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75화 (75/404)

75.마법사 멀린1

“마법사 멀린이 익힌 마법은 4서클의 각인 마법이다. 3서클 이하의 인첸트 마법과는 차원이 다른 고급 아티팩트, 특히 그중에서도 와이번 나이트나 라이더의 스피어를 제작할 수 있는 최소 서클이다. 때문에 지금 각 상단에서 멀린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 이번에 내가 직접 이곳으로 내려온 것도 단순히 상행이나 돌아보자고 온 것이 아니란 말이다.”

마티슨의 화난 목소리에 토일의 고개가 점점 수그러들었다. 마티슨이 예년보다 일찍 내려온 것만 생각했지, 정작 이런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토일은 짐작도 못 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같이 중요한 일은 지부가 먼저 알고 본단에 알리거나, 정보를 취합해 최대한 빠르게 멀린 마법사의 위치 정도는 파악했어야만 했다.

물론 토일은 대부분의 시간을 남부 오지 마을을 돌아다니며 몬스터의 부산물을 수집하느라 다른 곳보다 정보가 느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는 단순히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토일은 잘 알고 있었다.

토일이 남부 하늘 탑 정보를 등한시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송… 구합니다. 제 잘못입니다.”

토일은 그대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떨궜다.

늘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멍청한 짓을 골라 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잘못이 확실하다면 순순히 인정하고 벌을 청하는 모습이 토일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였다.

마티슨도 이곳 남부의 지부장을 오랫동안 했기에 토일이 왜 하늘 탑 정보를 등한시 한 것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잘못을 지적하지 않고 이대로 넘어갈 수 없어 질책한 것이다.

토일이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고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자 사나웠던 마티슨의 기색이 누그러졌다.

바로 이런 토일의 모습에 마티슨이 토일에게 남부 지부장 자리를 물려준 것이다.

토일은 이렇게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면 두 번 다시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았다.

“그만 일어나거라. 넌 지부의 중요한 일 중 하나인 정보 수집을 등한시한 큰 잘못을 저질렀지만, 결과적으로 마법사 멀린이 우리 상단과 함께 있게 되었으니 더는 이번 일을 문제 삼지 않겠다.”

토일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 그럼 이럴 것이 아니라 당장 마차로….”

“그리 서두를 것 없다. 마법사임을 밝히지 않는 것을 보니, 자신을 딱히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니 무작정 다가가 반감을 줄 필요는 없다. 어차피 목적지가 샤론 마을이라고 하니 시간은 많다. 우린 다른 대형 상단들처럼 많은 조건을 제시할 수 없다. 우선 천천히 친분을 쌓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알겠습니다. 일단은 상단일꾼과 용병들이 무례를 범하지 않게 언질을 놓겠습니다.”

“그리하게. 용병들도 그가 마법사라는 걸 알면 함부로 굴지는 않을 터이니 나쁘지는 않겠지.”

* * *

“역시 알고 있었군.”

“예?”

“아… 아닙니다. 혼자 한 말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멀린이 수레를 몰고 있는 마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면… 큼, 괜히 사람 놀라게 하지 마슈!”

마부가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처음 멀린이 상단에 합류하려 할 때부터 상단사람들 대부분은 그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멀린이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하자 마부도 더 이상 따지지 않고 수레를 몰았다.

멀린은 마부가 다시 수레를 모는 데 집중을 하자 허공에 슬쩍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미약한 마나가 마차로 뻗어 나가더니 마차 문에 희미하게 각인된 룬어 속으로 스르륵 스며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나는 룬어와 함께 사라졌다.

“보아하니 딱히 귀찮게 하지는 않을 것 같군.”

멀린이 작게 중얼거렸다. 멀린 역시 마티슨의 말처럼 대형 상단과 중소 영지의 귀족들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우연히 들어간 식당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몰래 엿들었기 때문이었다.

* * *

“이번에 폐쇄된 남부의 하늘 탑에 있던 마법사가 4서클 각인 마법을 익힌 마법사라 했던가?”

막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멀린은,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중년의 사내와 기사로 보이는 젊은 사내가 옆자리 앉으며 꺼낸 이야기에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슬쩍 테이블 아래로 손가락을 움직여 룬어를 그렸다.

다행히 바로 옆자리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라, 테이블 아래로 ‘증폭의 각인’을 새기는 것만으로도 옆자리의 대화를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예. 대략 십여 년 전에 이곳 남부 하늘 탑으로 왔다고 합니다.”

“4서클부터는 고위 마법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평민에게는 3서클의 마법만 허락된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것도 아닌가 보군.”

“아닙니다. 분명 왕립 마탑에서는 평민 마법사들에게 3서클 마법밖에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이번이 좀 특이한 경우죠.”

“특이한 경우라?”

“그렇습니다. 사실상 남부 하늘 탑은 대귀족도, 인접한 국가도 없어 전쟁 걱정이 없다 보니 사실상 유명무실한 곳이었습니다. 오래전 이곳에 귀족작위를 가진 마법사 한 사람이 관리를 했지만, 그가 죽은 후 한동안 관리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는 들었네. 사실상 마탑에서 좌천된 마법사들이나 가는 유배지로, 마법사의 무덤이라 부른다지?”

남부 영지 대부분은 높은 산지와 끝없이 펼쳐진 험준한 산림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때문에 대규모 농사를 짓기도 어렵고 광산의 비율도 낮아 중소 영지들만이 난립해 있을 뿐, 막강한 자금력이나 힘을 가진 대귀족은 없었다.

그리고 인접한 국가가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왕실에서 남부 하늘 탑을 지원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마법사들이 아티팩트를 제작하며 막대한 골드를 벌어들이는 존재라고 해도, 마법실험에 목을 매는 그들은 실험 자금으로 벌어들이는 것보다 더 많은 골드를 소비했다. 특히 고위 마법사일수록 마법실험에 더 많은 골드를 소모했다.

더군다나 왕립 마탑의 고위마법사들은 오랫동안 세습이 이루어진 귀족들이었다. 마법실험만큼이나 귀족으로서의 품위 유지비에도 많은 비용을 소모했다. 그렇기에 왕실이나 대귀족들의 지원은 더더욱 절실하고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런 지원도 받을 수 없는 남부 하늘 탑은, 왕립 마탑의 귀족 마법사들에게는 결코 가서는 안 되는 마법사들의 무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문제는 십여 년 전 발생했다. 그나마 남부 마탑을 오랫동안 지키고 있던 귀족 마법사가 노환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귀족 마법사들은 하나의 방법을 내놓았다. 그건 바로 전례를 깨고 마탑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마법인 4서클 마법을 평민 마법사에게 전수해, 남부로 내려보내는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때문에 십 년 전 평민 마법사를 아예 남부 하늘 탑에 파견하기로 하고, 4서클 마법 중 가장 위력이 약한 각인 마법을 전수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마탑에서 큰 결정을 했군. 평민에게 4서클의 마법을 전수하다니 말이야.”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4서클 마법이긴 하지만, 각인 마법은 마탑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익히는 자가 많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각인 마법이 4서클이긴 합니다만 원 시초가 흑마법에서 기인한 거라, 왕립 마탑에 소속된 마법사들은 등한시한다고 합니다.”

“각인 마법이면 고급 아티팩트를 만들 수 있는 마법인데도 말인가?”

“어차피 4서클을 넘어 5서클에 진입하면 각인 마법보다 더 높은 효율의 고서클 마법진을 인첸트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도 상단들이 마법사 멀린을 찾는다니 흥미롭군그래.”

그동안 평민 마법사들이 만들어낸 마법 물품은 기존 사업들과 연계할 수 있어, 상단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많은 3서클의 평민 마법사를 보유했는가가 그 상단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늠자가 되고 있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대형 상단들 대부분이 수십 명의 평민 마법사를 보유한 채 마법 물품의 생산과 판매를 독점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남부 하늘 탑이 폐쇄되면서 주인 없는 4서클의 마법사, 그것도 고급 아티팩트를 제작할 수 있는 각인마법사가 나타난 것이니, 각 상단들로서는 멀린을 반드시 잡아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기존 대형 상단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중소 상단들 입장에서는 새로운 대형 상단으로 확장해 나가기 위해서 말이다.

하급귀족들도 영지에 마법사가 있다는 것은 엄청난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대귀족들이나 보유하고 있다는 4서클 마법사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사교계에서 자신의 명예를 드높일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상단이나 중소 영지의 입장에서는 4서클 마법사에 고급 아티팩트만 제작할 수 있으면, 각인 마법이 흑마법에서 파생되었다고 해도 상관이 없지요. 아티팩트를 만들어 팔 수만 있다면 되니까요. 더군다나 왕립 마탑에서 직접 사사한 만큼 각인 마법이 흑마법이라는 논란도 문제 삼을 수는 없을 겁니다. 애당초 이미 많은 마법사들이 익히고 있는 마법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자네는 방금 마법사들이 잘 익히지 않는 마법이라 하지 않았나.”

“마탑에서는 그렇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왕립 마탑의 귀족 마법사라고 해도, 수십 년 동안 4서클의 벽을 넘지 못하면 결국 마탑을 떠나야 하니까요.”

마탑이라고 해도 오랫동안 4서클에 머물러있는 마법사들을 계속해서 지원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더 젊고 재능이 뛰어난 마법사를 지원하는 것이 마탑으로서는 더 높은 경지의 마법사를 양성하는 방법이었다.

때문에 왕립 마탑에서도 일정 기간 내에 5서클 마법사가 되지 못한 귀족 마법사들은 자연스럽게 마탑을 떠나야만 했다.

한때 4서클에 정체되어 있는 귀족 마법사들 중 일부에게 남부 하늘 탑 관리를 맡기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결국 이 또한 무산되고 말았다.

마탑을 떠난 귀족 마법사들이 낙후된 남부 하늘 탑으로 향하기보다는 자신들의 본가로 돌아가거나 대영주 아래로 들어가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마탑을 떠난 마법사들 중 많은 수가 암암리에 각인 마법을 익혔다.

마탑을 떠난 귀족 마법사들 역시 평민 마법사들처럼 어디에도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4서클 이상의 귀족 마법사들이 평민 마법사들처럼 상단에 소속되어, 3서클 인첸트 마법 무구를 찍어내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는 마탑은 물론 가문의 체면과는 관계가 깊은 일이기 때문이었다. 체면과 명예를 의식한 귀족 마법사들은 마탑의 묵인 혹은 방조 하에 각인 마법을 익혀 고급 아티팩트를 제작해, 엄청난 비용이 소모되는 마법실험비용을 그나마 충당했다.

분명한 것은 5서클의 경지에 오르지 않는 이상 고급 아티팩트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4서클 각인 마법뿐이라는 사실이었다.

“귀족 마법사들도 마탑을 떠난다니….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 말이군.”

“잘 알려지지 않는 내용입니다. 귀족 마법사들로서는 명예가 크게 실추되는 일이니, 마탑에서도 외부에 잘 알리지 않습니다.”

“그럼 이번에 남부 하늘 탑이 폐쇄되면서 세상으로 나온 마법사가, 공식적으로 4서클의 각인 마법을 익힌 마법사란 말이군!”

중년의 사내가 눈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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