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63화 (63/404)

63.도주

“위험!”

시안느가 힐튼 남작을 향해 검을 찔러 넣으려는 순간, 아무런 저항도 없이 앉아있던 남작이 그대로 시안느를 덮쳐 안고서는 바닥을 뒹굴었다.

“아악~.”

시안느가 바닥으로 쓰러지면서 비명을 질렀다.

힐튼 남작은 시안느가 발로 차 버린 자신의 검을 주워 급히 그녀의 앞을 막았다.

시안느를 안고 바닥을 구른 뒤 검을 들어 그녀의 앞을 막아서는 동작은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당신!”

시안느는 벌떡 몸을 일으켜, 검을 들고 자신의 앞을 막아서고 있는 힐튼 남작의 등을 사납게 쏘아봤다. 그리고는 손에 들려 있는 검을 더욱더 단단히 움켜잡았다.

당장이라도 남작의 등을 찌른다면 어렵지 않게 복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괜찮으냐?”

결단을 내린 시안느가 남작의 등을 찌르려는 순간, 정면을 바라보던 힐튼 남작의 목소리가 시안느의 귓가를 울렸다.

“….”

칼을 든 손을 높이 치켜들었던 시안느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섰다. 남작은 방금 자신을 죽이려 한 시안느의 행동을 아는지 모르는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아직은 참거라. 지금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날 죽일 기회가 있을 것이다.”

자신을 죽여 복수를 하라고 종용하던 게 언제냐는 양, 힐튼 남작은 정면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제야 시안느는 남작의 등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남작의 등에는 좌측 어깨에서부터 우측 허리 부근까지 다섯 줄기의 긴 혈선이 길게 남아 핏물이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엇인가 거대한 짐승이 할퀴고 지나간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 상처가 남작이 자신을 구하고 얻은 상처라는 사실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크르륵.”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낮은 짐승의 울음소리와 함께 한 쌍의 푸른 횃불이 둥실둥실 하늘로 떠올랐다.

마치 지옥 속 푸른 귀화가 다가오는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날 정도로 차갑고 섬뜩했다.

푸른 귀화는 점차 거리를 좁혀왔다. 흐린 달빛 아래, 놈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났다.

거대한 체구에 온몸을 뒤덮고 있는 검은빛의 털, 커다란 주둥이와 굵고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흘러내리는 끈적하고 불투명한 침까지….

“웨어 울프….”

힐튼 남작이 당혹스러운 듯 어둠 속에서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는 거대한 체구의 웨어 울프를 바라보며 짧은 침음성을 내뱉었다.

“내 옆에서 물러나 멀리 도망쳐라. 최대한 막아보겠다.”

힐튼 남작이 모습을 드러낸 웨어 울프를 향해 검을 들어 올리며 시안느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

당황한 시안느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남작과 웨어 울프를 번갈아 보며 불안정하게 눈을 굴리고 있을 때였다.

“여기서 도망간다고 해도 살아남기는 어려울 겁니다.”

“카일!”

시안느가 반색하며 시선을 휙 돌렸다.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 카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검과 도를 꽂은 후 지혈을 위해 어깨에 감아둔 천을 풀어 꽉 조이고 있었다.

“이제야 일어났나?”

힐튼 남작은 카일을 힐끗거리곤 다시 정면에 있는 웨어 울프를 경계했다.

“그럴 리가요. 이미 한참 전에 일어나 있었습니다. 두 분에게 방해될 것 같아 잠시 누워있었을 뿐입니다.”

“그런가? 어찌 되었든 일단 두 사람을 데리고 서둘러 이곳을 떠나게. 저놈은 내 최대한 막아보겠네.”

“그 다리로 가능이나 하겠습니까?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도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만, 이곳을 떠나는 순간 우린 모두 죽을 겁니다.”

허리에 가죽띠처럼 감고 있던 활대를 풀어낸 카일이 활 한쪽 끝을 무릎으로 눌러 힘을 주기 시작했다.

“크윽.”

카일의 팔 위로 굵은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상처가 벌어지면서 간신히 멎었던 피가 흘러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헉헉.”

겨우 활시위를 거는 것에 성공한 카일은 가죽가방에서 지난번 만들어 두었던 화살 한 묶음을 꺼내어 그대로 바닥에 꽂았다.

“활도 가지고 있었나?”

“뭐… 평소에도 가지고 다닙니다.”

“단궁으로는 저놈들의 가죽을 뚫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보통의 단궁이라면 그렇겠죠.”

카일은 활시위를 몇 번 당겨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어깨의 상처가 깊어 본래의 위력을 발휘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가져온 소총을 꺼내어 사용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카일이 만든 소총은 볼트액션 소총으로, 직접 약실에 총알을 한 발 한 발 장전해 사격을 해야 하기에, 위력은 강할지 몰라도 연사속도는 화살보다 떨어졌다. 더군다나 만들어 놓은 소총탄 역시 몇 발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에는 한 지역을 장악한 두 귀족 가문의 사람들이 함께 있는 상황이었다.

절벽 위에서야 모두가 혼비백산한 틈을 타서 아무도 모르게 소총을 사용했지만,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현재 소총을 꺼내어 사용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순간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미래의 위험을 자초할 순 없었다.

“그래서 그 작은 활로 저놈을 상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저놈만 있다면 가능하겠지요.”

카일의 말에 힐튼 남작이 정면에서 기회를 노리며, 남작을 주시하고 있는 웨어 울프도 잊고 고개를 돌려 카일을 바라보았다.

“저놈만 있는 게 아니란 말인가?”

“웨어 울프는 절대 혼자 사냥하는 법이 없죠.”

피잉-

카일이 활시위를 놓자 빠르게 날아간 화살이 막 남작을 향해 뛰어오른 웨어 울프의 어깨에 박혔다.

퍽-

“캐앵!”

공중으로 뛰어올랐던 웨어 울프가 고통스런 비명과 함께 바닥에 처박혔지만 이내 일어나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이미 이 주변은 웨어 울프들이 포위를 하고 있을 겁니다. 이곳을 벗어나는 순간 놈들의 사냥감으로 전락하고 말 겁니다.”

“그럼 이곳을 살아나갈 방법이라도 있나?”

“지금으로서는 최대한 버텨보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일단 숨어 있는 놈들부터 끄집어내야겠죠.”

카일이 붉게 타오르는 이탄 덩어리를 들어 어둠 속으로 집어 던졌다.

스화악

불이 붙은 이탄이 붉은 꼬리를 만들며 유성처럼 암흑을 날아 바닥으로 떨어졌다. 불똥은 순식간에 발목까지 자란 낮은 들풀로 옮겨붙으며 바람을 따라 번졌다. 일렁이는 불길을 따라 빛무리가 주변을 밝혔다.

그 순간 붉은 불빛과 대조되는 십여 쌍의 푸른 불꽃이 일어나 불길을 피해 물러났다.

“헉, 또 있어요.”

이니엘 영애가 불꽃이 떨어진 곳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푸른 불꽃을 보며 소리쳤다.

카일이 불이 붙은 이탄 덩어리를 계속해서 어둠 속으로 던지자, 곧 주변을 포위하고 있는 웨어 울프 무리의 윤곽이 드러났다.

적어도 20마리 이상의 웨어 울프 무리가 주변을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다.

“지금 고원에 불이라도 지를 심산인가.”

힐튼 남작이 점차 거세지는 불길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나 카일은 고개를 저었다.

“염려 마십시오. 이곳은 수목이 우거진 곳이 아니라서 불씨가 번져도 큰 피해는 없을 겁니다.”

카일 바닥에 꽂아 넣은 화살을 뽑아 주변을 맴돌고 있는 웨어 울프를 겨냥했다.

핑-

불길을 따라 물러나는 웨어 울프 한 마리가 화살에 맞고 바닥을 뒹굴다, 그대로 일어나 뒤로 달아났다.

‘젠장!’

마음속으로 짧은 욕을 내뱉은 카일은 또다시 화살을 뽑아 들었다.

몸이 정상적이었다면 분명 정확하게 웨어 울프의 심장을 맞춰 죽일 수 있었겠지만, 어깨를 다치고 피를 많이 흘린 탓에 화살의 정확도나 위력이 현저히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최대한 웨어 울프에게 피해를 주어야 하기에 카일은 또다시 화살을 집어 들었다.

막 카일이 활시위를 당기려는 데 불의 장벽 속에서 한 마리의 웨어 울프가 튀어나와 곧장 카일에게 달려들었다.

“아악!”

형형히 빛나는 웨어 울프의 안광을 정면으로 마주한 이니엘 영애가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지만, 카일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활시위를 날렸다.

피잉-

화살은 일직선으로 날아가 카일을 덮쳐오는 웨어 울프의 몸에 그대로 박혔다.

“젠장! 얕았다.”

화살이 얕게 들어갔다는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카일은 웨어 울프의 품으로 파고들어 팔목에 차고 있던 단검을 뽑아 웨어 울프의 손바닥에 찔러 넣었다.

“크아아.”

카일은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는 웨어 울프를 무시하고 그대로 힘으로 단검을 밀어붙였다.

푸욱-

손바닥을 뚫은 단검이 카일의 힘에 밀려 웨어 울프의 가슴에 박혀 들었다.

“캥~.”

단말의 비명성을 토해낸 웨어 울프는 바닥에 쓰러져 몸을 부르르 떨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곧 다른 놈도 넘어올 겁니다.”

카일은 곧장 화살을 집어 들고는 연기로 가득한 고원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등 위에서 바람이 불어와 불길이 이쪽으로 향할 것 같진 않았으나, 반대로 뿌연 연기로 인해 언제 어디서 웨어 울프들이 튀어나올지 예측하기 힘들어졌다.

“크아앙~.”

그때 불길을 해치고 튀어나온 웨어 울프가 시안느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핑-

카일이 시안느의 목덜미를 노리며 이빨을 드러낸 웨어 울프를 향해 연달아 화살을 뽑아 날렸다.

퍽 퍼억

두 발의 화살이 연이어 웨어 울프의 어깨와 다리에 박혔다. 주춤거리는 웨어 울프에게 바닥을 굴러 다가간 힐튼 남작의 검이 웨어 울프의 발목을 베어냈다. 웨어 울프가 휘청이며 무릎을 꿇자 힐튼 남작은 무방비하게 드러난 웨어 울프의 가슴에 검을 박았다.

“헉, 헉~.”

거친 숨을 가다듬은 힐튼 남작은 시안느가 무사한지 확인하려는 듯, 그녀를 이리저리 살피고는 다시 고개를 들여 고원을 향해 검을 세웠다.

“마지막이에요.”

불길을 넘어오려는 웨어 울프를 향해 화살을 날리고 있던 카일에게, 이니엘 영애가 마지막 남은 화살을 바닥에서 뽑아 카일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화살을 받아든 카일이 다시 불길을 살폈다.

“우리가 빠져나갈 수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화살을 날려 보낸 카일을 보며 영애가 물었다.

“걱정 마십시오. 반드시 돌아갈 겁니다.”

확신에 찬 카일의 음성에 이니엘 영애가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그래요. 당신을 믿을게요.”

카일은 간신히 입꼬리를 올려 미소지은 뒤 힐튼 남작에게 다가갔다.

“조금 뒤에 불꽃은 꺼질 겁니다. 그 전에 이곳을 벗어나야 합니다.”

그때였다.

카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대한 웨어 울프 한 마리가 높은 둔덕 위로 올라 긴 하울링을 내 뱉었다.

“아우우우~.”

거친 쇳소리가 섞인 하울링이 공기를 울리며 사방으로 퍼져갔다.

“이런! 놈이 주변의 웨어 울프를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카일이 급히 가죽가방을 열어 필요 없는 물건은 대부분 버렸다. 그리고는 시안느에게 가방을 건넸다.

“이 정도면 충분히 메고 따라올 수 있을 겁니다.”

시안느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가방을 받아들었다.

“충분히 갈 수 있어요.”

“좋습니다. 그럼….”

카일이 활시위를 풀어 허리에 감은 후 시안느를 지나쳐 힐튼 남작 향해 등을 보였다.

“무슨… 뜻인가?”

“무슨 뜻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 날 업고 가겠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황당하다는 낯빛으로 힐튼 남작이 카일을 등을 응시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겠지만, 일단 이곳을 피하는 것이 먼저일 것 같습니다만.”

카일이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불이 꺼지고 있어요!”

초조히 주변을 살피던 이니엘 영애가 소리쳤다.

영애의 말대로 주변으로 번져가던 불꽃이 점점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웨어 울프는 어느 정도 지성을 가지고 군집 생활을 하는 몬스터입니다. 고원으로 불이 번지면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 역시 피해를 입는다는 걸 아는 놈들입니다. 그러니 불이 번지게 그냥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것도 오래 버티지는 못합니다.”

“정말 날 데려갈 생각인가? 언제 자네의 등에 칼을 박아 넣을지 모를 텐데.”

“절 죽일 생각입니까?”

카일이 고개를 돌려 힐튼 남작을 바라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건….”

남작이 당황한 듯 선뜻 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렸다. 설마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볼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남작님은 절 죽이지 못하십니다. 만약 절 죽이면 이곳에서 아무도 살아 돌아가지 못할 테니까요. 남작님부터 이니엘 영애, 그리고 여기 시안느 경까지 모두 말입니다. 무엇보다 지금이 아니면 이곳을 벗어날 기회는 없을 겁니다.”

카일의 말이 먹혀들었는지, 힐튼 남작은 묘한 눈빛으로 시안느를 쳐다보다 머뭇머뭇 카일의 등에 업혔다.

“천천히 절 따라오시면 됩니다.”

카일은 힐튼 남작을 업고 화이트 우드 숲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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