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남작의 정체
“흠… 신경 쓰지 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가문의 이름이니.”
힐튼 남작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남작은 힐튼이란 성을 교묘하게 감추기 위해 풀 네임이 아닌 마일론 가문의 하인즈라고만 말한 것이다. 귀족의 예법으로 따지면 후작이 내린 단승 작위보다 왕실이 내린 계승 작위인 마일론 가문의 성과 작위가 더 높다고 할 수 있으니, 남작의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다.
만약 힐튼 남작이 북부지역에서 마일론 가문을 언급했다면 대부분의 귀족들이 힐튼 남작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일단 북부지역을 벗어나면 마일론 가문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마일론 가문보다는 힐튼 남작 가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송구합니다. 카일과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데려가도 될는지요.”
마티슨이 최대한 예의를 갖추며 물었다. 몰락한 가문이라도 계승 작위를 가진 남작 가문은 왕실에서도 그만큼 대우를 해주고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비록 쇠퇴한 가문이더라도 계승 작위는 정통귀족을 나타내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때문에 마티슨도 힐튼 남작에게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은 것이다.
몰락한 귀족일수록 오히려 정통성과 예법을 더 고집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게.”
“감사합니다. 하인즈 남작님.”
마티슨이 정중하게 인사를 올린 후 카일을 바라보았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고맙네!”
마티슨이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남작은 그를 뒤따르려던 카일을 붙잡곤 물었다.
“친분이 꽤 깊어 보이는구나.”
“오래전부터 샤론 마을로 상단을 이끌고 오던 상인이라 그렇습니다. 이곳에서 몬스터, 특히 오크 부산물들을 거래해 왔거든요.”
“이런 오지까지 온 것을 보니 그리 큰 상단은 아닌 것 같은데…. 믿을만한 상단인지 모르겠구나.”
남작이 카일을 은근슬쩍 떠보았다.
“믿을만한 분입니다. 남작님에 대해 비밀을 지켜 달라 말해 놓을 테니 걱정 마십시오.”
“알겠다.”
대화가 끝난 후 카일은 걸음을 옮겼다.
* * *
집 안에 들어선 카일이 본 것은 식탁에 앉은 마티슨이 손가락을 탁자를 두들기며 고민에 빠져 있는 모습이었다.
“부 단주님.”
“왔느냐?”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고 계십니까?”
“하인즈 남작님 말이다. 분명 어디선가 들러본 이름과 가문인 것 같은데…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굳이 떠올리실 필요 없습니다.”
“무슨 뜻이냐?”
“남작님께서는 이곳에 계신 것을 비밀에 부쳐지길 원하고 계세요.”
“비밀로 해달라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흠….”
카일의 요청에 마티슨이 한껏 이마를 찌푸렸다.
“비밀을 지켜달라는 말은 남작이 단순히 몰락 귀족이 아니라는 건데….”
마티슨이 카일을 힐끔거렸다. 은연중 남작의 정체에 대해 알려달라는 말이었다.
“비밀에 부쳐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카일은 단호하게 대꾸했다.
“젠장! 걱정 마라. 알지도 못하는데 어찌 소문을 퍼트리겠느냐? 더군다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카일 너의 부탁인데 말이다.”
“감사합니다.”
마티슨이 투덜거리자 카일은 그제야 감사를 표했다.
“그나저나 역시 피는 못 속인다더니, 이제 마을에 거인이 한 명 더 생겼군!”
카일의 키는 이미 190cm를 넘어 있었고 체구 역시 단단하고 날렵했다. 보일보다는 상대적으로 작아 보였지만, 마을 사람들에 비해서는 월등한 신체였다.
“그래도 아직 아버지보다는 작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차를 내어 오겠습니다.”
카일은 안쪽으로 들어가 순백색의 작은 찻잔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식탁 옆, 만들어 놓은 작은 화로 위에 올려놓은 무쇠 주전자를 들어 찻잔에 따랐다.
점점 완연한 겨울로 접어들면서 조금씩 한기가 몰려오자, 추위를 피하고 언제든지 차를 마실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화로였다.
찻잔에서 올라오는 하얀 수증기 사이로 고소한 향이 은은하게 번져왔다.
“차로 버섯입니다. 땅속에서 자라는 버섯인데 평범한 방법으로는 찾을 수 없고, 간혹 래빗들이 버섯을 먹기 위해 땅을 팔 때나 찾을 수 있는 귀한 버섯이죠. 한번 드셔 보세요.”
흥미로운 표정을 지은 마티슨이 찻잔을 들어 올리곤 감탄했다.
“대단하구나!”
“차로 버섯이 구하기는 힘들지만 대단한 것까지야….”
“아니 이 찻잔 말이다. 이 아름다운 빛깔이며 완벽한 균형감까지. 도대체 어떻게 만든 것인지 정말 궁금하구나!”
“아!”
카일은 머쓱한 얼굴로 자신이 만든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지금 나와 있는 찻잔은 이곳에서 처음 만든 찻잔이었다. 오크 랜드 안쪽에서 발견된 질 좋은 고령토로 빚어져, 제법 잘 만들어진 찻잔이었다.
“도자기와 옹기 모두 가져가실 물량은 이미 만들어 놓았습니다.”
도자기와 옹기는 아일론 상단을 통해 비싼 가격에 조금씩 팔려나가고 있었지만, 그리 많은 물량이 팔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도자기의 경우 고령토 자체가 오크 랜드에서만 구할 수 있고, 옹기의 경우도 카일 혼자 만들 수 있는 수량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도자기와 옹기 모두 이미 확인을 했다. 하지만 수요에 비해 수량이 너무 부족하구나.”
“어쩔 수 없습니다. 재료를 수급하는 일이 쉽지가 않거든요.”
“물론 도자기의 재료가 오크 랜드로 들어가야만 구할 수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단다. 하지만 꼭 재료가 오크 랜드 안에만 있는 것은 아닐 거라 생각한다. 분명 다른 곳에서도 같은 재료가 있지 않겠느냐.”
“…음.”
마티슨이 하려는 말을 눈치챈 카일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떠냐, 옹기와 도자기 기술을 나에게 넘기는 것이? 1백 골드를 주마!”
1백 골드라면 평민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금액이었다.
그러나 카일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나 기술을 함부로 알려줄 생각이 없었다. 지금 당장은 필요가 없을 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그 작은 지식이라도 자신에게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제작법을 알려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마티슨이 아쉽다는 목소리로 재차 물어왔다.
“500골드 어떤가. 내가 줄 수 있는 최고 금액이라네.”
“그 이야기는 그만하시지요. 아시겠지만 저와 아버지 모두 골드가 부족하다고 생각한 적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당장 골드가 필요하다고 해도 도자기 기술을 팔 생각은 없었다. 오크 랜드 안쪽 절벽 위에는 제국 와이번 나이트들이 사용했던 스피어와 함께, 기사들의 롱소드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 가치만 해도 수백 골드에 달할 정도였다. 무엇보다 도자기의 가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카일로서는 5백 골드에 도자기 기술을 넘길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휴, 정말 안 되겠나?”
“죄송합니다.”
“자네가 안 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알겠다.”
거래에 실패한 마티슨은 씁쓸한 얼굴로 작은 찻잔을 손안에서 이리저리 굴렸다.
“아! 그러고 보니 깜박 잊고 있었구나. 카일 너에게 부탁이 하나 있다.”
“부탁이요?”
“그래. 처음 뒷마당에서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느냐?”
“남부 하늘 탑 말씀이시군요.”
“그래! 하늘 탑, 남부 하늘 탑 관리자가 4서클의 평민 각인 마법사란 이야기도 했었지.”
“그렇습니다.”
“사실 왕립 마탑에서 배출하는 평민 마법사는 대부분이 3서클 마법사들이다. 마탑의 규정상 평민에게는 3서클 이하의 하급마법만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지.”
“그럼….”
“평생 하늘 탑을 관리하며 살아야 할 4서클의 평민 마법사가, 남부 하늘 탑이 폐쇄되면서 세상으로 나온 것이지. 때문에 각 상단에서는 이 마법사를 상단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단다.”
“각축전이요?”
“그렇다. 4서클 각인 마법은 인첸트 마법과는 달리 4서클부터 고급 아티팩트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지.”
마법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카일이 들어도 상단들이 눈에 불을 켜고 영입하려 할 것 같았다.
“헌데 그런 이야기를 왜 제게…?”
“바로 그 마법사가 이곳에 와 있다. 이름은 멀린이라 하지.”
“예? 마법사가 이곳에 와 있단 말인가요?”
“그래. 이곳에 볼일이 있다며 상단에 합류해 같이 왔단다.”
“그럼 부탁이라는 것은…?”
“마법사 멀린이 오크 랜드에 들어가길 원한다.”
“…오크 랜드로 말입니까?”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뜬 카일이 쥐고 있던 찻잔을 식탁에 올려놓았다.
* * *
“허! 마을에 기사단이라도 다녀갔습니까?”
마을 앞 회관에 쌓여 있는 수백 장의 오크 가죽과 부산물을 본 토일이 경악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하, 어찌 알았나! 자네의 말대로 기사단이 이곳에 왔었네.”
어처구니없다는 양 토일이 고개를 저었다. 진짜로 기사단이 이곳에 와 오크를 청소하고 갈 일도 없었고, 설사 왔다고 해도 잡아놓은 오크를 그냥 놓고 갈 리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잡은 오크의 가죽을 벗기고 기사들을 대접하느라 마을이 거덜 날지도 몰랐다.
그러나 마티슨이 쳐다보든 말든 보일은 연신 싱글벙글 웃었다.
보일은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눈앞에 쌓여 있는 오크 가죽엔 분명 기사단이 죽인 오크들의 가죽들이 상당 부분 섞여 있었다.
바로 힐튼 남작과 기사단이 이니엘 영애를 쫓아 무리하게 오크 랜드로 향했을 때 죽인 오크들의 가죽들이었다.
마침 마을로 돌아오던 전진 요새의 자경단원들이, 기사들이 죽인 오크들을 발견해 가죽을 벗겨낸 것이다.
“오크 가죽 203장에 래빗 가죽 30장입니다. 여기에 자경대 몫으로 떨어진 건 오크 가죽 110장, 마을 몫은 오크 가죽 43장, 그리고 오크 가죽 50장과 래빗 30장은 모두 보일 자경 대장 몫이라고 합니다.”
“자경대가 150마리가 넘는 오크를 잡았단 말입니까?”
“말하지 않았나, 기사단이 왔었다고….”
“농담은 그만하시죠. 이번에는 대장님이 잡으신 오크 숫자가 지난번보다는 좀 적지만, 그래도 값비싼 래빗을 30마리나 잡았으니 지난달과 비교해도 그리 차이가 없을 것 같습니다.”
래빗은 몸길이가 대략 30cm 정도 되지만 꼬리는 50cm에 이르는 설치류로 고기는 물론 붉고 아름다운 꼬리 털 때문에 가죽 한 장에 50 실버 이상이나 하는 고급가죽이었다.
래빗은 몸이 빠르고 영리해 사람의 눈에 잘 보이지 않았고, 깊은 산속에서 살아 잡기 힘든 놈이었다.
보일 역시 운이 좋으면 한 달에 10마리 정도 잡을 수 있지만, 운이 나쁘면 전혀 잡히지 않는 녀석이었다.
그런 래빗을 이번에는 무려 30마리나 잡은 것이다.
“일단 마을과 자경 대원들이 필요한 물건은 상단이 가지고 온 물건들로 모두 바꾸어 주면 될 것 같군요. 자경 대장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장부를 뒤적거리던 토일이 계산을 마치곤 보일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금액으로는 얼마나 되지?”
“일단 자경대와 마을에 배정된 오크 가죽은 상태가 좋지 않아, 5 실버 정도밖에 쳐주지 못합니다. 다만 보일 대장님의 경우 오크 가죽의 상태가 좋으니 10 실버를 드릴 수 있겠네요. 래빗은 장당 20 실버를 맞춰 드리지요. 털과 가죽 상태가 좋기도 하고, 요즘 시세가 올라간 것까지 고려하면 20 실버가 적당할 것입니다.”
자경대나 마을에 배정된 오크 가죽들 대부분이 힐튼 남작과 기사들이 죽인 오크들이다 보니 가죽의 상태가 그리 좋지 못했다.
“고맙네!”
“최종적으로 마을에 배정된 오크 가죽은 총 43장 215 실버입니다. 지난번 마을에서 주문한 물품을 생각하면 거의 비슷할 것 같으니, 이 부분은 촌장님과 상의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자경대에 배정된 오크 가죽이 110장이니까….”
미간을 찌푸린 토일은 중얼중얼 셈을 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총 550 실버입니다. 이중 포션을 비롯한 각종 물품을 비용을 제외하면, 대략 절반 정도는 남을 것 같습니다.”
“나머지는 자경 대원들이 필요한 물품을 알아보고 매입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보일 대장님은 오크 50마리에 래빗이 30마리니… 총 110 실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