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79화 (79/404)

79.대책

“괜찮으십니까?”

“물론이에요. 그럼 다시 가겠습니다.”

“얼마든지!”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자 시안느는 기다렸다는 듯이 카일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움직임은 이전과 달랐다. 시안느는 곧장 카일을 향해 뛰어든 것이 아니라, 몸을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며 정면 대결을 피하고 거리를 좁혀나갔다.

쉬익

시안느는 허리를 뒤로 꺾으며 카일이 휘두른 장봉을 피했다. 그리고는 무릎을 축 삼아 낮고 빠르게 몸을 회전시켜 카일의 발치까지 접근한 뒤, 회전력과 함께 무릎을 힘차게 튕겨 점프해 검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쳤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공격이었다.

카일이 막아내지 못한다면 큰 상처를 입게 될 위험한 공격이기도 했다.

까아앙

시안느의 회심의 일격을 카일은 짧은 단봉으로 막아냈다.

퍽-

그러나 시안느는 자신의 공격이 통하지 않으리란 걸 짐작했다는 듯이 반동을 이용해 몸을 회전시켜 카일의 가슴을 향해 발을 뻗었다.

카일은 급히 팔꿈치를 들어 시안느의 공격을 막아냈다.

“헉헉~.”

시안느는 또다시 자신의 공격이 막히자 반동을 이용해 뒤로 튕겨 나가듯 물러났다. 하지만 곧장 카일에게 달려들었다. 위협적인 공격이 쉴 틈 없이 연이어 펼쳐졌다. 마치 합을 미리 맞춰보기라도 한 것처럼 두 사람 모두 공격에 망설임이 없었다.

“대단해요. 모든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내다니.”

“방금 공격은 저도 놀랐습니다. 확실히 변칙적이면서도 빠르고 강력했습니다.”

“그런가요? 장봉을 피하려 일부러 그렇게 움직여 보긴 했는데….”

“충분히 위협적이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공중에서의 뒤차기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쉽게 막아 냈잖아요.”

“그냥 반사적으로 막아낸 것뿐입니다.”

카일이 농담을 하듯 말했지만 시안느는 카일의 말을 그대로 믿지 않았다.

장봉은 검보다 파괴력은 높을지 몰라도 스피드는 떨어졌다. 그런데도 카일은 자신이 최고 속도로 펼친 검격을 능숙하게 막아냈다. 처음 쥔 검과 방패가 손에 익지 않아 그렇다 핑계를 댈 수도 있겠으나, 카일 역시 검보다도 무거운 장봉과 단봉을 들고 대결을 펼친 만큼 변명의 여지도 없이 패한 것이다.

짝 짝 짝

“대단합니다. 두 사람의 검술이 정말 놀랍군요.”

갑작스럽게 들려온 박수 소리에 카일과 시안느, 이니엘 영애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유일하게 놀라지 않은 사람은 힐튼 남작이었다. 다만 남작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낯선 방문객을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말석이기는 해도 힐튼 남작은 10대 강자에 들 정도로 대단한 기사였다. 그런 남작이 두 다리가 부러져 누워 있다는 것만으로도 크게 체면이 손상되는 일이었다. 남작이 샤론 마을을 떠나지 않고 이렇게 남아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남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 줄 순 없기 때문이었다.

남작은 누구도 알지 못하는 왕국의 남쪽 오지마을에서 두 다리를 치료하고 돌아가려는 것이다.

물론 이곳에 남은 이유는 그것 말고도 많았다. 가장 큰 이유는 손녀딸인 시안느의 검술을 다듬어 주는 것이었고, 두 번째로 큰 이유는 상급 엑스퍼트인 보일과 깊은 친분을 쌓는 것이었다. 겸사겸사 카일과도 조금 더 허물없이 지내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예고도 없이 낯선 사람이 등장했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는 것이다.

“마티슨 부 단주님!”

카일이 친근한 목소리로 뒷마당에 들어선 마티슨을 반겼다.

“오랜만이구나! 카일, 그동안 잘 있었느냐?”

“그럼요. 언제 오신 겁니까?”

“지금 막 도착했다네. 헌데 집안에 손님이 많이 계시군. 어여쁜 레이디께서도 두 분이나 계시고 말이야.”

마티슨은 말을 하면서도 새로운 인물들을 관찰하길 멈추지 않았다. 가장 먼저 마티슨의 눈에 포착된 것은 어린 듯 성숙한 듯, 묘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소녀였다. 보기엔 수수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녀에게선 품위와 기품이 흐르고 있었다. 곧이어 마티슨은 소녀를 호위하듯 서 있는 낯선 여기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마티슨이 가장 관심 있게 바라본 사람은 평상 위에 있는, 커다란 체구를 가진 노인이었다. 두터운 가죽을 덮고 인상을 쓰고 있는 사내를 보던 마티슨의 입꼬리가 실룩였다. 딱 봐도 노인이 한가락 할 것 같은 기사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노골적인 마티슨의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 카일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이분들은 잠시 이곳에 머물고 계시는 손님들입니다. 헌데 어떻게 이렇게 일찍 오신 겁니까? 상단이 오려면 며칠 더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아! 그것 말인가? 이번에 남부 하늘 탑 일로 일정을 서둘렀네. 남부 하늘 탑이 폐쇄되면서 그곳을 관리하던 평민 마법사가 세상으로 내몰렸거든.”

“남부 하늘 탑이 폐쇄되다니?”

눈을 둥그렇게 뜬 힐튼 남작이 마티슨에게 되물었다.

“왕립 마탑에서 내린 결론입니다. 때문에 그동안 마탑을 관리하던 멀린이란 4서클 평민 마법사가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이런 멍청한 작자들이…. 제국의 와이번 나이트들이 남부로 우회해 들어올 수 있다는 생각은 정녕 안 한단 말인가?”

분노한 힐튼 남작이 소리를 쳤다.

사실 예전엔 남작도 제국의 기사들이 오크 랜드를 우회하여 남부 영지로 들어올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오크 랜드에서 제국의 와이번 나이트와 기사들을 만난 이상, 제국의 와이번 나이트들이 언제든지 남부 오크 랜드를 우회하여 왕국을 공격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긴 것이다. 물론 대규모 육상전력을 투입할 수는 없겠지만, 하늘을 날 수 있는 와이번 나이트들은 언제든지 남부를 넘어 중부지역의 영지들을 공격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남부 영지들은 낙후되었고 소규모의 영지들이 여기저기 난립한 상황이라, 제국의 와이번 나이트들이 기습적으로 영지를 점령한다고 해도, 왕실과 타 영지에선 쉽게 눈치채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남부의 하늘 탑은 남부지역이 제국 와이번 나이트들로부터 공격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거 큰일이군. 이런 말도 안 되는 결정을 ….”

하지만 이제 와 남작이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왕립 마탑에서 결정이 내려졌다면 왕실 즉 국왕 역시 이에 동의했다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대책이 없겠습니까? 지금이라도 왕실에 심각성을 알리는 것이….”

“소용없다. 국왕이 허락한 일이다. 왕실의 체면을 생각해서도 다시 번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은 이번 일에 대비할 방법을 생각해보는 게 최선이겠지.”

카일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제국의 와이번 나이트들이 오크 랜드를 우회한다면 가장 먼저 공격받을 곳은 샤론 마을을 비롯한 다핸 남작령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염려로 그칠 수 있는 남작과 달리 카일에게는 직접적으로 위협이 되는 일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 일이 쉽게 일어나겠습니까? 더군다나 중부에는 트라발트 공작령이 자리 잡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제국이라도 공작령은 공격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물론 공작 각하나 공작령의 전력이 뛰어나단 사실은 알고 있지만, 예기치 않은 기습엔 아무리 공작령이라도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는 없다. 아무래도 공작령에 사람을 보내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남작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는지 카일이 끄덕거렸다. 지금으로서는 강력한 힘을 가진 중부의 트라발트 공작에게 사실을 알리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 같았다.

“일단은 아버지께서 돌아오시면 이야기를 나눠보시지요.”

“아무래도 그래야겠군. 지금 당장 내가 움직일 수는 없으니….”

힐튼 남작이 공작령으로 가 직접 공작을 만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만, 당장 두 다리가 부러진 남작이 긴 거리를 이동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마침 샤론 마을에 도착한 상단에게 부탁해 함께 움직이거나, 카일의 블랙 와이번을 타고 가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두 다리가 부러진 남작이, 험한 길을 따라 장시간 마차를 타고 움직이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자칫 겨우 맞춰 놓은 다리가 어긋날 수도 있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카일의 블랙 와이번을 타고 움직이는 것이지만, 이 방법은 남작은 물론 카일도 원하지 않은 방법이었다.

남작은 자칫 카일을 왕실이나 고위 귀족에게 빼앗길 우려가 있다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카일은 그냥 귀찮은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 싫을 뿐이지만….

카일과 남작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마티슨은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트라발트 공작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귀족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가장 먼저 북동서 세 지역의 대귀족을 비롯한 고위 귀족, 그리고 왕국 10대 강자들이었다.

“으음….”

마티슨은 고민을 거듭해 보았지만, 딱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고위 귀족이나 왕국의 10대 강자들이 오지나 다름없는 샤론 마을 자경 대장의 뒷마당 평상 위에 누워있을 거라고 생각조차 못 했기 때문이었다.

“실례합니다만, 저는 아일론 상단이라는 작은 상단의 부 단주를 맡고 있은 베이트 드 마티슨라고 합니다.”

고민을 해봤자 알 수 없다 결론을 내린 마티슨은 힐튼 남작에게 먼저 자신의 소개를 했다. 보통 귀족의 경우 신분이 낮은 귀족이 먼저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 귀족의 예법이었다. 마티슨이 먼저 자신의 신분을 내비친 건 은연중에 자신이 상대보다 신분이 낮은 것을 인정하는 행위였다.

물론 마티슨은 고작해야 가장 하급귀족에 해당하는 준 남작에 지나지 않았다.

준 남작은 기사계급과 비슷한 최하급 귀족작위에 해당했다. 하지만 기사계급이 무력을 기본으로 실력을 중시한다면, 준 남작위는 돈 많은 상인들이나 용병 가문에 판매되는 일종의 명예 귀족 작위 중 하나였다.

돈을 주고 산 단승 작위지만 일단 귀족명부에 이름을 올렸으니 귀족으로 취급받긴 했다. 상대가 귀족으로서 이름을 밝힌 이상 남작 역시 자신의 신분을 밝혀야만 했다.

“난 마일론 가문의 하인즈 남작일세.”

마티슨의 낯이 의아함을 품었다.

‘내가 착각을 한 것인가?’

마티슨은 표정 관리를 위해 머리를 깊이 숙였다.

마일론 가문에 대해 스치듯 들어본 기억이 있긴 했어도 어떤 가문인지는 정확히 기억에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인즈라는 이름 역시 여러 귀족 가문에서 들어본 흔한 이름이었다.

“이런 송구합니다. 오랫동안 남부 영지를 돌아다녔지만, 마일론 가문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결국 상대의 신분을 파악하지 못한 마티슨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사과했다.

마티슨은 북부의 힐튼 남작 가문이 마일론 가문의 시초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남부의 몰락한 귀족 가문인가 보군.’

정보에 민감한 상단을 운영하는 마티슨이라고 왕국에 알려진 수백의 크고 작은 귀족 가문에 대해 모두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마티슨은 힐튼 남작을 그저 남부의 몰락한 남작 가문으로 착각하고 만 것이다.

‘하긴 몰락한 귀족 가문이라면 보일 대장과 인연이 있을 만하지. 더군다나 카일 정도라면… 몰락 귀족 가문의 후계자로도 손색이 없고.’

마티슨이 마당 한쪽에 서 있는 이니엘 영애와 시안느를 보면서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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