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이트 우드 숲 2
카일이 하는 행동을 유심히 보고 있던 일칸이 카일의 옆으로 다가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무거운 무쇠솥을 지금까지 가지고 다니는 것도 놀랍지만, 갑자기 화이트 우드의 수액을 끓이는 것도 괴상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시겠지만 이곳은 밤이 되면 기온이 많이 내려갑니다. 자기 전 허브차라도 마시면 몸이 금방 따듯해질 겁니다.”
수액이 끓어오르자 카일은 솥 안으로 주변에서 따온 보라색 빛깔의 생 허브를 솥 안으로 던져 넣었다.
“이곳에 올 때 먹었던 허브차인가 보군요.”
어느새 카일의 옆으로 다가온 시안느가 아는 척하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때와 같은 차입니다. 몸에 체온을 올려주고 피로를 풀어주지요. 특히 여기 화이트 우드의 수액과 섞어 마시면 효과가 극대화됩니다. 아마도 내일이면 조금 더 편안한 몸 상태로 걸어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런가요. 기대되네요.”
화력이 좋은 이탄이라 그런지 허브를 넣은 수액은 솥 안에서 금방 끓어오르며 보라색으로 변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차츰 보라색이 사라지고 황금빛의 맑은 액체로 변하더니, 향긋한 향이 풍겨오기 시작했다.
“색이 황금빛으로 변했어요.”
“수액에 넣어 끓이면 이렇게 색과 맛이 기존의 허브차와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아마도 수액에 들어있는 어떤 성분과 결합이 되면서 맛과 성분이 변한 것 같습니다.”
“몸에 좋지 않은 것은 아닌가? 간혹 두 가지 이상의 약초나 허브가 섞이면 독이 되는 경우가 있다 들었는데.”
잠시 카일의 행동을 미심쩍게 바라보던 힐튼 남작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곳에 오면 아버지와 함께 꼭 마시던 차입니다. 어떤 원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 피로를 풀어주고, 체온을 올려주는 효과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가?”
카일의 설명에도 의심이 풀리지 않았는지, 힐튼 남작은 여전히 의문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카일은 개의치 않고 가죽가방 안에서 옹기로 만든 작은 찻잔을 꺼냈다.
그리고는 바닥에 다섯 개의 잔을 나란히 내려놓은 뒤 허브차를 따라, 힐튼 남작과 일칸 그리고 이니엘 영애와 시안느에게 차례로 건넸다.
“흠….”
일칸과 힐튼 남작이 찻잔을 손에 들고 난감한 듯 바라봤다.
분명 카일의 행동에는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선뜻 허브차를 마시기에는 아직 카일에 대한 믿음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섣불리 물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카일과 보일을 후작가로 끌어들이려 하는 힐튼 남작이나 일칸으로서는 호의로 건넨 허브차 한 잔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은, 자칫 카일에게 반감을 사게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은 의외로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이니엘 영애가 가장 먼저 찻잔을 들고 뜨거운 김을 호호 불며 허브차를 조심스럽게 마시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차 맛이 정말 좋군요.”
이니엘 영애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을 본 시안느도 영애를 따라 찻물을 마시더니,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래요 아가씨. 심지어 지난번에 마셨던 차보다 더 향이 부드럽고 맛있는 것 같아요.”
“화이트 우드의 수액 덕분입니다. 차의 맛을 결정하는 대에는 사용하는 물도 큰 역할을 차지하지요.”
“저도 처음 차에 대해 배우며 들은 적이 있어요.”
카일의 말에 이니엘 영애가 맞장구를 쳤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일칸도 찻잔을 입가에 대고 기울이려 했으나, 힐튼 남작이 그를 막더니 먼저 차를 맛보기 시작했다.
“허허, 정말이군! 이렇게 맛이 좋은 차는 처음이야.”
꿀꺽이며 차를 삼킨 힐튼 남작이 차 맛에 탄성을 터트리더니, 지그시 눈을 감고 다시 한번 차를 음미하기 시작했다.
그가 일칸을 막고 먼저 차를 마신 이유는 최상급에 근접한 상급 엑스퍼트인 자신이 이상 유무를 파악하기 더 쉬웠던 탓이었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면 몸 안에 독이 들어온다 해도 오러가 몸 안에서 강한 저항을 하기에 독의 유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일칸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때문에 순순히 찻잔을 내려놓은 것이다. 다행히 염려와 달리 힐튼 남작이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렸다. 안심한 일칸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오!”
일칸 역시 차 맛을 보더니 크게 놀라며 입맛을 다셨다.
“이렇게 향기롭고 맛있는 차는 처음이야. 이 정도의 맛과 향이라면 아마도 고가에 거래가 될 것 같군.”
힐튼 남작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왕족이나 귀족에게 차는 기호 식품인 동시에 사치품이었다. 좋은 차는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도 몇 배는 비싸게 거래됐다. 그러나 귀족들은 자신들의 고귀한 신분을 더욱 빛내기 위해 고급 차를 사는 데 골드 쓰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지금 마시는 허브차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독특한 맛과 향을 가지고 있는 만큼 충분히 비싼 값에 거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쉽지만 이 허브차는 이곳에서밖에는 먹을 수가 없습니다.”
“비록 오크 랜드에서만 나오는 차지만, 적은 수량이라도 꾸준히 채취를 한다면 분명 큰돈을 벌어들일 수 있을 것이네. 더군다나 찻잎은 부피도 많이 차지하지 않아 마음만 먹는다면 제법 많은 양을 채취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물론 허브를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곳 고원에 지천으로 자라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허브 잎은 말리거나 볶는 순간 향과 맛이 모두 날아가 버립니다.”
“생 허브로만 이 맛과 향이 난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이 화이트 우드의 수액도 필요하지요.”
“음….”
“그래도 시도를 해보긴 했습니다. 몇 번 허브를 뿌리까지 파서 마을에 심어보기도 하고, 씨앗을 구해 뿌려보기도 했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아마도 이곳 고원지대를 벗어나면 살기 힘든 것 같습니다.”
카일의 말에 힐튼 남작이 아쉬운 듯 찻잔을 바라보았다.
카일이 끓여 놓은 마지막 허브차였다.
힐튼 남작과 일칸 두 사람 모두 벌써 세 번째 마시는 허브 차였다.
“허허… 이거 미안하게 되었군. 끓여 놓은 차를 우리가 다 마셔 버리니 말이야.”
“아닙니다. 처음부터 두 분을 위해 끓인 허브 차였습니다. 오히려 두 분이 다 마셔서 다행입니다.”
“지금 우릴 위해 끓인 차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자 힐튼 남작과 일칸의 낯빛이 심상찮게 변했다. 그리고….
푹-
날카롭고 차가운 칼날이 번득였다. 잘 벼려진 칼은 너무도 쉽게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커억~.”
일칸의 얼굴이 순식간에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쉬이익-
“허억.”
검을 꽂아 넣은 장본인, 카일이 몸을 뒤로 휙 젖히며 힐튼 남작 검을 피한 뒤 그대로 바닥을 굴러 남작으로부터 멀어졌다.
“일칸!”
힐튼 남작이 급히 다가가 바닥에 검을 꽂은 후 쓰러져 피를 토해내고 있는 일칸을 끌어안았다.
“크르륵.”
옆구리를 뚫고 들어온 단검이 정확히 심장을 찔렀는지 일칸은 입에서 끊임없이 피거품을 토해내고 있었다. 당장 상급 포션을 쏟아붓는다고 해도 살아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가만히 일칸의 상태를 확인한 힐튼 남작이 안광을 형형히 빛내며 카일에게 싸늘히 물었다.
“나한테 무슨 장난을 친 것이지?”
카일은 힐튼 남작의 말에 아무 말 없이 깨어져 버린 찻잔을 향해 눈을 돌렸다.
“지금 이 허브차에 독이 들어있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카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나 힐튼 남작은 차에 독이 들어있었던 게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힐튼 남작이 가쁜 숨을 몰아쉬는 일칸을 바닥에 내려놓고 검을 잡고 천천히 일어나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분명 몸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보다 피로감도 줄어들었고 머리도 맑아진 느낌이었다.
독에 당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팔다리가 가볍게만 느껴졌다. 그렇다고 몸이 정상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게다가 경험 많은 중급 엑스퍼트 기사인 일칸을 단 한 번의 기습으로 회생할 수 없는 치명상을 입혔다.
뿐만 아니라 내상을 입었지만, 최상급에 근접한 상급 엑스퍼트인 힐튼 남작이 기습적으로 날린 검까지 이제 막 중급 엑스퍼트에 올랐을 카일이 피해낸 것이다.
그것도 아무런 부상도 입지 않고 말이다.
아무리 카일의 실력이 출중하다고 해도 남작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런저런 상황을 종합해 본 힐튼 남작은 자신의 몸 상태가 절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판단을 내린 것이다.
무엇보다 힐튼 남작을 더욱 경악스럽게 한 것은, 바로 최상급에 근접한 엑스퍼트를 아무런 전조 증상도 없이 중독시킬 수 있는 독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결코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그 독이 누군가의 손에 들어간다면, 특히 적이라 할 수 있는 그린넨 백작가의 손에 들어간다면, 마파린 후작가가 큰 피해를 당하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러나 힐튼 남작의 우려와 달리 카일은 담담하게 시안느와 이니엘 영애를 가리켰다.
“앞서보신 것처럼 이니엘 영애는 물론이고 저도 차를 마셨습니다. 독을 사용했다면 모두가 이렇게 멀쩡하게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어느새 시안느는 이니엘 영애의 앞을 막아선 채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더군다나 엑스퍼트에 오르는 순간 독에 어느 정도 면역이 생긴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힐튼 남작님은 최상급에 가까운 엑스퍼트이니 중독을 시킨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럼 독이 아니란 말이냐?”
“독은커녕 치료제라 부르는 게 더 정확할 겁니다.”
“치료제?”
카일의 말에 힐튼 남작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이 허브차는 피로를 풀어주고 피를 맑게 해주는 작용을 합니다. 부작용이라면 한번 잠이 들 시 깊은 잠에 빠져 몇 시간 동안 일어나지 못한다는 단점이죠. 그러나 효과는 확실합니다.”
“그럼 단순히 허브가 문제가 아니란 소리군.”
그들이 마셨던 차에는 정체불명의 허브와 화이트 우드의 수액만이 들어갔다. 허브가 원인이 아니었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였다. 힐튼 남작이 주변에 자라고 있는 화이트 우드를 노려보며 말했다.
“굳이 이곳으로 온 이유가 있었군.”
“그렇습니다. 애초부터 이곳을 통해 샤론 마을로 돌아가는 길은 없습니다. 이 숲의 끝에는 깎아지른 절벽이 있을 뿐입니다. 남작님을 이곳으로 모신 것은 바로 화이트 우드의 수액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
힐튼 남작이 야차와 같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러나 카일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착각하시는 것 같아 미리 말씀드리는 건데, 화이트 우드의 수액에도 독은 없습니다. 오히려 피로를 풀어주는 효과가 있지요. 다만 허브와 수액이 만나면 조금 특별한 효과가 생깁니다.”
“특별한 효과?”
“그렇습니다. 불안정한 마나나 오러를 안정시켜주고 내상을 낫게 해주지만 일시적으로 마나, 즉 오러를 사용할 수가 없게 됩니다. 물론 치료제의 특성상 약효는 확실합니다. 굳이 단점을 꼽자면 몇 가지 생 허브를 섞어, 갓 채취한 화이트 우드의 수액에 끓여야만 이러한 효력이 발생한다는 점이겠군요.”
카일의 말에 힐튼 남작은 내심 깜짝 놀라고 있었다. 내상을 치료하는 일은 마법은 물론이고 상급 포션이나 사제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포션이나 마법은 내상보다는 외상에 특화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내상을 입어 불안정해진 오러나 마나를 치료하는 방법은,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치료되길 기대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카일의 말에는 단순히 허브차의 효능에 관한 정보가 담겨 있는 게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허브차를 만드는데 필요한 허브가 한 가지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결국 허브차를 만들 수 있는 정확한 재료를 아는 사람은 카일이나 보일밖에는 없었고 이곳의 지형이나 지리를 아는 사람 역시 두 사람밖에는 없었다.
“으음.”
미간을 찌푸린 힐튼 남작이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카일을 응시했다.
힐튼 남작은 일칸이 공격받은 이후로 계속 오러를 끌어올리려 했지만, 여전히 한 줌의 오러도 끌어올릴 수 없었다.
“그렇다는 말은 너 또한 오러를 끌어 올릴 수 없다는 말이겠군. 분명 너도 차를 마셨으니 말이야.”
“당연하죠. 저나 영애께서 마시지 않았다면 분명 남작님도 차를 마시지 않았을 테니까요.”
카일의 말에 힐튼 남작이 고개를 돌려 시안느와 이니엘 영애를 바라보았다. 그녀들도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지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인제 보니 저들도 자네의 계획에 대해 알지 못했나 보군.”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란 말이 있지요.”
카일의 말에 남작이 잠시 아무 말 없이 카일을 노려보았다.
“시간을 끄셔도 당분간 오러는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정말 내가 오러를 끌어올리지 못할 거라 생각하나? 난 최상급에 근접한 엑스퍼트라는 걸 잊지 말게!”
“상급 엑스퍼트에 오른 아버지도 이 차를 마신 뒤 오러를 사용하지 못하셨습니다. 내상까지 입으신 남작님께서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허브차는 내상을 치료하는 데는 특효약입니다.”
“그런가? 그럼 시간이 지나면 내상의 치료와 함께 오러가 안정적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말이군.”
“내상의 정도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그렇습니다. 다만 그전에 남작님을 일칸 경 곁으로 보내 드려야겠지요.”
스르릉
카일이 왼손으로 검을 뽑아 들어 힐튼 남작을 겨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