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힐튼 남작의 회상3
“당시 슈안의 검술은 대단했었다. 그런 검술을 가진 기사 가문이 알려지지 않았다니, 이해할 수 없구나.”
“할머니께서는 원래 검술에 천부적인 자질을 가지고 계셨다고 들었어요. 어릴 적 가문의 검술을 마스터하신 이후, 용병으로 떠돌며 실전을 통해 가문의 검술을 한 단계 발전시키려 하셨다고 들었어요.”
“슈안에게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그럼 지금까지 플랜스 가문에서 자란 것이냐?”
“네. 어머니께서도 먼 방계가문의 사람이셨어요.”
“너희들이 많이 힘들었겠구나. 귀족 가문에서 사생아로 자란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 모르지 않는다.”
귀족 가문의 사생아 그것도 귀족 여인의 사생아는 그 위치가 낮고 천할 수밖에는 없었다.
비록 여인이 귀족이라 해도 아이 아비의 신분이 낮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만약 상대가 귀족가의 남자라면 굳이 아이가 사생아가 될 이유도 없었다.
귀족 가문에서는 고위 귀족으로 갈수록 정략혼이든 아니든 여러 부인을 두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때문에 아이의 아비를 밝힐 수 없는 귀족 여인의 사생아는, 심각한 경우 가문에서 축출당하기도 했다.
“그리 힘들지 않았어요. 어릴 적 아버님께서 사생아라 놀림을 당하시기는 했지만, 할머님께서 가문에 새롭게 정립한 검술을 전해줄 테니, 아버지를 플랜스 가문의 직계로 받아 달라 요구하셨거든요. 뒤에서 욕을 할지는 몰라도 저희는 당당하게 플랜스 가문의 직계로 살아왔어요.”
플랜스 가문은 동부에 위치한 수많은 기사 가문에서도 하위기사 가문에 속해 있었다. 가문의 검술은 고작해야 중급 엑스퍼트에 겨우 오를 정도로 최하위 검술이었다.
그렇기에 가문에서 배출한 기사들 대부분이 초급 엑스퍼트에 머물러 있었고, 대부분이 하위 남작가에 소속되어 있었다.
당시 플랜스 가문에서는 슈안의 제안을 거절하고 가문에서 축출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슈안이 정립한 새로운 검술을 조건으로 내걸자, 결국 가문의 직계로 받아들인 것이다.
새롭게 정립된 슈안의 검술이 중급을 넘어 상급을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검술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 검술이면 가문의 사람이 아닌 자라도 가문의 사람으로 만들어야 할 상황이었다. 하물며 슈안은 가문의 직계였고 그의 아들 역시 절반은 가문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음… 아무리 슈안이 뛰어난 천재라 해도, 그만한 검술을 단번에 발전시켰다는 것은 믿기가 힘들구나.”
“하지만 사실이에요. 제가 플랜스 가문의 검술로 동부 제일의 그린넨 백작가문 영애의 호위기사가 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힐튼 남작은 의구심 어린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슈안이 비록 검술의 천재라고 해도 당시 슈안의 나이는 고작 20살 전후의 어린 나이였다. 용병 생활을 한 지 단 몇 년 만에 새롭게 검술을 정리하고 창안해, 중급을 넘어 상급 엑스퍼트를 바라볼 정도로 뛰어난 검술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슈안이 그 같은 일을 해냈다면, 분명 단순히 검술을 창안하기만 한 게 아니라는 말이었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며 생각에 잠겨 있던 힐튼 남작이 시안느를 보며 말했다.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검술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 나 또한 그 때문에 스틱을 버리고 검술에 집중해 지금의 경지에 올랐다.”
“알고 있어요. 언젠가 아버지께도 방패를 버리고 검술에 집중하라는 가문 사람들의 강요가 있었거든요. 하지만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방패를 손에서 놓지 않으셨어요. 당신께서 방패를 손에 놓는 순간 하린의 방패술은 영원히 사장되어 버릴 것이라 말씀하면서요.”
“아!”
충격받은 힐튼 남작이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하린의 말마따나 지금 방패술을 알고 있는 사람은 하린이 유일했다. 마찬가지로 스틱 방어술을 알고 있는 사람도 남작이 유일했다. 결국 두 사람이 사라지는 순간, 방패술도 스틱 방어술도 모두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렇구나. 내가 생각이 짧아 오래전부터 지켜온 가문의 무기술 하나를 그대로 사장 시킬 뻔했구나!”
남작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알려 주마 스틱 방어술을 익힌다면 방패술 역시 쉽게 익힐 수 있을 것이다. 허나 그전에 꼭 풀어야만 할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문제라면….”
“스틱 방어술은 기본적으로 검술과 짝을 이루어야 한다. 스틱 방어술이야 단순히 무기술이니, 알려 줄 수 있어도 남작가의 검술은 알려 줄 수가 없단다. 물론 네가 남작가로 온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전 플랜스 가문을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도 가문의 검술과 방패술을 같이 수련하셨어요. 크게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요.”
“천만에. 분명 슈안이 방패술을 검술과 조합시키기 위해 변형을 시켰을 것이다. 허나 나는 그 변형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이뤄졌는지 모른다. 그러니 스틱 방어술을 배우려면 정확히 플랜스 가문의 검술에 대해 알아야 한다.”
힐튼 남작의 말에 시안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무리 하린의 방패술을 익히고 싶어도, 가문의 검술을 남작에게 순순히 알려줄 수는 없었다.
“가문의 검술을 외인에게 알려 줄 수는 없어요.”
입술을 깨문 시안느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
“그게 그렇게 문제가 되나요? 어차피 남작님께서 플랜스 가문의 검술을 익히실 것도 아니잖아요.”
옆에서 둘의 대화를 경청하던 카일이 말했다. 최상급을 바라보는 남작이 고작 하위기사 가문의 검술을 탐낼 리가 없다 생각한 것이다.
당장 카일만 봐도 시안느의 검술에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외인에게 어떻게….”
“공식적으로 알릴 수는 없지만, 남작님은 시안느 경의 조부세요. 오히려 플랜스 가문보다는 더 가까운 사이 아닌가요. 더군다나 시안느 경 역시 지금의 남작님께 배움을 청할 수 있는 것도 북부 마파린 가문의 힐튼 남작님이 아니라, 경의 조부라는 생각에 할 수 있는 부탁이잖아요.”
카일의 말에 시안느가 잠시 당황한 얼굴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다소 억지스러운 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카일의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다.
힐튼 남작은 하린의 부친이자 자신의 친할아버지였다.
가깝기로는 외가보다는 친가인 남작이 더 가까우니, 딱 잘라 외인이라 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카일의 말대로 시안느가 배움을 청하는 순간부터, 스스로 조부라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두 사람은 남이 아니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결국 시안느는 남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남작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시안느가 고개를 숙이는 순간, 그녀 스스로가 남작이 자신의 조부라 인정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비록 세상에 알릴 수 없는 비밀이지만 말이다.
남작은 눈짓으로 카일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일이 잘 풀리게 된 건 카일이 나서준 덕분이었다.
“괜찮으니 어서 고개를 들어라. 가문의 검술을 지키려는 일은 당연한 일이다.”
“아닙니다. 카일의 말이 맞아요. 전 지금 남작님이 아니라, 할아버지께 부탁을 드리는 거예요. 결코 외인이라 할 수 없죠. 더군다나 고작 하급 기사 가문의 검술을 탐낼 이유도 없고요.”
어느 정도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것 같자 카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잠시 물러나 있겠습니다. 전 외인이니 시안느 경의 검술을 볼 필요는 없겠죠.”
“멀리 가지는 말게!”
“알겠습니다.”
선선히 대꾸한 카일은 두 사람을 피해 습지로 향했다.
* * *
“어디 보자… 이곳에 있을 것 같은데….”
화이트 우드가 자라고 있는 습지 주변으로 내려온 카일은 조심스럽게 물속을 살폈다.
-뭘 찾는 것이냐?
섬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있던 카일의 머릿속으로 시카니스의 음성이 들려 왔다.
‘물속에 가라앉아 있는 화이트 우드가 있는지 찾고 있습니다.’
-화이트 우드가 지천에 자라고 있다. 물속에 있는 나무를 찾을 필요가 있느냐?
‘화이트 우드는 나무 자체가 수액을 많이 함유하고 있기도 하지만 나무 자체가 무거워 물에 뜨지 않고 가라앉습니다. 그리고 물을 먹은 화이트 우드는 나무 속 수액이 물속으로 빠져나가게 되어, 조직이 치밀하고 단단할 뿐만 아니라 질기게 변하죠.’
한참 동안 물속을 바라보고 있던 카일은 진흙 속에 잠겨 있는 화이트 우드를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혹시 주변에 놈들이 있나요?’
-느껴지는 놈들은 없다.
카일은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물속에 잠겨 있던 화이트 우드를 조심스럽게 물 밖으로 끌어냈다. 물 밖으로 드러난 화이트 우드의 잔가지와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내자 대략 1.5m 정도 길이였다.
카일이 껍질을 벗겨낸 나무를 일정한 굵기로 다듬고 있을 때쯤 시안느가 카일을 찾아왔다.
“남작님께서 찾으세요.”
“알겠습니다.”
카일이 적당히 다듬어진 목봉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카일은 고심이 가득해 보이는 시안느에게 물었다. 하지만 시안느는 그저 고개만 저으며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남작에게 도착했을 때 카일은 이번 일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남작의 낯이 딱딱하다 못해 파리하게 질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카일은 아무 말 없이 남작에게 다가갔다.
“남작님.”
“왔나?”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던 남작이 카일에게 눈을 돌렸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두 분의 표정을 보니 작은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 보통 일은 아니지.”
“남작님 제발….”
시안느가 남작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걱정하지 말거라. 지금 와서 플랜스 가문을 어떻게 할 생각은 없다.”
그 말에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던 시안느의 얼굴 위로 안도가 퍼졌다.
“제법 심각한 일인가 보군요.”
“허허. 그래 제법 심각한 일이지. 슈안이 날 철저하게 속였으니까!”
“무슨!”
“분명 자네도 이야기를 들으면서 놀랐을 것이야. 슈안이 그 어린 나이에 상급에 근접한 검술을 만들어 냈다고 했으니 말이네.”
“그야…. 당연히 놀랐습니다.”
“헌데, 인제 보니 그것이 아니었네. 플랜스 가문의 검술은 우리 남작가의 검술 일부를 도용해 만들었네! 아마도 나와 같이 있는 동안 검술과 마나 연공법 일부를 훔쳐낸 것이겠지. 아마도 슈안은 검술의 재능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나 보더군.”
“재능이라면….”
힐튼 남작이 손가락으로 머리를 톡톡 두들겼다.
“기억력이라네! 한번 본 것만으로도 검술을 완벽하게 기억하는 능력 말이야. 지금 생각해 보면 수련을 할 때면 슈안과 마주치는 일이 많았지.”
“그렇군요. 헌데 이런 이야기를 왜 제게 해주시는 겁니까? 이런 비밀은 모르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은 것일 텐데요.”
남작이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간다고 해도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남작은 플랜스 가문을 응징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검술의 일부라지만 유출되었다는 것 자체만으로 남작가로서는 명예가 크게 실추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이 사실을 카일에게 알려주는 것은 분명 다른 이유가 있단 의미였다.
“왜 그러나. 자네는 이런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아니었나? 시안느와 나의 관계를 집요하게 물어본 걸 보면, 퍽 좋아하리라 생각했는데.”
“…그건 저와 아버지는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서였습니다. 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럼 비밀 하나 더 알고 있다 해도 바뀌는 것은 없지 않은가.”
남작의 말에 카일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