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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용병라이더-74화 (74/404)

74.아일론 상단

열대가 넘는 수레와 한 대의 마차가 구불구불 좁은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매번 오는 길이지만 이 길은 참 적응이 안 되는군.”

백발이 된 흰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겨 단정하게 묶은 노년의 신사가 창밖을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부 단주님이야 일 년에 한두 번 찾으시는 길이지만, 저희는 매달 이 길을 가야 하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쯧, 그래도 한 지역을 담당하는 지부장이라는 녀석이 말하는 것 하고는…. 이곳이 상단에서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알면서 하는 소리냐? 네놈이 아니라도 지부장 할 놈은 얼마든지 있다. 어떻게, 다른 곳으로 보내주랴?”

노신사의 질책에 화들짝 놀란 사내가 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만큼 열심히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뭘 또 그렇게 심각하게…. 헤헤. 부 단주님, 지난번 조세츠 자작가에 납품하고 남은 와인이 있는데 한잔하시겠습니까?”

지부장 토일은 헐레벌떡 일어나 의자 아래쪽에 넣어둔 큼지막한 상자 안에서 와인 한 병을 꺼냈다.

최고급 와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중부 야르토 백작 가문에서 생산하는 제법 유명한 와인이었다.

“흐음 야르토 산 와인이라.”

노신사의 표정이 눈에 띄게 풀어졌다. 노신사의 눈은 이미 와인병으로 향해 있었다.

노신사 마티슨은 고급 와인보다는 이렇게 중저가의 와인을 선호하는 특이한 와인 애호가였다.독특한 취향을 가진 그가 가장 좋아하는 건 야르토 산 와인이었다.

“일단 제가 한잔 올리겠습니다.”

토일 지부장이 상자 안에서 두 개의 와인잔을 꺼냈다.

“자네도 마실 생각인가?”

상자 안에서 꺼낸 두 개의 와인잔을 보며 마티슨 부 단주가 토일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염병할! 저 노인네 와인 마시는 걸 잊고 있었어!’

마티슨은 와인을 좋아하는 만큼 많이 마셨다. 다른 와인 애호가들처럼 향과 맛을 음미하며 한 잔씩 와인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물처럼 들이켜 한 번에 많은 양을 마셨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토일이 어색하게 웃으며 와인잔 하나를 슬며시 상자 안에 다시 집어넣었다.

“허허… 같이 마셔도 될 것을….”

마티슨이 웃으며 와인잔을 빼앗다시피 들었다.

“하하하, 전 괜찮습니다.”

토일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코르크 마개를 열었다.

포옹

와인병의 마개가 열리는 순간 마차 안이 향긋한 포도주 향으로 가득 찼다.

“오호~ 마침 와인이 잘 숙성이 되었군!”

마티슨이 눈을 감고 향기를 음미하듯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토일에게 와인잔을 내밀었다. 그 모습에 다시 한번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간신히 부여잡고 억지 미소를 지은 토일이 들고 있는 빈 잔에 자줏빛 붉은 와인을 가득 따랐다.

마티슨은 괴기스럽게 일그러진 토일의 얼굴을 보면서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와인잔 안으로 가득 차오르는 붉은 와인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캬. 역시 맛이 좋군!”

마티슨은 따라놓은 와인을 단숨에 들이키며 말했다.

꿀꺽꿀꺽

토일을 점차 사라져가는 와인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오랫동안 마티슨을 따라다닌 토일 역시 중저가 와인에 길들여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토일 역시 마티슨처럼 중저가의 와인, 그중에서도 야르토 산 와인을 가장 좋아했다.

“먹, 먹을 만하십니까?”

토일이 혓바닥 아래에 가득 고인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역시 와인은 야르토 산이 최고야! 고급술은 비싸기만 하지 영 감질난단 말이지.”

마티슨은 비어버린 와인잔을 토일에게 내밀며 말했다.

“하하…. 그렇죠.”

부들거리는 입가를 겨우 끌어올린 토일은 마티슨의 잔에 와인병을 기울였다.

잔을 가득 채우는 와인이 마치 자신의 몸에서 뽑은 피처럼 보여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저… 그런데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뭔가?”

막 와인을 입으로 가져가려던 마티슨은 슬쩍 인상을 찌푸렸으나, 와인을 마셔 기분이 좋은지 생각보다 흔쾌히 질문을 받아들였다.

“마부석에 타고 오는 저 사람은 누구입니까? 부 단주님께서 저자의 정체를 알고 계신 것 같아, 상단일행에 포함시키기는 했지만…. 갑자기 정체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들어와 용병들과 상단일꾼의 불만이 많습니다.”

토일이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마티슨이 상단의 2인자라 할 수 있는 부 단주라고는 해도, 상단을 꾸리고 상행의 일정과 인원을 구성하는 일은 모두 지부장인 토일의 일이었다.

상행을 보호할 용병들을 구할 때엔 신용이 확실한 용병단이나 용병 가문과 장기적인 계약을 하거나, 오랜 인연을 가진 실력 있는 용병들을 모아 호위를 맡기는 게 보통이었다.

그만큼 엄중히 사람을 골랐으며 신원이 확실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 상단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용병들 역시 신원이 불확실한 사람이 상단에 들어오는 것에 극도로 예민하게 굴었다.

혹여 상단을 노린 자들이 먼저 상단 안으로 위장시켜 들여보낸 자들이라면, 위급상황에서 안과 밖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길에서 우연히 조우한 사람이라도 특별한 일이 아닐 시, 쉽게 상단일행에 넣어주지 않았다.

물론 부 단주가 적을 끌어들일 일은 없으나, 그렇다 해도 신원이 불분명한 사람이 상단에 들어오는 것은 토일 지부장을 비롯한 상단사람들에게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 사람이 길에서 만난 나약한 체구에 낡디 낡은 로브를 입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상단의 음식만 축내고 있는 중년의 사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쯧! 이리도 사람을 보는 눈이 없어서야. 그러니 지부장 자리를 물려주고도 벌써 5년째 매년 남부로 내려와 상행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죄, 죄송합니다.”

마티슨이 미간을 구기자 토일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괜히 여기서 토를 달았다가는 한동안 이어질 상행에서 잔소리만 들어야 했다.

“잘 들어라. 저 중년인이 입고 있는 로브를 보았느냐?”

“그냥 낡은 로브가 아니었습니까?”

“이런 멍청한 놈! 내가 분명 말하지 않았느냐!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는 없지만 일단 겉모습만이라도 확실하게 파악해 놓으라고!”

“송구합니다.”

“답답한 녀석…. 잘 들어라. 저 사내가 입고 있는 로브는 일반적인 로브가 아니다. 비록 여기저기 기워진 곳이 여럿 있지만, 자세히 보면 가슴에 희미하게 다섯 장의 꽃잎이 남아 있다.”

“5성 잎!”

“그래 이 멍청한 놈아! 왕실의 문장이다. 더군다나 꽃잎 안쪽으로 오망성을 상징하는 별 문양 그려져 있다. 이 정도면 저자의 정체는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겠지?”

토일이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왕… 립 마탑.”

“이제 알겠냐. 저자는 분명 마법사가 틀림없다.”

“하지만 복색을 보면 귀족이 아닌 평민이 분명합니다. 보통 평민 마법사가 마탑을 떠나는 나이는 30대 중후반입니다. 마탑을 떠난 평민 마법사는 귀족은 물론 각 상단에서도 높은 대우를 받게 됩니다. 아무리 평민 마법사라 해도 중년의 나이에 저런 복색으로 호위도 없이 돌아다닌다는 것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토일이 억울하다는 듯 마티슨을 보며 하소연하듯이 말했다.

딱-!

“아이쿠~.”

토일의 말이 끝나는 순간 마티슨의 주먹이 그대로 토일의 이마에 작렬했다.

“이런 멍청한…. 넌 우리 아일론 상단의 4대 지부장 중 하나다. 그런 놈이 남부에서도 가장 중요한 정보를 모르고 있어!”

아직도 화가 나는지 마티슨은 거친 숨을 내쉬다 들고 있던 와인을 쭉 들이켰다.

“커~.”

와인은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아픈 이마를 문지르려던 토일은 허겁지겁 와인잔을 채워 넣었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와인잔까지 던져버릴지도 몰랐다.

“정보… 라면….”

토일이 비굴하게 어깨를 굽힌 채 마티슨에게 물었다. 그러자 마티슨의 얼굴이 잠시 일그러지다가 이내 관자놀이를 문지른 마티슨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내 잘못이지. 그놈의 정이 뭔지… 그래도 날 따라다닌 세월이 있어 지부장 자리를 물려줬더니만. 휴~ 누굴 탓하랴!”

마티슨이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동서남북, 각 지부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이 무엇이냐.”

“그야 각 지역의 상계나 귀족들 사이에 흐르는 정보를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하여 상단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이익을 극대화하는 일입니다.”

“그럼 그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보는?”

“인접국과의 분쟁, 그중에서도 와이번들의 움직임입니다. 일단 와이번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최소한 국지적인 전투 가능성이 생겨났단 것이니까요.”

“그럼 와이번의 움직임은 어떻게 파악하느냐?”

“그야 당연히 각 지역의 하늘 탑 마법사들을 통합니다. 저희도 각 지부마다 하늘 탑 마법사들과 끈이 이어져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토일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당당하게 말했다. 이 정도 질문은 지부장 정도라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마티슨의 표정은 토일의 대답이 이어질수록 더더욱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럼 이곳 남부는?”

애써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은 마티슨은 새로운 물음을 던졌다. 그러자 토일은 마티슨이 한심하다는 듯 대꾸했다.

“이곳은 전투가 일어날 일도, 와이번이 있는 영지도 없습니다. 때문에 남부지역의 하늘 탑은 관리자 한 명이 지금까지 지켜 오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상단에서 신경 쓸 일이 없지요.”

“그 하늘 탑의 폐쇄가 결정되었는데도?”

“와!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진작 그랬어야지요. 이곳에 하늘 탑이 무슨 필요가 있다고.”

토일이 남부 하늘 탑의 폐쇄가 잘된 일이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너… 남부 하늘 탑 관리자가 누군지는 알고 있느냐?”

“그건 알아서 뭐합니까? 다른 일도 많아 바빠 죽겠는데요.”

토일이 관심 없다는 양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후우.”

마티슨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빈 와인잔을 천천히 상자 위에 내려놓고 손가락을 이리저리 풀었다.

관절이 꺾이는 살벌한 소리에 어색한 미소를 지은 토일이 마티슨에게서 최대한 멀어지려는 듯 뒤로 물러났지만, 좁은 마차 안에서 물러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부, 부 단주님, 이거 왜 이러십니까. 말로 하셔도 됩니다.”

“이름, 멀린. 나이 47, 직책은 남부 하늘 탑의 관리자. 그리고 평민.”

우두둑

마티슨은 주먹을 쥐었다 풀기를 반복하면서 말을 이었다.

“하늘 탑의 관리자는 최소한 4서클 이상의 마법을 익혀야 하늘 탑을 유지 가동할 수 있다. 때문에 평민 마법사 중 유일하게 왕립 마탑에서 정식으로 4서클 마법을 익힌 자라고 할 수 있지.”

“4… 4서클! 지금 4서클 마법을 익힌 평민 마법사라 하셨습니까?”

그때서야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눈치챈 토일의 낯빛이 창백하게 변했다.

평민 마법사 중 4서클의 마법을 익힌 마법사는 극히 드물었다. 그들 대부분도 완전하지 못한 마법을 우연한 계기로 배운 반쪽짜리 4서클 마법사에 불과할 정도로, 완성된 4서클 평민 마법사를 만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멀린이란 마법사는 왕립 마탑에서 정식으로 하늘 탑의 관리자로 보낸 마법사, 즉 완전한 4서클 마법을 익힌 평민 마법사라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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