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혈전
“좌수 검이라…. 처음부터 최선을 다하지 않을 생각인가? 비록 오러를 사용하지 못한다 해도 검술에 있어서는 분명 자네보다 뛰어나다 자신을 하네만.”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니요. 남작님을 상대로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전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흠… 고작 좌수 검으로 최선을 다한다고 하다니. 그럼 곧 나머지 검도 뽑게 해주지…. 그전에….”
푹
힐튼 남작이 그대로 바닥으로 검을 꽂아 넣었다. 아직 고통스럽게 숨을 몰아쉬는 일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곧 자네에게 보내 주겠네.”
힐튼 남작이 침통한 음성으로 일칸에게 작별 인사를 고한 뒤 칼을 들어 카일에게 겨눴다.
“쉽지는 않을 겁니다.”
카일의 검이 그대로 힐튼 남작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쉬익- 쩡
힐튼 남작은 빠르게 다가오는 카일의 검을 가볍게 걷어낸 뒤, 카일을 향해 연달아 검을 휘둘렀다.
쩌엉-
힐튼 남작의 강력한 검격이 쉼 없이 날아들자 카일이 급히 공격을 막아 내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힐튼 남작은 오히려 더욱 빠르게 달려들며 카일의 머리 위로 검을 내리꽂았다.
쩌어엉 쩡-
“크윽!”
카일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힘겹게 힐튼 남작의 검을 막아 내고는 화급히 뒤로 물러났다.
예상을 벗어난 수준의 강력한 검격이었다.
설마 오러도 사용하지 않은 힐튼 남작의 검이 이렇게 강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럴 수가! 내가 힘에서 힐튼 남작에게 밀리다니….’
카일이 이곳까지 힐튼 남작을 유인해 상대하려 한 것도, 오러가 아닌 힘에서는 분명 자신이 유리할 거라 자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감은 무너졌고 카일은 밀려났다.
결국 카일은 자신이 자만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허, 이거 놀랍군! 내 검을 연속적으로 세 번이나 막아 내다니.”
힐튼 남작이 진실로 놀랐다는 듯 카일을 보며 말했다.
아무리 카일이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자신이 오러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설마 자신의 검을 막아 낼 정도라고는 설마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놀라기는 이르십니다.”
카일은 그대로 검을 쭉 뻗었다. 칼끝이 심장을 향해 쇄도했다. 힐튼 남작은 몸을 비틀어 카일의 검을 피하며, 손목을 뒤틀어 역으로 카일을 찔렀다.
순식간에 카일이 힐튼 남작의 검으로 뛰어드는 형국이 되어 버린 것이다.
키리릭
두 개의 검이 교차하는 순간 힐튼 남작의 검이 마치 뱀처럼 카일의 검을 타고 오르며 심장을 향해 쏘아졌다.
“헉~.”
카일이 급히 허리를 틀었다. 동시에 환도가 반쯤 뽑혀 나왔다. 카일은 도의 손잡이로 심장으로 다가오는 힐튼 남작의 검 끝을 쳐냈다.
챙-
힐튼 남작의 검이 위로 들려 올라가는 순간 환도가 다시 도집으로 사라졌다. 카일이 빠르게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위로 들려졌던 힐튼 남작의 검이 그대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사악-
찌이익
섬뜩한 칼바람과 함께 카일이 입고 있던 레더 아머의 가슴 부분이 길게 갈라졌다. 카일의 상처 사이로 핏물이 배어 나왔다.
“아악~.”
카일의 가슴팍이 붉게 물든 것을 본 이니엘 영애가 비명을 토해내며 고개를 돌렸다.
“흠… 오러가 사라지니 쉽지 않군.”
힐튼 남작의 말에 카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힐튼 남작의 검이 레더 아머를 갈랐지만 깊은 상처를 남기지는 못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카일은 짧지 않은 검격을 나누며 힐튼 남작의 검술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낄 수 있었다.
만약 힐튼 남작이 오러를 사용할 수 있었다면, 단 한 번의 격돌만으로도 카일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검을 나누기 시작한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카일은 다시 마음을 다잡고 힐튼 남작을 보며 검을 들어 올렸다.
“다시 가겠습니다.”
“잠깐!”
카일이 막 달려들려 하자 힐튼 남작이 손을 들어 카일을 막았다.
“그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네. 왜 갑자기 우리를 공격했나? 자네는 우리를 구해주지 않았나.”
힐튼 남작은 진심으로 궁금한 눈치였다.
“남작님께서 약속을 어기셨으니까요. 절 납치하려 하셨잖습니까.”
카일의 말에 얼굴을 굳힌 힐튼 남작은 이내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들었나 보군. 헌데 어떻게 들었지 분명 잠이 들었는데? 직접 확인도 했고….”
힐튼 남작의 말 속에는 카일이 반드시 잠들어 있었을 거란 확신이 담겨 있었다.
“남작님께서도 약을 쓰신 겁니까?”
“갑자기 자네가 달아나면 큰일이 아닌가?”
힐튼 남작이 뻔뻔히 대꾸했다.
“그렇군요.”
힐튼 남작이 쓴 약은 단순히 잠이 드는 약으로 이니엘 영애를 후작가로 안전하게 데려가기 위해 가져온 약이었다.
카일이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블랙 와이번 시카니스가 힐튼 남작과 일칸이 나눈 대화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다면, 카일과 이니엘 영애가 마파린 후작가로 잡혀가는 것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의 대화를 들었다면 내가 얼마나 자네 부자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지 알겠군. 그럼 이쯤에서 검을 거두고 우리 마파린 후작가로 오는 것이 어떤가?”
“제가 방금 일칸 경의 심장에 칼을 박아 넣었습니다만…. 남작님께서도 일칸 경에게 마지막으로 복수를 말하지 않았습니까?”
힐튼 남작이 일칸의 시체를 흘깃 내려다봤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그만한 말은 해주어야 편히 눈을 감을 것이 아닌가? 인제 와서 굳이 죽은 사람의 소원을 들어준들 일칸 경이 알기나 하겠나. 이번 일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영애를 데리고 후작가로 가는 것이 어떤가. 후작께서는 두 사람을 보면 아주 좋아하실 것이야.”
힐튼 남작이 빙그레 미소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속지 말아요. 분명 방심을 유도한 다음, 오러를 되찾는 순간 죽이려 할 거예요.”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할 수 있네.”
“이미 한번 명예를 걸고 약속을 하셨습니다만?”
“그래 분명 영애의 안전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했지. 그리고 그 약속은 반드시 지킬 것이네. 후작가로 가는 여정에서도 말이야.”
“억지 주장이군요!”
“내 말에는 하나의 거짓도 없었네.”
당당한 태도로 힐튼 남작이 말했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이만 시작 하시지요. 아무리 시간을 끌어도 지금 당장 오러가 돌아오기는 힘들 겁니다. 제가 생각한 것보다 허브차를 너무 많이 드셨습니다.”
카일의 말에 힐튼 남작이 눈을 굴리더니 씩 웃었다.
“그런가? 이거 아쉽군.”
힐튼 남작이 아래로 내렸던 검을 다시 천천히 들어 올려 카일을 겨눴다.
“아무래도 오늘 우리 두 사람 중 하나는 여기서 죽어야겠군. 아! 그리고 참고로 미리 말해 두지만, 내가 살아 돌아간다면 자네의 아비는 물론이고 샤론 마을의 사람 누구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야.”
언제 웃고 있었냐는 양 힐튼 남작이 싸늘하게 낯빛을 굳혔다. 카일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그럼 남작님을 더더욱 살려 보낼 수 없겠군요.”
“그래, 얼마든지 발악해 보게.”
“그러지요!”
카일이 힐튼 남작을 향해 달려들었다. 카일의 검이 번개처럼 힐튼 남작을 향해 쇄도했다. 카일이 빠르게 다가오자 힐튼 남작의 검이 움직였다.
땅-! 사아악-
침착하게 카일의 검을 쳐내고 다시 한번 카일의 가슴을 노리던 힐튼 남작의 검이 급히 방향을 바꾸어 아래로 향했다.
쩌엉
“헉~!”
강대한 힘을 품은 일검에 힐튼 남작이 세 걸음이나 물러났다. 카일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힐튼 남작에게 따라붙으며 힐튼 남작의 어깨를 찌르려 들었다.
따앙-
다시 한번 힐튼 남작이 카일의 검을 막았다. 이번에는 남작의 허리를 향해 날카로운 기운이 엄습해왔다. 급히 허리를 뒤틀어 공격을 피한 힐튼 남작은 이번에는 다섯 걸음이나 물러나 거리를 벌리고는 당황한 듯 카일을 노려보았다.
“휴~.”
카일은 물러나는 힐튼 남작을 바라보며 참았던 탁한 숨을 토해내고는 다시 검을 세워 힐튼 남작을 가리켰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힐튼 남작의 눈이 검을 들고 있는 왼손을 지나, 여전히 검집에 꽂혀있는 검을 잡은 오른손으로 향했다.
“그렇군! 자네는 자네 말대로 처음부터 최선을 다하고 있었군. 오해한 점은 내 사과하지.”
“별말씀을.”
힐튼 남작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더니 허리에 매어져 있던 검집을 뽑아 검집의 정중앙을 손으로 잡아 수평으로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검을 든 오른손을 어깨높이로 들어 올려 검날을 검집 위로 올린 뒤 검집과 검을 직각으로 교차시켰다.
그리고는 왼쪽 다리를 앞으로 내밀어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추었다. 언제든지 앞으로 뛰쳐나갈 수 있는 형태의 자세였다.
“자, 이제 들어와 보게! 이전과는 다를 터이니.”
심상치 않은 기색을 읽은 카일이 안면을 딱딱히 굳혔다. 이내 마음을 가다듬은 카일은 힐튼 남작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가다, 급히 방향을 휙 바꿔 왼쪽으로 돌아가며 검을 짧게 휘둘렀다.
땅-
스각
쩡-
샤아악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두 번 정도 울렸다. 물러난 힐튼 남작은 돌아서 카일을 바라보았다.
“으윽~.”
짧은 신음과 함께 카일의 어깨가 갈라지며 핏물이 베어 나왔다.
힐튼 남작은 카일의 검을 검집을 가볍게 회전시키는 것만으로 막아 냈다. 그리고는 아래에서 위로 베어오는 환도를 쳐내면서 비어있는 어깨를 베려 했다. 그러나 카일의 오른손에 실린 막강한 힘에 밀려 온전히 환도를 쳐내지 못하고 얕은 상처만 입히고 만 것이다.
“나 역시 중검을 쓰면서 힘에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 자신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자네의 검을 밀어내지 못하다니 안타깝군. 이번에는 자네의 팔 하나 정도는 잘라낼 줄 알았는데.”
힐튼 남작이 아쉬운 듯 피가 흐르는 카일의 상처를 바라보았다. 비록 상처를 입었지만, 치명적인 상처라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카일은 힐튼 남작의 말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단번에 카일의 검술을 알아보고 순식간에 그에 대한 대책까지 만들어내는 힐튼 남작의 모습이 놀라웠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자네가 먼저 공격을 했으니, 이번에는 내가 먼저 가겠네.”
힐튼 남작이 또다시 검집과 검을 수직으로 교차시키더니 마치 포탄이 쏘아져 나가듯 카일에게 다가왔다.
쩌엉
달려드는 힐튼 남작의 검을 급히 뽑아 든 환도로 막아 내는 순간, 힐튼 남작의 왼손에 들려있던 검집이 가슴으로 밀려 들어왔다.
땅-
카일이 다급히 힐튼 남작의 검집을 검으로 막아냈다. 동시에 화끈한 통증이 오른쪽 허벅지에서 올라왔다.
피한다고는 했지만 이미 힐튼 남작의 검은 허벅지를 길게 가르고 있었다.
퍽-
허벅지에 상처를 입은 카일이 순간적으로 휘청거렸다. 힐튼 남작은 그대로 어깨를 이용해 카일의 가슴을 강하게 쳤다. 카일의 몸이 붕 떠올라 뒤로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커억~.”
서둘러 일어나려던 카일이 고개를 숙여 피를 토해냈다.
“어떤가. 이제 자네가 누구에게 검을 들이밀었는지 알겠나?”
힐튼 남작이 진심으로 즐겁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후하!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 숙여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낸 카일이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깨에서부터 가슴과 양 허벅지에 이르기까지, 온몸을 피로 물들인 카일의 모습은 결코 정상적인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 몸으로 아직도 날 상대하겠다는 말인가?”
“아직은 검을 들어 올릴 수 있고 달릴 수 있습니다. 남작님을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단 소리죠.”
힐튼 남작이 어처구니없다는 말투로 빈정거렸다.
“네 검술이 정말 뛰어나 지금까지 살아 있다 생각한 것이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마도 허브차의 비밀을 알고 싶어 손속에 사정을 두었겠지요.”
정확히 속내를 파악한 카일의 말에 힐튼 남작이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카일의 짐작대로 힐튼 남작이 급소가 아닌 어깨와 다리를 집중적으로 공격한 이유는 바로 허브차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하여 일단 어디 한 군데를 잘라 도망가지 못하게 막으려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도 계속 공격하겠다는 말이냐?”
“허브차의 비밀을 털어놓는 순간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어차피 칼에는 눈이 없는 법. 마지막에 살아있는 자가 진정한 강자가 아니겠습니까?”
“결국 승리한 자가 강자다! 그래, 자네 말이 옳군. 그럼 어디 다시 발악을 해보게.”
힐튼 남작이 또다시 포탄처럼 카일에게 쏘아져 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카일도 가만히 서 있지 않고 곧장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쉬익-
힐튼 남작의 검이 간발의 차이로 카일이 입은 레더 아머에 가느다란 흠집을 만들며 스쳐 지나갔다.
힐튼 남작은 곧장 오른발을 강하게 내디뎌 방향을 바꿔 카일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그 순간 카일이 갑자기 몸을 틀어 힐튼 남작을 향해 검을 내려그었다.
힐튼 남작이 방향을 전환하는 순간을 노리고 검을 날린 것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공격이었으나, 힐튼 남작은 머뭇거리지 않고 검을 들어 방어했다.
쩌저정
힐튼 남작이 주춤주춤 세 발자국이나 물러났다. 자세가 무너진 상태에서 강력한 검격을 흘려내는 일은 힐튼 남작으로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쉬이익
쩡 쩌엉-
연이어 카일의 검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힐튼 남작의 손에 들린 검집이 회전하며 카일의 검과 도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샤악- 푹
쉴새 없이 이어지는 공격을 뚫은 힐튼 남작의 검이 카일의 어깨를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