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마법사 멀린2
“사실 이번 일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이루어진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마탑을 떠난 귀족 마법사들은 음지에서 각인 마법을 익히고 아티팩트를 만들어, 상당히 단단한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종의 파벌이 만들어진 셈이지요. 아마도 이번 남부 하늘 탑 폐쇄결정도 평민 각인마법사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일 겁니다.”
“파벌이라…. 그렇겠지 사람이 모이면 세력을 생기고 파벌이 나뉘기 마련이지. 그럼 남부 하늘 탑 폐쇄 결정을 한 것은 아마도….”
“한참 세력이 밀리고 있는 탑주가 음지에 있는 귀족 마법사들을 양지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였을 거라 생각합니다.”
“흑마법 논란으로 음지에 숨어 각인 마법을 익힌 귀족 마법사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군.”
“그렇습니다. 더군다나 이번 하늘 탑 폐쇄는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일이니, 남부에 있는 평민 마법사에게 손을 쓰지 못했을 겁니다.”
“그야말로 절묘한 한 수를 쓴 것이군!”
“마탑의 마법사들이 아무리 높은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소수가 다수를 상대하기는 힘들지요. 여기에 각 귀족 가문들까지 얽힌다면…. 뭐 덕분에 주인이 없는 고위 평민 마법사가 뜻하지 않게 세상 밖에 나왔으니, 상인들이 몰려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상단이라…. 하긴 4서클의 각인 마법이라면 고위 아티팩트를 제작하는 데는 탁월하다고 하니. 그런데 말이야, 평민이라지만 그래도 마법사면 머리가 좋은 놈들이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평민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상단들 농간에 놀아나는지 모르겠군.”
왕립 마탑에서 나온 평민 마법사들은 상인들이 보기에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골드나 마찬가지였다.
고서클 마법은 아니지만 3서클 인첸트 마법은 다양한 마법 물품과 각종 무구 제작에 반드시 필요한 마법이었다.
비록 하급마법으로 만들어진 소모성 무구였으나, 값비싼 마법 무구를 구할 수 없는 하급기사와 용병들에겐 여벌의 목숨과도 같은 귀한 물건들이었다. 그만큼 작지 않은 금액으로 팔려나가고 있지만,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즉 상인들 입장에서는 3서클의 마법사만 확보할 수 있다면 확실한 수익이 보장된다는 말이었다.
때문에 상단에서는 평민 마법사를 끌어들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고 있었다.
“그만큼 세상 물정에 어두운 것 아니겠습니까. 그동안 마탑 안에서만 있었으니 말입니다.”
“쯧쯧. 상단을 따라가면 편하게 생활이야 할 수는 있지만, 평생을 골방에 틀어박혀 아티팩트나 찍어내야 하는 자리가 뭐가 좋다고.”
“상인 놈들의 감언이설에 놀아나는 것이죠. 더군다나 계약서마다 4서클의 각인 마법이 사용되어있어, 일단 계약을 하면 저서클의 마법으로는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하지만 이번에는 상단들도 쉽지가 않겠군! 그 평민 마법사를 잡기 위해 중소 귀족들도 대거 나섰으니 말이야.”
“주군께서도 멀린이라는 마법사에게 관심이 있으십니까?”
“물론 기회가 된다면 영지로 데려가고 싶기는 하군.”
“그렇기는 합니다만 일단 먼저 그자를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일찍 하늘 탑을 떠나는 바람에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기사가 말을 끊고 머리를 치켜들어 두리번거렸으나, 멀린은 이미 식당을 벗어난 뒤였다.
‘마탑을 떠난 평민 마법사들의 삶은 여전하군. 단순히 마탑이 상단으로 바뀐 것뿐이니 말이야.’
멀린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사실 멀린은 상단을 무조건 나쁘게만 여기지 않았다.
식당 안 두 사람이 한 가지 착각하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평민 마법사들이 세상 물정에 어둡거나 멍청해서 상단 아래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평민 마법사는 마탑을 떠나는 순간 아무것도 없이 세상에 홀로 던져졌다.
3서클의 마법사는 저서클 마법사로 강력한 무력을 가진 것도, 그렇다고 마탑에서 먹고살 만한 골드를 주는 것도 아닌, 그저 빈털터리 신세로 쫓겨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따뜻한 집과 안정적이고 풍족한 생활을 약속하는 상단의 제안은, 평민 마법사들에게 있어 극심한 가뭄으로 갈라진 마른 땅에 내리는 한줄기 단비와도 같았다. 모든 것을 가진 귀족들의 입장과는 전혀 다르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마탑과 다른 것도 있지.’
절반쯤 강요된 선택지긴 하지만 스스로의 결정으로 상단과 계약을 한다는 점이었다.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상단과 계약을 하지 않고 스스로 삶을 결정할 수 있었다.
실제로 편안한 생활이 보장된 상단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길을 찾은 평민 마법사들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용병의 삶이었다. 비록 저서클 마법으로 혼자서는 오크 한 마리 상대하기도 벅찼지만, 자신을 보호해줄 든든한 동료들만 있다면 3서클 마법사는 수십 마리의 오크도 상대할 수 있는 전력이 될 수 있었다.
원거리에서 다수의 적에게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상단으로 들어가는 것은 좀 더 고민을 해봐야겠군.’
사실 멀린은 하늘 탑을 떠나며 상단과 계약을 맺을 생각도 하고 있었다.
다른 평민 마법사들과 상황이 다르다 해도, 결국 멀린 역시 가진 것 없는 평민 마법사란 사실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물론 꼭 상단이 아니라 중소 영주의 밑으로 들어갈 방안도 있지만, 오랫동안 귀족 마법사들을 상대해온 멀린은 다시 귀족의 밑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에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귀족의 아래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상단과의 계약에 마법까지 사용할 정도로 구속력이 강하다면, 차라리 용병으로 자유롭게 대륙을 돌아보는 것도 좋겠지.’
멀린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용병이 되어 세상을 돌아보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멀린에게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한 가지 비밀이 있었다.
멀린은 4서클 마법사가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9년 전. 하늘 탑으로 온 지 2년이 조금 못 된 어느 날이었다.
꽈과광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엄청난 비와 함께 하늘을 갈기갈기 찢으며 떨어진 벼락이 하늘 탑에 직격한 적이 있었다.
하늘 탑 자체가 워낙 높게 설치된 탑으로 이런 일에 대비해 자체적인 보호 마법진의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워낙 오랫동안 관리되지 않다 보니, 벼락은 그대로 하늘 탑을 관통했다.
이 일로 인해 하늘 탑엔 커다란 상처가 생겨났다.
“이럴 수가!”
악몽 같은 밤이 지나고, 날이 밝을 무렵 밖으로 나온 멀린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탑이 훼손되었기 때문이 아니라,하늘 탑을 중심으로 6개의 지점 즉 육망성을 이루는 거대한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멀린은 곧장 마법진으로 달려가 마법진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 역시 한 사람의 마법사로 더 많은 마법에 대한 지식을 갈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몇 날 며칠 정신없이 마법진에 매달린 멀린은 한 가지 놀라운 진실을 발견했다. 지금 하늘 탑 위에 떠올라 있는 거대한 마법진은 백마법진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흑마법. 그것도 완전히 사라졌다고 알려진 고대의 각인 마법이 분명해!”
마법진과 마법진에 새겨진 각인을 하나하나 확인한 멀린이 내린 결론이었다.
4서클의 멀린이 이처럼 흑마법, 그중에서도 고대 각인 마법이라 확신할 수 있던 이유는 바로 그 스스로가 각인 마법을 익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소수의 흑마법에 사용되는 각인 마법 일부가 여전히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발견한 진실에 정신이 아득해진 멀린은 홀로 중얼거렸다.
“이… 이럴 수가! 하늘 탑에 흑마법과 백마법이 동시에 사용되고 있었다니….”
그동안 흑마법과 백마법은 절대 양립할 수 없는 마법으로 인식되어 왔었다.
하지만 멀린의 눈앞에 그런 상식을 파괴하는 전혀 새로운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아니지, 아니야! 따지고 보면 각인 마법 역시 흑마법에서 파생된 마법이야. 아직도 흑마법의 각인이 여전히 통용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두 마법이 공존할 수 있다는 말이지.”
멀린은 그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강력한 전율이 온몸으로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눈 앞에 펼쳐진 고대 마법진을 연구한다면,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이 사실을 마탑이 알아서는 절대 안 돼.”
만일 이 소식이 마탑에 전달된다면 분명 마탑은 이 사실을 세상에 감추고 마탑이 독식하려 들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방해물이 되는 평민 마법사는 조용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마탑 귀족 마법사들의 밑에서 자란 멀린은 귀족 마법사들이 얼마나 편협하고 독선적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귀족 마법사들의 소유욕과 아집이라면 이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나는 죽은 목숨이다.”
겉으로 드러난 왕립 마탑의 마법사들은 하나의 단단한 조직으로 왕국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화려한 외면과 달리 내부에서는 추잡한 음모와 모함, 그리고 암살이 판을 치고 있었다.
자신보다 뛰어난 자는 뭉갰고 자신보다 약한 자는 짓밟았다. 그곳엔 공정도, 정의도 없었다.
오로지 욕심과 탐욕만이 그곳의 정의요 질서인 곳이었다.
“이곳에 귀족 마법사들이 내려올 일은 없으니 다행이군. 이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면 누구도 알 수 없겠지.”
마법진을 응시하던 멀린이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왕립 마탑에서 생활하는 동안 남부 하늘 탑으로 내려온 귀족 마법사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오죽하면 이곳을 관리하던 전임 귀족 마법사의 시신을 같은 마법사가 나서 거둬주는 게 아닌, 몇몇 행정관을 보내 수습해 올 정도로 남부 하늘 탑은 귀족 마법사들에게 금지와 같은 곳이었다.
더군다나 멀린에게 남는 것은 시간뿐이었다.
이곳에서 할 일이라고는 하늘 탑을 가동하고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마나를 하늘 탑에 공급해 주는 일이었다.
그 일을 제외하면 이곳에서 할 일은 없었고 만나는 사람도 적었다.
하늘 탑은 자체가 고대부터 내려온 유적 중 하나로 원래 와이번이 아닌 드레곤의 침입을 확인하고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거대한 하나의 아티팩트였다. 때문에 조금 더 멀리, 조금 더 넓은 곳을 탐지하려다 보니, 남부 하늘 탑은 높고 험준한 산 정상에 위치하게 되었다.
한 달에 한 번 식량과 부식을 가져오는 작은 상단을 제외하고는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 오지인 셈이었다.
마법진과 각인 마법을 연구하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하늘 탑은 현재의 마법으로는 구현할 수 없다고 알려진 고대 마법의 집약체라 알려져 있었다. 현 상태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일 뿐 새롭게 건립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만큼 드러난 마법진의 선 하나하나는 물론이고 각인 마법을 이루는 룬어 그 자체만으로 방대하고 다양한 지식의 산물이라 할 수 있었다.
멀린은 십여 년 동안 남부 하늘 탑을 관리하며 하늘 탑의 비밀을 하나하나 풀어냈다.
그리고 또 다른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이럴 수가. 단순히 백마법과 흑마법을 혼합해 건설한 하늘 탑이 아니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