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후계자2
카일은 이제야 남작이 왜 자신을 마일론 남작 가문을 이을 후계자로 만들려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두 다리가 부러지는 순간 남작은 이미 이곳에서 살아 돌아갈 생각을 포기한 것이다. 대신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갈 가능성이 높은 카일을 후계자로 삼아 마일론 남작 가문을 이어가게 하려는 생각이었다.
“괜한 우려이십니다. 분명 살아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 어쩌면 자네의 말대로 살아서 돌아갈 수 있겠지. 운이 좋다면 말이야. 하지만 이는 마일론 가문의 운명이 달린 일로 그저 단순히 운에 맡길 일이 아니라네. 이번 결정에는 자네의 책임도 일부 있다는 걸 잊지 말아 주게. 그러니 부탁하겠네. 자네가 마일론 가문을 맡아주게!”
“으음….”
남작은 한쪽 손에 끼워져 있던 마일론 가문의 인장 반지를 카일에게 내밀었다.
카일은 생각에 잠긴 채 남작이 내민 인장 반지를 내려다봤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남작의 두 다리를 부러트린 사람은 결국 카일 본인이었고, 기어코 비밀을 파헤친 것도 자신이었다. 아마도 이러한 것들이 남작이 자신을 후계자로 지정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을 거라 카일은 생각했다.
“휴~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잠시 인장 반지를 가지고 있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가는 순간 반지는 돌려 드릴 겁니다.”
카일의 말에 힐튼 남작이 활짝 미소 지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네! 자네가 인장을 받아 준 것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이네.”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던 카일은 깊은 한숨을 쉬며 인장 반지를 받아들였다.
“반지가 작은 것 같습니다.”
남작의 중지에 딱 맞춰져 있는 반지는 카일의 손에 맞게 만들려면 새롭게 교정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남작의 체구도 작은 편이 아니었으나 카일에 비해서는 좀 더 손색이 있었다.
“인장 반지를 중지에 가져가 보게.”
“예?”
위이잉
남작의 말에 카일이 반지를 중지로 가져다 댔다. 순간 갑자기 반지에서 작은 진동이 울리더니 반지의 크기가 조금씩 늘어났다. 커진 반지는 자연스럽게 카일의 손가락에 딱 맞아 들었다.
“마법 반지!”
“인장 반지, 그중에서도 왕실에서 내린 계승 작위를 상징하는 인장 반지는 여러 마법이 중첩되어 만들어져 있다.”
“그… 그렇군요.”
카일이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마법 반지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일론 가문의 인장 반지 안에는 한 자루의 검과 함께 그려진 국화가 있었다.
크로노스 왕국은 전통적으로 가문의 상징을 꽃과 식물을 기본으로 삼아 가문의 특징을 추가해, 각 가문을 상징하는 휘장이나 인장을 만들었다.
“인장을 가지고 왕실을 찾아가 작위 계승에 관한 인정을 받으면 된다. 대부분이 그저 요식적인 서류 절차일 뿐이니 어려운 일은 아니다.”
“알겠습니다.”
카일은 자신의 손에 인장 반지가 끼워지는 순간 남작의 말투나 행동이 바뀌었다는 걸 눈치챘지만,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
“이것 말입니까? 아무래도 스틱 방어술을 익히려면 스틱이 필요할 것 같아 만들어보았습니다.”
“잘됐구나. 마침 스틱이 필요하던 참이었다.”
남작은 카일이 다듬어 놓은 화이트 우드의 길이를 가늠해 보며 말했다.
“그래, 절반 정도로 자르면 될 것 같구나.”
“알겠습니다.”
카일은 곧장 가져온 나무 봉을 반으로 잘라냈다. 그러자 대략 70cm 정도의 단봉이 만들어졌다.
카일은 그중 잘 다듬어진 스틱을 시안느에게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카일이 다소 어색하게 웃으며 남은 단봉을 들고 이리저리 가볍게 휘둘러보았다. 단봉술을 따로 배운 건 아니었으나, 단검술을 제법 오랫동안 수련한 덕분에 단봉을 다루는 것에 어려움은 없었다.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던 남작이 카일을 불렀다.
“그러고 보니 너도 한번 배워 보지 않겠느냐?”
“제가요?”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스틱을 이용한 방어술이니 말이다. 넌 양손으로 검술을 펼치니 좀 더 쉽게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 익히는 검술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마일론 남작 가문의 무기술을 제가 함부로 배워도 되겠습니까?”
조심스럽게 남작에게 묻는 카일의 눈동자에는 이미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카일은 남작이 펼친 스틱의 방어벽을 넘지 못해 큰 위기에 처했었기 때문이었다.
검술 하나만은 자신 있었던 카일에겐 충격적인 순간이었다.
“한동안 버려두었던 무기술이란다. 누군가 익혀 도움이 된다면 좋은 일 아니겠느냐! 무엇보다 넌 이제 마일론 가문과 남이 아니다.”
남작이 미소를 지으며 인장이 끼워진 손을 바라보았다.
비록 임시로 끼워진 인장 반지이기는 하지만 남작의 말이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카일 역시 자신의 검술을 막아낸 무기술인 만큼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열심히 배워 보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이렇게 하나둘 이어가다 보면 인연의 끈은 더욱 단단해지는 법이지. 더군다나 시안느까지 있으니….’
남작이 카일과 함께 스틱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시안느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 * *
딱-
따닥
카일과 시안느가 들고 있던 스틱이 빠르게 부딪히며, 서로를 향해 위협적으로 휘둘러졌다 물러나길 반복했다.
힐튼 남작이 스틱 방어술을 가르치기 시작한 지 5일이 되지 않아, 두 사람은 대련을 할 정도로 능숙하게 스틱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이미 방패술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 조금 더 쉽고 빠르게 스틱 사용법을 익힐 수 있었던 시안느와 달리, 카일은 스틱 사용법을 처음 배우는 입장이었으나, 힐튼 남작이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로 빠른 성취를 보이고 있었다.
“스틱 운용에 많은 변화를 주려면 손목을 얼마나 자유롭게 움직이느냐에 달려 있다.”
“카일! 손목이 힘이 너무 들어갔다. 힘을 더 빼고 변화의 폭을 넓혀라! 무조건 힘이 강하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시안느! 팔목이 벌어지며 빈틈이 계속 노출되고 있다. 벌써 세 번이나 카일에게 방어가 뚫렸다. 팔의 간격을 안쪽으로 조금 더 좁혀야 한다.”
두 사람의 대련을 보며 힐튼 남작은 부족한 부분이나 잘못된 부분을 하나하나 지적해 주었다.
“두 사람 모두 정말 열심히 배우는군요.”
둘의 대련에 열중해 있던 남작이 시선을 돌려 바위 위에 앉아 대련을 바라보고 있던 이니엘 영애에게 말했다.
“아무리 좁은 섬 안이지만 이렇게 수련을 훔쳐보는 것은 피해 주시지요. 백작가의 영애라면 그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이 좁은 섬 안에서 어디로 피해 있겠어요, 더군다나 전 이런 수련을 아무리 봐도 알지 못한답니다.”
이니엘 영애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끄응….”
남작이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지난날 이니넬 영애가 잠이든 상황에서, 카일과 시안느 그리고 남작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비밀을 공유했었다.
더군다나 카일과 시안느가 남작으로부터 무기술을 전수받게 되면서 세 사람의 관계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그러나 이니엘 영애는 어쩐 일인지 세 사람에게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고 어떠한 의문이나 의심도 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남작을 더 불안하게 했다.
혹 지난날 비밀을 이니엘 영애가 듣지는 않았을까 하는 의문까지 들 정도였다.
‘그때 조심했어야 했는데… 너무 상황에 취해있었군.’
남작이 잠시 자책을 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더군다나 영애가 비밀을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도 모를 상황이라 함부로 행동하기도 어려웠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검을 뽑아 단칼에 목을 베어 화근이 될 싹을 미리 제거하고만 싶었다.
비록 바위 위에 앉아 있어 거리가 제법 멀지만 이미 사흘 전 사라졌던 오러가 모두 돌아온 상황이라, 오러 샷으로 단번에 이니엘 영애의 목을 베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남작은 그럴 수 없었다.
바로 시안느가 이니엘 영애의 호위 기사이기 때문이었다.
손녀인 시안느가 보는 앞에서 그녀가 호위하는 영애의 목을 날리는 순간, 겨우 가까워진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게 될 터였다.
더군다나 이니엘 영애가 죽고 호위 기사만 살아 돌아간다면, 그린넨 백작이 시안느에게 어떤 처벌을 내릴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세요?”
언제 내려왔는지 이니엘 영애가 남작의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요.”
“그런가요?”
진실로 궁금했던 건 아니었는지 이니엘 영애는 수련 중인 두 사람에게 눈을 돌렸다.
따닥
카일의 스틱이 시안느의 왼쪽 어깨를 노리고 휘둘러졌다. 시안느는 손목을 중심으로 스틱을 반 바퀴 회전하여 어깨로 내려오는 카일의 공격을 막아냈다.
따악-
시안느가 카일의 스틱을 막아내는 순간 카일의 스틱이 그대로 튕겨 나가는 듯했지만, 카일의 스틱은 짧은 반원을 그리며 아래로 뚝 떨어지더니 시안느의 옆구리를 노리고 들어왔다.
“헉~.”
갑작스러운 반격에 시안느가 급히 뒤로 한걸음 물러나, 카일의 스틱을 피했다.
“시안느! 스틱은 근접 방어술이자 근접전에 특화된 무기이다. 거리가 벌어지면 스틱 공격력과 방어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모든 방어술은 무기만 잘 막아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최대의 방어술은 상대가 공격하기 전 먼저 공격을 해 공격을 미리 차단하거나 공격할 여지는 주지 않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시안느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고개를 숙였다.
스틱 방어술의 요체는 몸의 중심에서 끊임없이 짧은 원을 그리며,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는 근접 방어술인 동시에 공격술이었다. 때문에 스틱을 버린 힐튼 남작의 검술 역시 근접전에 특화된 다소 짧은 중검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카일이 시안느에게 다가가 물었다.
굵은 땀방울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은 상당히 지쳐 보였다.
“괜찮아요. 조금 지쳐서 그래요.”
“그럼 조금 쉬었다가 다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카일은 시안느의 지친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물었다.
오러를 사용하지 않은 순수한 대련이지만 카일보다 체력과 실력이 떨어지는 시안느가 더 빨리 지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녜요. 아직은 조금 더 할 수 있어요.”
“급하게 한다고 해서 실력이 금방 늘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수련은 실전같이 해야 하지만, 그만큼 몸이 상하지 않게 휴식도 충분히 병행해야 한다고 아버지께서 항상 말씀하셨죠.”
“보일 대장님이 말인가요?”
시안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보일은 상급 엑스퍼트의 뛰어난 실력의 검사였다. 그만큼 사소한 말 하나라도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습니다. 항상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해야, 수련을 하더라도 정확한 동작과 힘을 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몸과 마음이 흐트러진 상태에서는 아무리 수련을 열심히 해도 제대로 된 수련을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카일의 말이 옳다. 지금은 잠시 쉬면서 앞서 대련을 복기해 보는 것이 더욱더 도움이 될 것이다.”
카일에 이어 힐튼 남작까지 쉴 것을 권하자, 시안느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축 처진 몸을 이끌고 한쪽 바위에 기대어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