. 어쩔 수 없이 부 단주님께 전해드리지 못했다.”
“그럼 지금까지 매번 아저씨가 다 드셨단 말입니까?”
“설마! 아무리 그래도 네가 부 단주님에게 전해 달라는 걸 어떻게 그럴 수 있겠냐. 처음 것만 제외하면 다른 문제가 있었단다.”
“다른 문제라니요?”
“…그게 말이다. 쩝, 일이 좀 있었다.”
“무슨 일인지 이야기하기 곤란하시면 말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휴~ 아니다. 그럴 수야 없지. 네가 부 단주님께 전해 달라고 한 위스키를 제대로 전하지 않았으니, 넌 이 일에 대해 알 자격이 충분하다.”
잠시 망설이던 토일은 말을 이었다.
“우리 아일론 상단이 몬스터 부산물과 함께 야르토 산 포도주를 취급하고 있다는 건 너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야 잘 알고 있습니다. 저번에 주셨던 것도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게 여태 남아 있느냐? 작년 이맘때 준 것 같은데.”
“저야 술을 많이 마시지도 않고, 아버지야 포도주보다는 수수로 만든 위스키를 더 좋아하시니까요.”
“그야 그렇다만… 쩝, 좀 아깝지 않느냐?”
“어차피 포도주야 숙성을 시킬수록 맛과 향이 깊어진다니, 오래 놓아두어도 괜찮을 거예요. 다행히 뒷마당 절벽 사이에 있는 동굴 안도 숙성시키기에는 적당하거든요.”
“뭐, 그렇다면야…. 아무튼 우리 아일론 상단에서 몇 달 전부터 트라발트 공작 성에 야르토 산 포도주를 납품하기 시작했다. 하급 기사들이 마실 포도주로 이 야르토 산 포도주가 선정된 것이지. 그동안 꾸준히 중부 진출을 꿈꾸고 있던 우리 아일론 상단으로서는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트라발트 공작령으로 납품이 이루어진다면, 다른 상단도 쉽게 압박해 오기는 힘들겠네요.”
“그래. 처음이야 그랬지… 하지만 곧 문제가 터졌다.”
“문제라니요?”
“상단이 공격을 받았다.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대신 포도주가 많이 손상 입고 말았다. 포도주가 실려 있는 수레를 집중적으로 공격당했기 때문이었다.”
“기존 상인들의 짓입니까?”
“뭐… 심증만 있지 물증은 어디에도 없었다. 당시에는 범인을 잡는 것보다 포도주를 확보해 공작가로 보내는 것이 먼저였다. 때문에 추가로 용병들을 계약해 야르토 영지로 보내고, 난 서둘러 공작가로 향했지.”
그때의 다급하고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떠오르는지 토일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납기일 연장 때문입니까?”
“그래. 어쩌겠나, 누가 범인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늦은 만큼 공작가에 사정을 해야만 했지. 마침 당시 공작 각하께서 독한 증류주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부 단주님께 드릴 위스키를 공작가에 올렸지.”
“설마 제가 만든 술을 공작가에 올렸다는 말입니까?”
카일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수수 위스키는 지금까지 먹어본 술 중 가장 독특한 향과 맛을 가진 술이었다. 그런 만큼 공작 각하께서도 분명 좋아하실 거라 생각을 했지.”
카일이 만든 술은 이곳에서 통상적으로 빚어진 술과는 제조법 자체가 달랐다. 그런 만큼 술의 맛과 향 또한 이곳의 술과 확연한 차이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카일은 자신의 술이 이곳에서 빚어지는 술과는 제조방법이 다르다고 해도, 왕국의 단 한 명뿐인 공작에게 진상될 정도로 고급스러운 술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현재 다핸 남작령으로 소량의 술이 들어가고는 있지만, 그것과 이것은 다른 문제였다. 이런 오지의 영지에서는 카일이 빚은 술 정도면 양질의 술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저급한 술만이 거래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지금까지 부 단주님께 가려던 술이….”
“공작가로 들어갔지.”
“진작 부 단주님께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요.”
그런 일이라면 마티슨 부 단주도 화를 낼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처음에는 한 단지 정도는 괜찮을 거라 생각했지만… 공작가에서 계속 요구하니 어쩔 수 없었다. 그때는 이미 너무 늦은 후였지. 사실 나 역시 공작 각하께서 자네의 술을 그렇게 좋아하실 줄은 몰랐다. 그래서 이번에 자네에게 술 판매를 정식으로 부탁하려 했었지.”
“아시지 않습니까? 술을 빚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일정하게 온도와 습도를 맞춰 줘야 하기에 많은 양을 빚을 수는 없습니다.”
토일이 기다렸다는 듯 눈을 빛내며 물었다.
“차라리 제조법을 파는 것이 어떤가?”
“세상에 오늘 두 분께서 작정을 하시고 오셨습니까? 방금 전까지 부 단주님께 옹기와 도자기 제조법을 내어 달라 설득당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이제는 토일 지부장님까지….”
“하하! 그런가? 아마도 그럴 거라 생각은 했지. 요즘 도자기와 옹기의 수요가 점점 증가하고 있으니 말이야. 특히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도자기 찻잔의 수요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네. 가격도 부쩍 올라가고 있지.”
“그건 몰랐는데, 이거 가격을 올려 받아야겠습니다.”
“걱정 말게. 골드는 넉넉히 챙겨 왔으니까. 그래, 부 단주님과의 대화는 어찌 되었나?”
“죄송하지만 거절했습니다.”
토일은 놀랍지 않다는 것처럼 수긍했다.
“아마도 그러리라 예상은 했지. 그럼 술 제조법 역시 거절하겠지?”
“죄송합니다.”
“미안해할 것 없네. 자네야 골드가 곤궁한 것도 아니니, 쉽게 넘기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네.”
“별로 아쉽지 않으십니까?”
“그야 아쉽긴 하다만 오랫동안 거래를 한 우리 아일론 상단의 제안도 거절했으니, 다른 상단에서 제안이 온다고 해도 섣불리 두 제조법을 넘기지는 않을 것 아닌가?”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다른 상단에서 수천 골드를 제안할 수도 있지요. 그 정도면 저도 흔들릴지 모릅니다.”
“그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우리 상단은 그만한 돈을 지급해 두 제조법을 차지할 능력은 없으니. 그러니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겠지. 처음부터 우리 것이 아니었던 것이니 어쩌겠나, 포기해야지. 다만… 좀 많이 아까울 뿐이지.”
토일은 노골적으로 아쉬움을 표현하며 카일을 바라보았다.
“하하! 걱정 마십시오. 제가 설마 두 분을 잊겠습니까?”
“아이쿠, 카일 님! 감사합니다. 성심을 다해 알아 모시겠습니다.”
“앞으로 저에게 잘해 주셔야 합니다.”
“그럼. 그런 의미에서 술 한 단지만 더 주면 안 되겠느냐? 이번이 부 단주님께서 같이 오시는 바람에, 공작가로 가져갈 술이 없구나.”
토일이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술이 없으면 어쩌시려고….”
“어쩌겠냐? 그럼 내 몫이라도 가져가야지. 매번 내 몫으로 한 단지씩은 남겨 놓지 않느냐.”
토일의 음성은 침울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카일은 이내 입을 열었다.
“아직 남은 술이 있으니, 이 문제는 걱정하지 마세요. 충분히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대신 저도 한 가지 부탁드릴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부탁이라니! 당연히 들어줘야지, 말만 하거라.”
“자세한 사항은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슨 부탁을 하려고 그러느냐? 어려운 부탁이냐?”
“아뇨. 어려운 건 아닙니다.”
카일은 웃으며 도자기와 옹기를 보관하고 있는 창고로 향했다.
창고 안 선반 위에는 그동안 만들어 놓은 도자기와 옹기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토일은 일꾼들을 동원해 창고 안의 옹기와 도자기를 수레로 옮겨 싣게 했다.
“자자,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이것들을 실어라. 깨지지 않게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루고!”
토일이 도자기 하나를 들어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더니 만족스러운 낯을 했다. 도자기 특유의 유백색 빛깔과 절묘하게 잡혀있는 균형감이 조화되어, 묘한 아름다움이 흐르고 있었다.
어떤 재료가 들어갔기에 이렇게 아름다운 광택과 빛깔을 뿜어내는지 모를 일이었다. 토일은 한동안 멍하니 손에 들린 도자기를 바라보았다.
“어떠세요?”
“역시 확실하구나! …다만 도자기의 수량이 조금 줄었구나.”
“대신 옹기는 많이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것도 좋지만, 요즘 귀족가의 영애들이 도자기 찻잔을 많이 찾고 있어서 말이다.”
“죄송해요. 재료 수급이 힘들어서….”
카일이 곤란한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쩝, 재료가 부족하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재료들이 오크 랜드 안쪽에 있어 수급이 좀 힘듭니다. 더군다나 이번에 오크 랜드 안쪽에 문제가 생겨 한동안 재료 수급을 할 수가 없게 되었거든요.”
“혹 큰일이라도 있는 것이냐?”
“아닙니다.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다만….”
카일의 말에 토일이 아쉬움이 가득한 눈초리로 창고 안을 살폈다.
비록 카일에게 도자기와 옹기의 제조법을 사들이려 하고 있었지만, 제조법을 사들였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오크 랜드 안쪽에만 있다는 재료를 찾아내야 하는 문제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대체할 만한 재료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사실상 대량생산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헌데 이것도 실어야 합니까?”
카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토일에게 상단 일꾼 두 사람이 말을 걸었다. 그들은 블랙 베어 가죽으로 싸인 둥근 타원형의 물체 두 개를 들고 있었다.
그것들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구석이 있었다. 하나는 청백색의 빛과 함께 묘한 광택을 뿜어내고 있었고, 또 다른 하나는 옅은 황백색의 빛과 투박하면서도 거친 느낌을 지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