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감춰진 자
소드 엑스퍼트 초급인 사내는 자신의 실력과 4서클의 일루젼 아티팩트만 믿고 무작정 마을 안으로 잠입해 들어왔었다. 이런 오지 마을에서 자신을 알아볼 자는 없다고 자신했기 때문이었다.
‘가장 실력이 뛰어난 자라고 해봤자, 나랑 비슷한 소드 엑스퍼트 초급 정도겠지.’
사실 사내는 이런 오지 마을에 있기에는 소드 엑스퍼트 초급도 과한 경지라 여겼다. 심지어 최대한 높게 잡은 것이 소드 엑스퍼트 초급이었다. 물론 생각만 그렇게 했다뿐이지 실제로 마을에 엑스퍼트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그 정도 경지에 올랐다면 이런 오지 마을에 있기보다는 영주에게 찾아가 기사의 서임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엑스퍼트 급이라면 이런 작은 남작가에서는 평민이라도 기사로 쉽게 서임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경지였다.
때문에 사내는 아티팩트를 이용해 마음 편히 마을로 들어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마을로 들어와 단 몇 발자국도 떼지 못하고 깨지고 말았다.
누군가 자신이 있는 곳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흠… 이상한데?”
“무슨 일입니까?”
매튜의 옆으로 다가온 테스가 물었다.
“저기 저 나무 밑에서 누군가 우릴 보고 있는 것 같거든.”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만?”
“그러니 이상하다는 말이지. 꼭 누군가 있는 것 같단 말이야.”
매튜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신경이 예민해졌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카일이 돌아오지 않은 채 시일이 꽤 흘렀으니 말입니다.”
테스가 걱정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매튜를 보며 말했다.
“쉿! 카일의 일은 비밀이다. 다른 이들에게는 알려져서는 안 되는 일이야.”
“걱정 마십시오. 주민들이나 영지 병사 중 알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카일이야 순찰을 도는 일이 많아, 자경단이나 영지병들도 그러려니 하고 있습니다.”
테스의 말에 옆에 서 있던 뮤트가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그래도 조심하는 것이 좋겠지.”
“알겠습니다.”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카일과 대장님 일인데,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일이죠.”
“서둘러 가시죠. 수련 시간에 늦겠습니다. 어쩌면 대장님께서 먼저 와서 기다리고 계실지 모릅니다.”
“그래, 서두르자!”
나무 아래를 유심히 바라보던 매튜는 테스의 뒤를 따라 자리를 떠났다.
그 모습을 긴장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사내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분명 희미하게나마 내 기운을 느꼈어. 최대 중급에서 최소 초급이상! 거기에 아직 어려 보이지만 같이 있던 두 명도 소드 유저는 되어 보이는데….’
사내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다가 사라진 세 사람의 뒤를 쫓았다.
이런 오지의 구석진 마을에 엑스퍼트와 소드 유저들이 있는 것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내가 매튜를 비롯한 두 사람의 뒤를 쫓아 도착한 곳은 자경대 안쪽에 마련된 작은 연무장이었다.
목책 안쪽에 마련된 훈련장으로, 보일이 혼자 수련을 하거나 자신의 제자들에게 검술을 가르치는 장소였다.
“늦었구나!”
연무장 한가운데에서 막 연무를 마치고 서 있던 보일이 안쪽으로 들어선 매튜와 뮤트 그리고 테스를 꾸짖는 것처럼 말했다.
“죄송합니다. 복귀가 늦었습니다.”
“갔던 일은?”
보일의 물음에 매튜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입니다. 대신 필론이 주변을 살피고 있느니, 특이사항이 생기면 곧장 연락이 올 것입니다.”
“그런가… 아무튼 수고했다.”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잠시 눈을 감고 들고 있던 검 손잡이를 쓰다듬던 보일은 매튜의 뒤에 서 있던 뮤트와 테스에게 말을 건넸다.
“소드 유저에 올랐다고 해도 수련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소드 유저는 이제 막 오러의 세계에 발을 겨우 걸친 상태다. 여기서 만족하고 수련을 게을리하게 된다면 반드시 퇴보하게 된다.”
“알고 있습니다. 대장님.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우리 두 사람 앞에는 항상 앞서가는 카일이 있으니 쉴 틈이 없습니다.”
“맞습니다. 비록 카일보다 재능은 떨어지지만, 노력은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보일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뮤트와 테스는 마을에서도 재능이 제법 뛰어난 아이들이었다. 그렇다고 보일이 검술을 직접 가르친 9명보다 뛰어나단 말은 아니었다. 그저 자경단이 되기 위해 모인 아이들 중에서 어느 정도 재능이 있는 아이들이었다.
때문에 보일이 이 두 사람에게 자신의 검술을 가르칠 일은 없었다.
그러던 중 검술을 가르친 9명의 순찰대 중, 7명이나 되는 자경 대원들이 기사가 되기 위해 반기를 들면서 보일의 생각은 크게 달라졌다. 단순히 재능이 좋은 아이들을 뽑아 검술 가르치는 것보다는, 다소 재능이 떨어지더라도 배신하지 않고 확실하게 마을을 지킬 아이들을 찾아, 검술을 가르치고 새롭게 순찰대를 조직하기로 한 것이다. 그 새로운 아이들이 바로 뮤트와 테스였다.
두 사람 모두 샤론 마을 출신으로 카일보다 1살이 많았다. 하지만 나이와 상관없이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내던 아이들이었다. 카일이 머리를 다친 이후로는 다소 소원해지긴 했으나, 오랫동안 보아 왔다는 점은 변함이 없었기에, 보일은 아이들을 믿고 검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얼마 전 뮤트와 테스가 소드 유저에 오르면서 보일을 기쁘게 했다.
이 둘은 늦은 나이에 검술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그만큼 피나는 노력으로 빠르게 실력을 쌓아가고 있었다.
“너무 나간 것 아니냐? 카일은 나도 상대하기 힘들다.”
매튜가 황당하다는 음성으로 말했다.
카일은 17세의 나이에 중급 엑스퍼트란 경지에 오른 천재였다. 두 사람이 쫓아가기에는 너무 높은 산이었다. 더군다나 카일은 보일의 검식을 온전히 전수 받은 만큼, 두 사람이 노력한다고 해도 카일을 넘어서는 건 불가능할 터였다.
“목표는 높게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더욱 노력을 하지요.”
“그럼요. 대장님이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열심히 배운다면 중급 이상도 가능하다고 말입니다.”
“그야 그렇지만….”
매튜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떨떠름했다.
보일이 새로 뽑힌 순찰대원들에게 자신의 변형된 검술을 알려 주면서 중급 엑스퍼트에 오를 가능성이 커진 것은 맞으나, 그렇다고 앞으로 무섭게 달려나가는 카일을 목표로 삼고 있는 모습이 어리석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 둘이 길잡이로 삼은 카일이 너무 빨리 높은 경지로 나아가게 되면, 자칫 높은 산에 가로막혔다는 생각에 절망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긴 해도 외곽요새에 머물고 있는 폴론을 비롯한 5명은 한동안 카일에게 패했단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
물론 이후 카일의 도움으로 현재 자경단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들이 되었지만, 한동안 팔이 잘렸다는 점과 더불어 어린 카일에게 졌다는 사실에 깊은 자괴감에 빠져 있었던 것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그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봤던 매튜가 뮤트와 테스를 염려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매튜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자, 보일이 말을 받았다.
“아니다. 비록 자신보다 어리지만, 실력을 인정해 목표로 삼고 노력을 이어가는 것은 분명 훌륭한 일이다. 두 사람 모두 더욱 노력하거라! 분명 큰 성과가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뮤트와 테스를 격려해주던 보일은 일순 낯빛을 굳히며 천천히 뒤쪽을 돌아보았다.
“이상하군.”
“네?”
“기운은 느껴지는데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라.”
보일이 천천히 허리에서 단검 한 자루를 뽑아 벼락같이 던졌다.
쉬이익 퍽-
빠르고 날카롭게 날아간 단검이 그대로 흙벽에 박혀 들었다.
“흠… 놓친 것인가? 아니면 잘못 느낀 것인가. 분명 이상한 기운을 느꼈는데 말이야.”
보일이 고개를 흔들었다. 워낙 멀리 있어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보일은 매튜 일행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누군가 그들의 뒤를 밟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다만 지금까지 모른 척하고 있었던 것은 워낙 먼 거리에서 지켜만 보고 있어,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리며 상황을 지켜보자 마음먹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놈이 가까이 왔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보일은 단검을 던졌다. 하지만 흙벽 깊숙이 자루까지 박힌 단검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헉, 헉, 허어억.”
다급히 목책 밖으로 몸을 날린 사내는 처음 내려왔던 거대한 자이언트 블루 우드 위에 올라섰다.
“세상에! 상급, 상급 엑스퍼트가 분명해!”
사내가 거친 숨을 토해 내며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벼락처럼 던져진 단검은 사내의 오른쪽 어깨 위 레더 아머의 가죽을 살짝 베어내며 흙벽에 박혀 들었다. 만약 단검이 단 반 뼘만이라도 왼쪽으로 향했다면, 목 중앙에 정확히 박혀 지금 사내는 이 자리에서 헐떡이고 있지 못했을 것이다.
“허억, 헉. 그 먼 거리에서 정확히 나를 향해 던졌어. 상급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야! 거기다가 소드 엑스퍼트에 소드 유저까지…. 설마 이곳에 기사단이라도 파견이 된 것인가?”
겨우 숨을 고른 사내는 마음을 간신히 가라앉히고서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리고는 이내 이해했다는 낯빛을 띄웠다. 이 마을이 오지의 그저 그런 마을이었다면 자신이 이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나의 잘못이다. 구석에 처박힌 마을이라 너무 쉽게 생각했어. 위에서 이 마을을 감시하란 명이 떨어졌다면, 그만한 이유가 분명 있었을 것인데…. 이제부터라도 이곳을 최대한 조심스럽게 감시해야겠군.”
잠시 지난 기억을 떠올리던 사내는 멀리 달려가는 마차의 뒤를 조심스럽게 쫓았다. 이번에는 지난번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거리를 벌린 상태였다.
* * *
보일의 집은 마을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목책의 가장 끝부분에 위치해 있었다. 그만큼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리는 편이었지만, 수레를 급히 몰아서인지 금세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수레가 보일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토일이 마차에서 뛰어내려 집안으로 달려들었다. 상단 일꾼 두 명도 허겁지겁 뒤를 따랐다.
꽝-
문을 부술 듯이 밀어젖힌 토일의 눈이 커다란 탁자에 앉아 있는 카일과 마티슨에게로 향했다.
정확히는 마티슨 앞에 놓여있는 작은 옹기 단지로 향했다 하는 것이 옳았다.
“헉!”
늘어져 있던 마티슨은 벌컥 문을 열고 등장한 토일을 보곤 헛숨을 삼켰다. 그리곤 누가 빼앗을세라 손에 들고 있던 잔을 쭉 들이켰다.
“단장님! 너무하십니다. 카일을 만나러 같이 오시기로 했잖습니까?”
낯빛이 붉으락푸르락한 토일이 소리쳤다.
“아니… 뭐, 그냥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
마티슨이 씩씩거리고 있는 토일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마티슨이 야르토 산 포도주보다 더 좋아하는 술은 바로 카일이 수수로 만든 술, 그중에서도 발효한 수수술을 증류한 위스키였다.
야르토 산 포도주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마실 수 있지만, 카일이 만든 수수 위스키는 이곳 샤론 마을에서만 마실 수 있었다. 더군다나 토일에게 남부 지부장 자리를 넘긴 마티슨은 그동안 샤론 마을에 올 수도 없어 한동안 카일의 수수 위스키를 마시는 게 불가능했다. 그래서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토일의 눈을 피해 카일에게 달려왔던 것이다.
물론 토일도 마티슨 못지않게 수수술을 좋아하고 있었다.
심지어 카일은 항상 일정량 이상은 술을 내놓지 않았다. 토일이 이렇게 급하게 달려온 것도 혹 마티슨이 카일이 내어놓은 술을 홀라당 다 마셔버릴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마티슨이 마차 안에서의 약속을 깨고 몰래 먼저 카일에게 달려왔으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토일 아저씨 진정하세요. 설마 제가 아저씨 몫까지 부 단주님께 드렸겠습니까?”
카일의 말에 토일의 낯이 환하게 밝아졌다.
“역시 날 생각해 주는 건 너밖에 없구나. 하하하!”
“그럼요. 마티슨 부 단주님이 직접 오셨으니, 매번 부 단주님 몫으로 보내 드렸던 걸 직접 전해 드린 것뿐입니다.”
카일의 말이 끝나자마자 집안의 기온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