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제국의 블랙 와이번
카일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남작을 남겨두고 곧장 화이트 우드 숲이 보이는 습지로 달려갔다.
“이런!”
카일이 습지로 내려왔을 때에는 이미 웨어 울프 무리가 조심스럽게 습지 위로 발을 내디디고 있는 중이었다.
지난번에는 웨어 울프들이 무작정 습지로 달려든 덕분에 습지 몬스터가 진동을 파악하고 공격을 했다. 그러나 지금처럼 조심스럽게 움직인다면 어렵지 않게 섬을 건너올 것이다.
“웨어 울… 읍.”
카일의 뒤를 따라 습지로 내려온 이니엘 영애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려 들었다. 카일이 급히 영애의 입을 막았다.
“크게 소리치면 습지 몬스터가 이리로 올 수도 있습니다.”
카일의 말에 이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카일이 천천히 입을 막은 손을 떼어냈다.
“그럼 이제 어쩌죠? 차라리 돌이나 나무토막을 던져, 다시 습지 몬스터를 끌어들이는 게 좋지 지 않을까요?”
이니엘의 말에 카일이 머리를 흔들었다.
“돌이나 나무 토막을 아무리 멀리 던진다고 해도 습지의 절반 정도밖에 닿지 않을 겁니다. 지난번 습지 몬스터가 웨어 울프를 공격한 범위를 생각해 본다면, 오히려 습지 몬스터를 섬으로 끌어들이는 꼴이 되고 말 겁니다.”
카일은 아쉬운 얼굴로 허리를 매만졌다. 화살이 남아 있다면 이니엘의 말대로 화살을 날려 웨어 울프 주변으로 습지 몬스터를 끌어들일 수 있지만, 화살이 다 떨어진 이상 방법이 없었다.
“일단 서둘러 돌아가야겠습니다.”
“알겠어요.”
카일과 이니엘이 급히 섬 안으로 달려갔다.
“무슨 일이냐?”
“웨어 울프들이 섬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런…!”
뜻밖의 소식에 남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물론 오러를 회복한 이상 오러 샷으로 몇 마리의 웨어 울프를 죽일 수 있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다리를 다친 남작으로서는 큰 도움이 될 수는 없었다. 그렇다는 건 당장 웨어 울프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카일과 시안느뿐이란 소리였다. 그러나 시안느의 경우 아직 충분한 체력을 회복하지 못한 상황이라 당장 전력에 큰 도움이 될 리 만무했다.
“일단 지금으로서는 습지로 나갈 수도 없으니, 바위를 등지고 웨어 울프를 상대해야 한다. 정면에서 웨어 울프들이 다가온다면 나도 전력에 도움이 될 것이다.”
남작이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도 충분히 싸울 수 있어요.”
바위에 기대어 쉬고 있던 시안느도 검과 스틱을 들고 다가와 비장하게 말했다.
“두 분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싸움은 벌이지 않을 생각입니다. 이대로 이곳을 빠져나가겠습니다.”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이 있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며칠 전까지는 힘들었지만, 이제는 가능합니다.”
카일을 제외한 일행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며칠 전까지 이곳을 빠져나가기 힘들었다는 말은 지금까지 이 섬에서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혹 보일 대장이 자경단을 이끌고 도우러 온 건가요?”
이니엘 영애가 잔뜩 기대한 얼굴로 카일에게 물었다. 일전에 카일이 멀리서 올라오는 연기만으로 샤론 마을에서 출발한 힐튼 남작 기사단의 정확한 인원을 맞춘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분명 이곳 자경단원들은 서로 멀리서도 연락이 가능할 정도로 신호체계가 잘되어 있단 뜻일 터였다.
만약 카일이 샤론 마을로 구원의 신호를 보냈다면 지금쯤 인근에 자경 대원들이 도착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카일의 말에 이니엘 영애는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이곳에서는 샤론 마을로 신호를 보낼 수 없습니다. 만일 보낸다고 해도 쉽게 구원을 나올 수가 없지요. 수십의 자경단원이 이곳으로 온다면 모습을 감추기 힘들어 오크들에게 공격을 당할 겁니다.”
“하지만 어떻게 싸움도 없이 이곳을 빠져나간다는 말이죠?”
“그전에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지금 본 모든 것은 잊어 주십시오.”
“무슨 말이냐?”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잊어달라는 말입니다.”
“그것과 이 섬을 탈출하는 일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카일이 단호하게 대꾸했다. 남작은 흔쾌히 약속했다.
“좋다. 남작가의 명예를 걸고 약속을 지키마!”
“저 이니엘 드 그린넨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어요.”
“저 역시….”
세 사람이 모두 약속을 하지 카일의 단호했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감사합니다. 모두 약속해 주셔서.”
“그럼, 이제 탈출할 방법을 말해 보거라. 곧 웨어 울프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남작의 말에 카일이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로 빠져나갈 겁니다.”
“하늘!”
“설마!”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챈 시안느와 이니엘이 동시에 외마디 단어를 내뱉었다.
‘시카니스!’
-기다리고 있었다.
카일의 머릿속으로 시카니스의 짧은 대답이 메아리쳤다. 그와 동시에 하늘 위로 누군가 금을 긋는 것처럼 수직의 검은 선이 생겨났다.
“끼이이엑~.”
날카로운 소성과 함께 선이 좌우로 벌어지며 거대한 검은 부리가 밖으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뒤이어 이글거리는 푸른 불꽃 같은 두 눈동자와 굵고 긴 목 주변으로 빽빽하게 돋아난 검은 광택의 비늘, 그와 함께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동체, 그보다도 몇 배나 커 보이는 검은 피막의 날개와 꼬리가 나타났다. 마침내 하늘 위로 드러난 블랙 와이번의 모습은 대단히 위압적이면서도 아름다웠다.
모두가 말을 잃은 채 머리를 치켜들고 하늘 위를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블랙 와이번은 덩치에 걸맞은 위압적인 눈을 깜박이며 울음을 토해냈다.
“끼이이엑~.”
날카로운 소성이 공기를 찢었다. 습지를 건너던 웨어 울프들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당황한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웨어 울프들이 아무리 뛰어난 사냥꾼이자 위협적인 맹수라고 해도 와이번은 그들과 결을 달리하는 최상위 포식자였다. 더군다나 거대한 덩치의 블랙 와이번에게 있어 웨어 울프는 그저 사냥감에 지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웨어 울프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도주뿐이었다.
“설마! 와이번과 맹약을 맺고 있었느냐?”
“운이 좋았습니다.”
카일의 말에 남작은 입을 다물지 못하며 섬 위로 내려앉는 블랙 와이번을 바라보았다.
“제국의 블랙 와이번!”
내려앉은 블랙 와이번의 급소를 감싸고 있는 황금빛의 방어구에는 제국의 상징인 포효하는 드레곤이 새겨져 있었다.
“지난번 제국의 기사들이 죽으면서 맹약이 깨어진 블랙 와이번이 저와 맹약을 맺었습니다.”
“제국의 와이번 나이트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지?”
“그것은 저도 잘… 일단은 이곳을 먼저 벗어나야 합니다.”
정신을 차린 남작이 서둘러 움직였다.
-카일, 서둘러라! 이곳으로 십여 마리의 습지 몬스터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카일의 머릿속으로 다급한 시카니스이 목소리가 울렸다. 블랙 와이번의 모습을 보고도 이곳으로 다가온다는 것은 분명 보통 몬스터가 아닌 게 분명했다.
“서둘러야 합니다. 이곳으로 습지 몬스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남작을 등에 업은 카일이 시카니스에게 달려가자 카일의 가방을 황급히 둘러멘 시안느가 이니엘의 팔을 잡고 카일을 뒤쫓았다.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거죠? 블랙 와이번이 있다면 습지 몬스터도 두렵지 않을 것 같은데.”
이니엘이 눈앞의 블랙 와이번을 황홀한 듯 바라보며 말했다. 시안느가 급히 영애의 팔을 당기며 말했다.
“그러니까 더 큰일이죠. 블랙 와이번을 보고도 겁 없이 달려든다는 건, 블랙 와이번까지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는 말이잖아요.”
“아!”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이니엘 영애는 시안느를 따라 블랙 와이번의 위로 다급히 올랐다.
“이 줄을 허리에 묶어요.”
카일은 블랙 와이번의 동체 위로 올라온 시안느와 이니엘에게 각각 줄을 건넸다. 줄은 시카니스의 등 뒤에 만들어진 안장과 연결된 고리에 묶여 있었다.
“카아앙!”
그때였다.
갑자기 습지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몸집의 몬스터가 섬 위로 올라와 위협적임 울음을 토해냈다.
“저놈은 대체…!”
습지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는 블랙 와이번보다는 작았지만, 흉측한 이빨을 드러내며 위협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특히 놀라운 부분은 녹색의 비늘과 잘 벼려진 커다란 낫이 달린 긴 꼬리였는데, 이런 점들은 몬스터를 마치 날개 없는 와이번처럼 보이게 했다.
다만, 와이번이 앞발 대신 날개가 있다면 습지 몬스터는 날개 대신 튼튼한 앞발이 온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드레이크 종이다. 저들 무리에 휩싸이면 나도 살아남을 수 없다.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꽉 잡아라!
“아악!”
시키니스가 그대로 하늘로 날아오르자, 이니엘 영애가 비명을 토해내며 눈을 꼭 감고 시안느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쉬이익-
순간 시카니스가 있던 자리로 거대한 낫이 순식간에 스치고 지나가며 주변의 모든 것을 베어냈다.
섬을 둘러싸고 있던 수십 그루의 화이트 우드는 물론이고 그동안 바람을 막아주던 바위까지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이럴 수가 저렇게 강력한 몬스터가 지금까지 숨어 있었다니!”
카일은 괴성을 지르며 몰려드는 수십 마리의 드레이크들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까지 강력한 습지 몬스터가 있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로 위협적인 몬스터가 숨어 있을 줄은 몰랐다.
만약 저 몬스터가 마을로 내려간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저들은 습지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마치 카일의 마음이라도 읽은 것처럼 시카니스가 말했다.
‘정말인가요? 드레이크가 습지를 벗어나지 않을 거라는 것 말입니다.’
-그렇다. 드레이크 종들은 자신의 영역을 철저히 지키며 살아가는 종이다. 자신의 영역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더군다나 저놈들은 물 밖으로 오랫동안 나와 있지 못한다.
‘그나마 다행이군요.’
그때서야 카일은 다소 안심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와~!”
카일은 끝없이 펼쳐진 오크 랜드의 평원을 바라보며 탄성을 질렀다. 지금까지 고원 위에서 바라보던 오크 랜드와는 또 다른 풍경이었다.
한동안 쉴 새 없이 탄성을 내뱉던 카일의 낯빛이 서서히 떨떠름하게 변해갔다.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시선 때문이었다.
카일은 이곳에 혼자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떠올렸다. 습지 몬스터의 정체로 인한 걱정과 주변의 풍경에 취해 잊고 있던 사실이었다.
잠시 뒤를 흘깃거린 카일의 시선에 힐튼 남작을 비롯한 이니엘 영애가 강렬한 시선을 쏘아오는 것이 보였다.
“미리 말씀을 드리지만 전 누군가의 밑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남작과 영애의 눈은 여전히 카일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시안느만이 침착하게 영애를 안고서 주변을 살펴볼 뿐이었다.
“내 평생의 소원이 뭔지 아느냐?”
밝게 미소지은 남작이 카일에게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딱히 대답을 들으려 한 질문은 아닌지, 넓게 펼쳐진 오크 랜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바로 와이번 나이트가 되어 창공을 날아보는 것이었다. 몇 번이나 와이번과 대면할 기회가 있었지만, 지금까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오늘 와이번의 등에 올라 창공을 날았으니 더는 바랄 것이 없구나.”
남작은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는 듯했으나 어느새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있었다. 비록 최상급에 근접한 엑스퍼트지만, 그가 번번이 와이번과의 맹약에 실패한 일화는 사교계에서는 꽤 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