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관망하는 자
“아,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일전에 스크롤을 부탁하셨지 않습니까?”
“자경단에서 사용할 분량을 제외하고 되도록 많은 스크롤을 구해 달라 부탁했었지.”
“그래서 20장 정도 더 챙겨 왔습니다만, 판매가 저조해 조금 많이 남았습니다. 지금 남은 수량은 대략 50여 장 정도 됩니다.”
“모두 주게.”
“모두 말입니까?”
토일이 깜짝 놀란 듯 저도 모르게 크게 반문했다. 1서클 하급마법에 지나지 않지만, 마법 스크롤의 가격은 그리 싼 편이 아니었다.
“50장이면 250 실버입니다. 고작 신호용으로나 사용하는 스크롤을 이렇게 많이 사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제가 기억하기로는 분명 지난번 거래에서도 제법 많은 스크롤을 사들이지 않았습니까?”
“따로 쓸데가 있다네.”
“그렇다면야… 알겠습니다. 저야 샤론 마을을 끝으로 지부로 돌아가 하니, 이곳에서 스크롤을 모두 처분하는 것이 좋지요. 전량을 넘겨드리겠습니다.”
“고맙네.”
“오히려 제가 고맙지요. 덕분에 나은 스크롤을 모두 처분할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기분이 좋아진 토일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일의 부탁 때문에 여유분의 스크롤을 준비했지만, 생각보다 스크롤이 많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재미있군! 아주 흥미로워.”
멀린은 토일이 보일과 거래를 하는 모습을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하자면 마을 공터가 내려다보이는 자이언트 블루 우드 위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향기에 더 관심을 느끼는 중이었다.
“이런 오지 마을에 4서클 아티팩트를 가진 자가 있다니 놀라운걸!”
멀린이 흥미를 가지는 건 바로 이 부분이었다. 만약 마법사가 직접 펼친 마법이었다면, 제아무리 5서클에 진입한 멀린이라고 해도 절대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약하게나마 마나의 기운이 감지할 수 있었고, 멀린이 마나의 기운을 느꼈다는 것은 누군가 아티팩트를 이용해 나무 위에 숨어있다는 뜻이었다. 이 정도는 멀린 정도의 고위 마법사라면 얼마든지 알 수 있었다.
“일단 4서클 정도의 마법이라면 아마도 일루젼(llusion) 마법이 인첸트 된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다는 말인데…. 뭐,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겠지.”
혼잣말을 마친 멀린은 품 안에서 주먹만 한 수정구를 꺼내어 들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하늘 탑 마법을 연구해 만들어낸, 일종의 소형 하늘 탑이라 할 수 있는 아티팩트였다.
“디텍터(detector)”
웅- 우웅
멀린의 속삭임을 따라 주변에 머물던 마나가 수정구로 급속히 빨려 들어갔다. 곧이어 수정구 안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더니, 일정한 간격으로 빛의 소멸과 생성이 이뤄졌다. 반짝이는 수정은 작은 진동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우웅 우우웅
“응?”
얼마 지나지 않아 수정구 위로 세 개의 서로 다른 점이 나타나더니, 빛의 깜박임을 따라 모습을 보였다 감추기를 반복했다.
“이건…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인데?”
멀린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손에 쥔 수정구를 바라보다가 나무 위를 살폈다.
“일단 하나는 찾은 것 같고 남은 곳은 어디 보자… 저쪽인….”
“멀린 님!”
수레 위에 앉아 있던 멀린이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
보일과 이야기를 끝맺은 토일이 멀린에게 다가왔다.
‘이런. 캔슬(cancel)’
멀린은 허둥지둥 손에 들려 있던 수정구를 품 안에 집어넣었다.
“멀린 님. 여기 계신 분이 바로 샤론 마을의 보일 자경 대장님입니다.”
“멀린입니다.”
멀린이 보일에게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보통 왕립 마탑을 나온 마법사들은 자유민으로 인정을 받은 만큼, 이렇게까지 깍듯하게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멀린은 왕립 마탑의 고위 마법사들로부터 혹독한 대우와 멸시를 받아 왔었다. 여기에 10여 년 동안 혼자 남부의 하늘 탑을 관리해 오다 보니, 사람을 직접 상대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때문에 낯선 상대에게 먼저 고개를 숙여 자신을 낮추는 버릇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예가 과하십니다.”
깊이 허리를 숙인 멀린을 따라 보일이 인사했다. 보일의 낯빛 위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히 떠올라 있었다.
“오랜 습관이라 그렇습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멀린이 보일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 단주님께서 오크 랜드로 가고 싶다는 뜻을 보일 대장님께 전했다고 합니다.”
보일은 멀린의 눈치를 살피며 신중히 말을 골랐다. 보일 역시 오래전 마법사를 상대해 보았기에, 마법사가 얼마나 괴팍하고 상대하기 어려운 존재인지 알고 있었다. 물론 보일의 실력이라면 멀린이 마법을 발현하기도 전에 이미 목을 날렸겠지만, 적이 아닌 이상 마법사를 함부로 죽일 수는 없으니 최대한 비위를 맞추어 주려는 것이다.
“오크 랜드는 위험한 곳입니다만, 상단에서 귀한 손님이라 하셨으니 통곡의 협곡까지는 최대한 안전하게 안내해 드릴 수 있을 겁니다. 다만 오크 랜드 안으로는 진입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멀린은 잠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이내 문제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는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늦었습니다, 일단은 저희 집으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시죠.”
“그러시죠. 어차피 보일 대장님의 집으로 수레를 끌고 가야 하니, 오늘은 그곳에서 묵으셔도 될 겁니다.”
“그럼 신세를 좀 지겠습니다.”
“집에 손님분들이 계셔서 잘 곳이 마땅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보일이 난감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토일이 고개를 저었다.
“상행을 하며 길에서 노숙을 해온 지 십수 년입니다. 잘 곳이 없으면 수레 밑에서라도 자면 됩니다. 걱정 마십시오. 여기 멀린 님의 잘 곳만 마련해 주시면 됩니다.”
“그 정도야… 일단 집으로 가보시죠. 마티슨 부 단주님도 카일을 보기 위해 집으로 가셨을 겁니다.”
“벌써 말입니까?”
“뭐… 마티슨 부 단주님이야 카일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겠죠.”
“그럼 서둘러 가봐야겠습니다.”
토일은 서둘러 주변에 있던 상단 일꾼 두 명을 불러 수레에 태우고는 급히 보일의 집으로 향했다.
“왜 이렇게 서두르는 겁니까?”
“아마 도착을 해보시면 서두르는 이유를 아실 겁니다.”
보일이 의뭉스럽게 대꾸하자 멀린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 * *
“기회!”
자이언트 블루 우드 위, 빛조차 빨아들일 것 같은 검은 레더 아머를 입은 사내가 샤론 마을을 내려다보며 눈을 빛냈다.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마을 주변만 배회한 지가 벌써 40여 일이나 지났다.
비록 주변의 다른 마을보다 크다고 해도 오지 마을의 특성상, 마을 주민의 숫자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마을에 낯선 사람이 나타났을 때 마을 전체에 알려지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뜻이었다.
은밀하게 대상을 감시해야 하는 상황에서 샤론 마을은 그에게 최악의 장소나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마을 자체의 무력 역시 오지 마을의 허접한 자경대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뛰어날 뿐만 아니라, 체계까지 잘 잡혀 있었다. 그렇기에 섣부른 마음으로 마을로 잠입했다가 들켰을 경우, 탈출도 쉽지 않아 보였다. 때문에 그동안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작지 않은 규모의 상단이 마을로 들어섰다. 수십 명의 사람이 마을로 유입되면서 마을로 진입할 절호의 기회가 생겨난 것이다.
아무리 오랫동안 마을과 거래한 상단이라고 해도 상단 일꾼이나 용병들은 수시로 바뀔 수밖에는 없었고, 마을 사람 모두가 상단 사람들 하나하나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사내는 곧장 나무 위에서 뛰어내렸다.
수십 미터의 높은 나무 위에서 과감하게 뛰어내린 사내는, 중간중간 굵은 나뭇가지를 능숙하게 밟으며 날렵하게 착지한 뒤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 서서히 날이 저물며 목책 위로 하나둘씩 커다란 화톳불이 밝혀지고 있었다.
딱 이쯤이 주간 조와 야간 조가 교대를 하는 시점이라 가장 경계가 취약한 시점이었다.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교대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오늘 상단이 들어오는 날이라 그렇겠지. 좀 참아.”
“상단이 오니까 더 빨리 교대해 줘야 할 것 아니야! 오늘 오크 가죽을 팔 텐데, 옆에 딱 붙어 있어야 우리에게도 좀 떨어질 거 아니냐고.”
“대장님이 어련히 알아서 우리 몫을 남겨 놓으셨을 테니까 걱정 마. 그나저나 이번에 자경대 몫으로 떨어진 가죽이 제법 많으니, 몇 코퍼라도 떨어지겠지.”
“그럼, 자경 대장님이 그렇게 인색하신 분은 아니지 않나. 어쩌면 1 실버라도 주실지 모르지.”
“처음 영주 성에서 이곳으로 올 때만 해도 이젠 죽었구나, 했는데 말이야. 이렇게 돈이 생길 줄은 누가 알았겠어?”
“왜 아니겠나. 난 오히려 이젠 목책으로 오크 놈들이 안 오나 은근히 더 기다려진단 말이야.”
“그럼! 그놈들이 다 돈인데 말이야.”
목책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사내가 경직했던 몸에서 힘을 풀었다.
‘다행히 영지병들이군.’
샤론 마을을 관찰하며 사내가 놀랐던 사실은 마을에 백여 명이 넘는 영지병들이 상주하고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물론 마을 안에 영지병들이 항시 상주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 마을의 외곽, 오크 랜드와 인접한 곳에 이중 삼중으로 요새를 만들어 방어 라인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영주 성을 지키지 않고 병사들을 외곽마을 방어에 집중시키는 행위는 일반적인 영주라면 생각지도 못했을 방법이었다. 오크를 비롯한 대규모 몬스터들이 침공하면 영주 성에서 농성을 하거나, 기사단이나 용병들을 대거 모집해 토벌하는 방법을 사용했지, 이렇게 일렬로 요새를 건립해 병사들로 하여금 방어를 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사내가 가장 경탄했던 점은 바로 영지의 훈련받은 병사들보다 이곳 샤론 마을 자체의 자경대가 더 실력이 좋다는 사실이었다.
겉으로는 병사들보다 자유분방해 보였지만 막상 수상한 움직임이 보이면, 어지간한 병사들보다 오히려 신속하고 과감하게 움직였다.
마치 용병 수십 명을 상대하는 것 같아, 자경단이 경계를 설 때는 아티팩트를 사용하더라도 목책으로의 접근이 쉽지 않았다.
자경단 개개인의 능력은 사내보다 월등히 떨어질지 몰라도 조직적인 움직임은 훌륭했다.
사내는 경계병들의 눈을 피해 능숙하게 목책을 넘어 마을 안으로 진입했다.
사실 사내가 마을로 진입한 것은 이번이 3번째였지만, 아직도 마을 전체를 둘러보지는 못하고 있었다.
수시로 보일이 마을을 돌며 순찰을 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일루젼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어도 수준 높은 기사의 감각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일루젼 아티팩트는 몸 전체에 주변의 풍경을 덧입혀 눈을 속이는 마법이지, 몸 전체를 사라지게 만드는 마법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때 잘못했으면 들킬 뻔했었지….’
처음 샤론 마을에 도착했을 당시의 아찔한 기억을 떠올린 사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