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새로운 무구
“카일은 남작님을 꺾을 정도로 검술 실력도 대단하고, 상처를 치료할 정도로 뛰어난 치료사에 와이번과 계약을 맺은 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대장장이 기술까지…. 못하는 게 없네요!”
이니엘 영애가 무릎을 감싸 안은 채로 대장간 한쪽에 놓여있는 평상에 앉아 카일을 바라보며 말했다.
“남작님을 꺾다니요, 오해이십니다. 그저 편법을 이용한 것에 불과합니다. 더군다나 약초나 허브를 이용해 만든 치료약은 이미 자경대 안에 널리 퍼져있는 약이라 놀랄 일도 아닙니다. 와이번과의 계약도 운이 좋았을 뿐이지요.”
카일이 멋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음… 물론 검술 실력이 남작님에게 미치지 못하긴 해도, 남작님을 꺾은 것은 사실이잖아요. 어떤 중급 엑스퍼트가 상급 엑스퍼트를 넘어섰다는 남작님을 꺾을 수 있겠어요?”
이니엘의 말대로 17살의 중급 엑스퍼트가 상급 엑스퍼트의 두 다리를 부러트리고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든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이니엘 영애도 직접 보지 못했다면 절대 믿지 못했을 것이다.
카일은 이니엘 영애의 말에 그저 가볍게 웃어넘기며 집게를 들어 뿌연 수증기를 뿜어내는 커다란 물통에서 황금빛 물체를 꺼냈다.
통에서 꺼낸 물체는 대략 지름이 40cm 정도의 원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표면에는 수백 번을 내려친 망치질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얼마나 정성을 들여 만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후우우.”
카일이 긴 한숨을 내쉰 뒤 환한 미소를 지었다. 카일 스스로도 만족스러울 정도로 잘 만들어졌다.
카일은 매끄럽게 다듬어 놓은 작은 봉을 안쪽에 단단히 고정 시킨 후 한 손으로 들고 이리저리 휘둘러보며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카일이 만든 것은 원형의 라운드 실드였다. 작은 체구의 시안느가 한 손으로 들고 사용할 수 있도록 크기를 줄이는 대신,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전체를 금속합금으로 만든 방패였다.
처음에는 강철을 접어 만들 생각이었지만, 온전히 철재로 만들기에는 강철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포기했다.
대신 오크 랜드 절벽에 올려다 놓은 스피어 한 자루를 통째로 녹여 방패를 만들었다. 제국의 와이번 나이트들이 사용하는 스피어는 마법이 각인된 마법 무구로 미스랄의 함유가 높아 한 자루에 수백 골드가 나갔지만, 카일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스피어를 녹여 방패를 만들었다.
“확실히 강철보다는 가볍네.”
미스랄이 많이 함유되어 있을수록 합금의 강도가 높아지고 무게도 가벼워졌다. 그러나 미스랄이 들어있지 않은 단순 강철의 경우, 접쇠가 많이 되면 많이 될수록 철의 조직이 치밀해져 무게가 올라갔다. 때문에 비슷한 강도의 강철검과 미스랄 합금검의 무게엔 큰 차이가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체구가 작은 시안느를 위해 조금 더 크기를 줄여보고 싶었으나, 무리해 무게를 줄인다면 방어력이 떨어질 수도 있어 이 정도가 한계였다.
카일은 아쉬움을 달래며 마지막으로 꼼꼼히 방패를 살폈다.
“두께가 있어 전체 무게가 가벼운 건 아니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지.”
“완성된 건가요?”
방패를 이리저리 휘둘러보는 카일의 모습을 보던 이니엘이 물었다.
“표면을 조금 더 다듬어야 하지만 일단은 완성했습니다. 시안느 경에게 가져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카일은 선반 한쪽에 미리 재단해 놓은 무두질 된 오크 가죽을 방패에 덧댄 후, 안쪽에 60cm 크기의 짧은 검을 넣을 수 있는 가죽 검집을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미리 만들어 뒀던 짧은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지금까지 시안느는 대략 1m에 가까운 롱소드를 사용했었다. 그러나 체구가 작은 시안느가 앞으로 방패와 함께 검술을 펼치기 위해 검신의 길이를 줄일 필요가 있어, 새롭게 검을 제작한 것이다.
카일이 만들어 놓은 방패를 들어 올리며 밖으로 향했다. 평상 위에 앉아 있던 이니엘도 자연스레 카일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쉬익 쉬이익
카일이 대장간 밖으로 나가자 날카로운 칼바람 소리가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시안느는 짧은 목검과 둥근 나무 방패를 들고 마당을 종횡무진 뛰어다니며 검술을 펼치고 있었다.
쉭- 쉬익
“시안느! 넌 체구가 작다. 거기다가 방패를 원활하게 사용하기 위해 검의 길이까지 줄였다. 상대를 쓰러트리기 위해서는 근접전을 펼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넌 상대를 힘으로 이길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적을 상대해야 하느냐?”
힐튼 남작이 넓은 평상에 다리를 뻗은 채로 앉아 시안느를 향해 외쳤다.
“그것은 바로 스피드다. 상대보다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 먼저 공격을 한 후, 상대의 공격이 다가오기 전에 재빨리 빠져나와야 한다.”
쉬이익
남작의 외침에 시안느의 동작이 조금 더 빨라졌다.
“검술에서 화려한 기교는 모두 버려라! 오히려 방패술과 상충되어 검술과 방패술 모두 퇴보할 것이다.”
남작의 외침이 이어질수록 시안느의 동작들이 조금씩 변해가며 어긋났건 검술이 안정을 찾아 아기 시작했다.
“잘 되어 가십니까?”
“이제 어느 정도 합일이 이루어진 것 같다. 하지만 아직도 이전 검술에서 익힌 불필요한 동작들이 흘러나와 방해를 하고 있다. 아마도 한동안은 고생을 해야겠지.”
“그래도 저 정도면 처음보다는 많이 좋아진 것 같습니다.”
“저 아이 제법 재능도 있고, 열과 성을 다해 노력을 하고 있느니 발전이 빠르다. 숙련도만 높이면 될 것이다.”
“다행이군요.”
“그나저나… 다 만든 것이냐?”
“다듬기만 하면 됩니다. 그전에 마지막으로 시안느 경이 직접 확인하고 새롭게 수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가지고 나왔습니다.”
남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카일의 손에 들려 있는 황금빛 방패를 바라보았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호기심 어린 시선을 느낀 카일이 들고 있던 방패를 남작에게 내밀었다.
“음… 확실히 미스랄 함량이 높아서인지 생각보다는 가볍구나! 시안느의 체구가 작으니 방패의 크기도 이 정도면 적당하고….”
꼼꼼하게 방패를 점검하던 남작은 방패 안쪽에 고정시켜놓은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남작님과 검을 나누었던 후안 백작의 검으로 만들었습니다. 손잡이 역시 너무 화려할 뿐만 아니라 제국의 문장까지 있어 검신만 따로 분리하고 새롭게 만든 것입니다. 처음부터 워낙 잘 만들어진 검이라, 검의 끝부분만 조금 잘라내고 검의 균형만 새롭게 잡았습니다.”
“흠. 확실히 정신 사나울 정도로 화려하기는 했지.”
후안 백작과의 전투를 상기하던 남작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나 곧 머리를 흔들어 지난 상념들을 털어버리고 감탄했다.
“대장장이 기술을 익혔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잘 만들어낼지 몰랐구나.”
“아버지를 졸라 몇 년 전부터 배웠습니다. 하지만 합금법을 제외하고는 더 배울 것이 없어, 집안에 작업장을 만들어 필요한 것은 직접 만들어 쓰고 있습니다.”
“그렇구나!”
일단 긍정은 했으나 남작은 그다지 좋아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남작의 입장에서는 후계자로 생각하는 카일이 하위계층들이나 익히는 대장장이 기술을 익혔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카일에게 대놓고 더 이상 대장간 일을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무사히 마을로 돌아오자마자 카일이 곧바로 인장 반지를 돌려주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돌려받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사소한 문제로 카일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는 없었다.
카일이 블랙 와이번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안 이상, 남작으로서는 더욱더 카일을 놓칠 수 없었다.
남작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검술을 마친 시안느는 마당에 허리를 숙인 채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괜찮습니까?”
카일이 물잔을 시안느에게 건넸다. 잔을 받은 시안느는 숨을 고른 뒤 단숨에 잔을 비웠다.
“휴~. 고마워요.”
“별말씀을. 방패와 검이 완성되었습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벌써요?”
“합금이 된 스피어와 기존 검을 조금 손본 것이라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일단 한번 보시지요.”
카일은 평상 위에 올려놓은 검과 방패를 들어 시안느에게 주었다.
“기존의 검보다 검신이 짧고 검폭이 넓습니다. 검날은 전체적으로 날카롭게 갈았습니다. 미스랄의 함유가 높은 만큼 강도가 높아 베기에도 적합할 겁니다.”
“길이가 짧지만 검폭이 기존 검보다는 넓어 무거울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가볍군요.”
“합금은 미스랄의 함유가 높을수록 무게가 줄어들죠. 이제 방패도 들어 보십시오.”
카일에게 건네받은 방패를 이리저리 휘둘러본 시안느가 미소를 지으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고마워요. 설마 금속제 방패가 이렇게 가벼울 줄은 생각지 못했어요. 크기도 이 정도면 제 상체를 모두 보호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입니다.”
“새로 무구를 장만한 김에 둘이 대련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대련요?”
카일이 남작을 돌아보았다.
“전 좋아요.”
“하지만 방금 수련을 끝내셨지 않습니까?”
“새로운 무구를 받으니 힘이 나는걸요.”
시안느가 강렬한 눈빛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음… 좋습니다. 그렇다면 가볍게….”
마지못해 대꾸한 카일은 대장간 안에서 강철로 만든 짧고 긴 단봉 두 개를 들고 나왔다.
“무구는 집 안에 있으니 이것으로 하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좋아요.”
시안느가 흔쾌히 동의했다. 카일의 실력은 시안느도 익히 알고 있었다. 지금 카일이 단봉을 꺼내어 든 것은 어느 정도 시안느의 실력에 맞게 사정을 봐준 것이다.
카일의 검은 남작도 놀랄 정도로 빠르고 강력했다. 시안느가 카일의 검을 막아내는 건 아직까지 어려운 일이었다.
“시작하겠습니다.”
카일은 한발을 앞으로 내밀고 짧은 단봉의 중앙을 잡은 후 수평으로 뻗은 상황에서, 긴 단봉을 짧은 단봉 위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저건!”
카일의 동작에 가장 놀란 사람은 바로 힐튼 남작이었다. 카일은 지금 지난번 화이트 우드 숲에서 보았던 남작의 검술을 흉내 내고 있었다.
“남작님의 검술이군요!”
마찬가지로 카일의 동작을 알아본 시안느가 말했다.
“글쎄요? 같은 동작이 있다고 해서 다 같은 검술은 아니지요.”
“그건 그렇네요. 하지만 대결을 하다 보면 알게 되겠죠.”
“그렇습니다.”
“그럼 먼저 들어가겠어요.”
“얼마든지….”
카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안느가 방패를 앞세우며 빠르게 돌진했다.
꽝
갑작스러운 폭음과 함께 시안느가 뒤쪽으로 주르륵 밀려 나갔다.
달려오는 방패를 향해 카일이 긴 단봉을 그대로 찔러 넣었기 때문이었다.
“오러를 사용하셔도 됩니다.”
“사양하지 않겠어요.”
밀려났던 시안느가 또다시 달려들자 카일이 다시 한번 더 방패를 향해 장봉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번에는 시안느 역시 대비를 하고 있었는지, 장봉과 방패가 부딪치기 직전 팽이처럼 팽그르르 돌아 장봉을 피했다. 그리고 카일의 가슴 쪽으로 재빨리 파고들며 검을 찔러 넣었다.
챙-
단봉을 회전시킨 카일은 시안느의 검을 가볍게 튕겨낸 후 시안느의 어깨를 향해 단봉을 내리쳤다.
꽈광
시안느가 급히 고개를 숙이면서 방패를 등 뒤로 돌려 카일의 단봉을 막아내고는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카일의 장봉은 다시 한번 시안느를 공격했다.
꽈아앙
시안느는 뒤로 밀려나는 것을 막기 위해 방패에 어깨를 밀착한 상태로 오러를 주입했다. 가까스로 카일의 장봉을 막은 시안느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크윽~.”
무의식중에 앓는 소리를 낼 정도로 카일이 내려치는 힘은 대단했다.
오러를 사용하지 않고도 이 정도 힘을 낼 수 있다는 것이 경탄스러울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