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후계자1
“돌려 말하지 마시고, 원하는 게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세요.”
남작을 똑바로 응시하며 카일이 말했다.
시안느와 남작과의 관계만으로도 카일은 남작에 대한 커다란 비밀 하나를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또 다른 비밀을 카일에게 털어놓는단 건 약점 하나를 스스로 카일에게 알려 주는 것이었다.
남작이 카일에게 바라는 것이 없었다면 하지 않아도 될 말이었다.
“눈치챈 이상 돌려 말하지 않겠네. 자네가 내 후계자가 되어 남작가를 이어 주게.”
카일과 시안느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남작을 바라보았다.
“…지금 제게 남작님의 후계자가 되라고요?”
“그래. 자네가 남작가를 이어받아 주게! 이미 이야기를 들었겠지만 하린은 물론, 이 아이 역시 동부를 떠날 생각이 없네. 결국 가문을 이어받을 사람이라고는 남작위를 노리는 방계의 돼지들밖에는 없다네.”
“말도 안 됩니다. 솔직히 남작님과 전 적으로 만난 사이입니다. 그런 저에게 후계자가 되라니요. 잊으신 겁니까? 남작님의 두 다리를 부러트린 사람이 저입니다.”
카일은 남작의 선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남작이 카일을 만나 동행한 지 이제 고작 십여 일이 지났을 뿐이었다.
카일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내기에는 한참이나 부족한 시간이었다. 더구나 그중 절반 이상은 서로를 속고 속이다, 결국에는 남작의 부하라 할 수 있는 일칸까지 죽였고, 얼마 전에는 사방이 고립된 이곳 습지로 끌고 들어와 협박까지 하며 남작의 비밀을 알아냈다. 남작과 카일은 결코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 아니, 사실상 원수 같은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잊지 않았네. 하지만 자네가 날 구해준 것도, 부러진 다리를 이렇게 치료해 준 것도 사실이지 않나?”
“도대체 왜 절 후계자로 삼으려 하시는 겁니까? 혹시 후계자를 빌미로 후작가로 끌어들일 생각이시라면 오산입니다. 전 귀족이 되거나 작위를 물려받아, 신분을 상승시키고 싶다는 욕심 같은 것은 없습니다.”
“자네가 후작 각하의 그늘에 있겠다면 더 바랄 것이 없지만, 정 원하지 않는다면 그러지 않아도 되네.”
“하지만 남작님의 가문은 북부에 있지 않습니까? 만에 하나 제가 후계자가 되어 가문을 이어받으려면 북부 마파린 후작가의 명을 따를 수밖에는 없을 텐데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하겠는지 카일이 미간을 찡그렸다.
힐튼 남작은 대대로 북부의 마파린 후작을 섬기며 살아온 가문이었다. 당연히 남작의 후계자가 된다면 북부에 있는 남작의 영지와 작위를 이어받아야만 했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네. 정 원하지 않는다면 북부로 오지 않아도 좋다네. 북부의 영지는 후작 각하께 반납하거나 아니면 방계의 아이들에게 물려주면 되니 말일세.”
“설마…!”
“무슨 말씀이신지?”
남작의 의도를 알아챈 시안느와 달리 카일은 어리둥절해 보였다. 설명을 해달라는 것처럼 자신을 보는 카일에게 시안느가 차분히 말했다.
“오래전 일이다 보니 모두 잊고 있지만, 남작님은 두 개의 작위를 가지고 계세요.”
“작위가 두 개나 있다니. 처음 듣는 말입니다.”
“그럴 거예요. 지금까지 왕실에서 하사한 성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었어요. 대부분 북부 영지의 지명인 힐튼이란 성으로 남작님을 부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까지 불려온 힐튼이란 성과 작위는 단승 작위로, 정식 왕실에서 받은 계승 작위는 다르다고 알고 있어요.”
“단승 작위라면 당대에 한하여 작위가 인정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힐튼 남작가는 오랫동안 북부에서 이어져 내려온 가문이 아닙니까?”
카일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단승 작위라면 1대에 한해 작위가 이어지는 명예 작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힐튼 남작 가문은 대대로 오랫동안 북부 힐튼 영지에서 뿌리를 내린 가문이었다.
“내 풀 내임은 하인즈 드 마일론-힐튼 남작이네. 마파린 후작께서 내어주신 북부 영지인 힐튼의 영주이자, 마일론 가문의 사람이란 뜻이지!”
“그럼 단승 작위라는 건….”
“바로 마파린 후작 가문에서 영지와 함께 내려 주신 단승 남작위라네! 오래전 마파린 후작가문의 배려로 북부 영지인 힐튼을 하사받아 뿌리를 내렸네.”
“하지만 이는 엄연히 1대에서만 이루어지는 단승 작위잖습니까. 다음 대가 작위를 물려받게 된다면 후작이 작위를 회수해 갈 수도 있지 않나요?”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래서 새롭게 영주에 취임하게 되면 반드시 마파린 후작에게 기사로서 충성을 맹세하고, 새롭게 단승 남작위와 지금의 힐튼 영지를 인정받게 된다네.”
“하지만 언제까지 후작가와 남작 가문의 관계가 우호적으로 이어지진 않을 텐데요. 두 가문의 관계가 틀어진다면, 다음 대에서는 작위와 영지를 몰수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물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으나 쉬운 일은 아닐걸세. 일단 우리 가문이 대대로 후작가를 충심으로 섬겨, 후작가와 불화가 일어난 적은 드물지. 그뿐만 아니라 북부 기사 가문으로서도 명문이라 할 수 있는 마일론 남작가를 후작가가 품지 못한다면, 과연 후작가가 북부 영지의 패권을 잡고 있을 수 있을 것 같은가?”
비로소 카일은 북부에서 힐튼 남작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었다. 더불어 북부의 영지를 포기하고 마일론 남작 가문만 이어받아도 된다는 말은, 지금까지 수 대에 이어 쌓아 올린 북부에서의 남작가의 영향력 자체를 포기하겠다는 말이었다.
남작이 카일을 얼마나 후계자로 삼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남작이 손을 들어 카일에게 보여 주었다. 남작의 손에는 서로 다른 문양을 가진 반지가 왼손과 오른손 중지에 각각 끼워져 있었다.
“지금 내 손에는 두 개의 반지가 있다네. 하나는 마일론 남작 가문의 가주를 뜻하는 인장 반지, 다른 하나는 단승 남작위와 힐튼의 영주를 상징하는 인장 반지라네.”
반지를 만지작거리던 남작은 이내 말을 이었다.
“대대로 후계자가 정해지면, 성년이 되는 해에 후계자에게 마일론 가문의 남작위를 먼저 승계하게 된다네. 하지만 난 공식적으로 자식도, 그렇다고 후계자도 없어 아직까지 두 개의 반지를 모두 가지고 있었지. 이제 이 마일론 가문의 인장 반지를 자네에게 주고 싶네.”
“일단 남작님의 말씀은 알겠습니다. 마파린 후작 가문을 섬기지 않아도 된다는 남작님의 말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말씀은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갑자기 왜 절 후계자로 삼으려 하시는 겁니까?”
카일이 정말 궁금한 이유이기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작이 자신을 후계자로 삼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그러는 게 아니라네.”
“예?”
“처음 자네를 후작가로 데려가려 했던 것도 보일 대장만이 아니라 자네의 뛰어난 자질 때문이었네! 후계자가 없는 나에게 자네만 한 인재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지.”
“하지만 전 남작가의 사람도 아닙니다.”
“그건 큰 문제가 아니네. 비록 직계가문의 사람이 없다 해도, 방계의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으니 그중 여아 하나를 자네와 이어 줄 생각이었네.”
“그럴 바엔 차라리 방계의 사람들 중 뛰어난 이에게 가문을 물려주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귀족 가문의 직계에서 대가 끊어지면 일반적으로 방계의 아이를 양자로 들여 가문을 이어가게 하는 것은 귀족 가문에서 종종 벌어지는 일이었다.
“나라고 후계자를 찾지 않았을 것 같은가? 하린이 가문으로 오지 않겠다 선언한 순간부터 후계자를 찾기 위해 방계가문의 아이들을 만나보았지만, 가문의 검술을 이어갈 만한 인제는 어디에도 없었네. 고작해야 몇몇 여아들만 눈여겨보았을 뿐이지!”
“하지만 전 마음에도 없는 혼인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귀족 가문에서 여러 부인을 들이는 것은 흔한 일이네. 가문의 여인 중 마음에 드는 여인을 찾아 혼인하게. 정실부인만 가문의 여인으로 받아들이면, 이후 부인을 여럿 들인다 해도 문제 삼지 않겠네.”
“이는 옳지 못한 일입니다. 여인의 의사도 묻지 않고 혼인을 강요하다니요.”
“귀족가의 여인에게는 흔한 일이지. 자네라면 오히려 그녀들도 좋아할 것이네. 적어도 얼굴도 모르는 늙은이와 정략혼을 맺는 것보다는 좋을 것 아닌가?”
“그런….”
“귀족가. 그것도 명목상 귀족으로 남아 있는 자들에게는 정략혼을 통해 인맥과 자금을 확보하는 게 필수라네. 그러지 못하면 그나마 남아 있는 귀족으로서의 삶과 명예를 유지할 수 없으니 말이야. 이점은 분명히 알아두게! 명예에는 반드시 골드는 물론 권력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한참 말을 잇지 못하던 카일은 생각이 정리되었는지 남작에게 침착히 대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남작님의 가문을 물려받다니요. 이곳을 벗어나 인재를 찾아보신다면, 곧 저보다 뛰어난 자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될 겁니다.”
카일의 말에 남작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솔직히 말해 보게. 자네가 보기에 내가 이 습지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가? 자네가 다리를 치료해 주긴 했지만, 걷는 것은커녕 당장 홀로 서는 것도 불가능하다네. 이런 나를 업고 습지의 몬스터를 피해 섬을 벗어난다? 가당찮은 소리!”
“가능합니다. 전 반드시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을 데리고 마을로 돌아갈 겁니다. 제가 약속드리겠습니다.”
확신에 가득 찬 카일의 목소리에 남작이 쓴웃음을 지었다.
“말만이라도 고맙네. 하지만 지난번과 같은 운이 이번에도 생긴다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어쩌면 지금도 웨어 울프들이 건너편 화이트 우드 숲에서 이곳을 지켜볼 수도 있겠지. 습지를 건너는 동시에 공격을 하려고 말이야.”
이번엔 카일도 쉽사리 답하지 못했다. 남작의 말대로 웨어 울프들은 지금도 화이트 우드 숲에 어딘가에 숨어, 사냥감들이 습지에서 빠져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카일이 한동안 습지 안 섬에서 머물려는 이유 역시 화이트 우드 숲에 있을 웨어 울프를 상대하기 전, 부상 입은 몸을 최대한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솔직히 말해 이곳에서 돌아가지 못한다면, 후작은 단승 작위와 함께 영지를 회수해 갈 것이네.”
“후작가를 섬겨온 세월이 있지 않습니까? 쉽게 영지를 회수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딴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힐튼 영지와 단승 작위야 원래 후작의 것이니 당연히 회수해 갈 수 있겠지만, 후계자도 없이 인장 반지까지 사라진다면, 작위를 이을 수 없는 마일론 가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네.”
방계의 자손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은 같은 피를 이어받은 사람들이었다. 가문이 이대로 문을 닫는 순간, 영지에 남은 식솔들과 방계의 자손들은 그나마 누리던 귀족들의 권위도 잃고 떠돌이 신세밖에는 되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남작이 카일에게 가문을 물려주려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카일이 미래의 소드 마스터가 될 거란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비록 가문의 피와 땀이 서린 힐튼 영지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지만, 카일이 소드 마스터에 오르는 순간 마일론 가문은 힐튼 영지보다 더 큰 부와 명예를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