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이트 우드 숲 1
어슴푸레한 새벽녘이 되어서야 일어난 카일은 잠든 힐튼 남작과 일칸을 대신해, 꺼진 모닥불을 살리고 언덕 위에 올라 사위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이곳은 이미 오크 때가 휩쓸고 지나간 뒤라 일대는 조용하기만 했다.
“일찍 일어났군.”
“나오셨습니까?”
힐튼 남작이 카일의 인사를 받으며 옆으로 다가섰다.
“뭘 보고 있었나?”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한동안 이곳에는 오지 못할 것 같아서요.”
카일의 말에 힐튼 남작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큰일이 있었으니 한동안은 쉬어야겠지….”
“아, 그런 것이 아니라 당분간 오크들 간 영역 다툼으로 고원 일대가 혼란에 빠질 겁니다. 때문에 한동안 이곳에 올 수 없어 그런 겁니다.”
“음… 그런가?”
그때서야 힐튼 남작이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 출발할 생각인가? 아무래도 일찍 출발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곧 내려가겠습니다.”
그 말을 뒤로하고 힐튼 남작은 천천히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그 모습을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던 카일이 다시 황량한 고원을 한동안 바라보다 언덕을 내려왔다.
언덕 아래로 내려오자 이미 일칸과 힐튼 남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차피 가지고 있던 물건도 없다 보니 주변만 정리하고 카일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본다는 것이 늦었습니다. 그만 출발하겠습니다.”
선두에 선 것은 카일이었다. 길 안내를 위해서였다. 힐튼 남작과 일칸은 뒤를 따라 발걸음을 바삐 놀렸다.
끝없이 이어지는 구릉을 따라 한참을 걸었지만 비슷한 지형만 계속해서 이어지자, 힐튼 남작과 일칸이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 언덕의 크기도 다르고 평원이나 잡목의 군락지도 조금씩 달랐지만, 반나절 동안 비슷한 지형만 이어지고 있었다. 카일이란 능숙한 길잡이가 없었다면 제대로 길을 찾기가 어려워 보였다.
“허허. 이렇게 비슷한 곳이 이어진다면 길을 찾기가 정말 난감하긴 하겠군.”
“그러게 말입니다. 자세히 보면 언덕의 크기도 다르고 잡목의 군락지도 차이를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특색이 없는 비슷한 지형이 연속되다 보니 길을 찾기가 여간 곤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게 말이야.”
힐튼 남작이 앞서가는 카일의 등을 바라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니엘 영애가 있는 곳은 아직 멀었나?”
참다못한 일칸이 앞서가는 카일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닙니다. 이제 다 왔습니다. 다만 이제부터 조심해야 합니다. 이곳부터는 웨어 울프의 영역입니다.”
“웨어 울프? 설마 자네가 끌고 온 웨어 울프들 말인가?”
“그렇습니다. 비록 거리가 떨어져 있더라도 후각이 뛰어난 놈들이라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놈들에게 들킬 수가 있어 잠시 북쪽으로 돌아왔습니다.”
카일의 말에 힐튼 남작의 마음에 남아 있던 일말의 의심이 사라졌다.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대는 카일의 모습에 약간의 의구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후각이 발달한 웨어 울프를 피하기 위해 바람의 방향에 따라 이동 방향을 결정했다면 힐튼 남작으로서도 납득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굽이굽이 꺾어가며 이동하기를 한참, 카일 일행은 드디어 이니엘 영애가 숨어 있는 동굴에 당도했다.
“다 왔습니다. 이곳입니다.”
카일의 말에 힐튼 남작과 일칸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보았다.
“이곳에 영애가 숨어 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잠시만 이곳에 계십시오.”
카일이 앞에 있는 검은 돌을 들어 올리자 작은 굴의 입구가 드러났다.
“하, 이곳에 굴이 있었다니.”
“웨어 울프를 감시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굴입니다. 잠시 들어가서 영애를 데리고 나오겠습니다.”
카일의 말에 힐튼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게.”
힐튼 남작의 허락이 떨어지자 카일이 몸을 구부려 굴 안으로 사라졌다.
“남작님. 혹 이곳에 다른 통로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걱정 말게! 만약 우리를 따돌리려고 했다면 아예 처음부터 이곳으로 데려오지도 않았을 것이네.”
“하지만….”
그때 작은 굴을 통해 누군가 밖으로 빠져나왔다.
“흐음… 영애의 호위기사인가?”
굴 밖으로 빠져나온 사람은 시안느였다.
“그린넨 백작가의 시안느라고 합니다.”
잔뜩 긴장한 얼굴로 밖으로 빠져나온 시안느가 힐튼 남작과 일칸을 바라보며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걱정하지 말아라. 영애의 안전은 보장할 터이니.”
힐튼 남작의 말에 시안느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굴 밖으로 이니엘 영애와 카일이 차례로 빠져나왔다.
“오랜만이군.”
힐튼 남작이 먼저 이니엘 영애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크 랜드에 들어 온 지 20여 일 만에, 쫓기던 이니엘 영애와 추적을 하던 힐튼 남작이 만나는 순간이었다.
“오랜만에 뵈어요. 힐튼 남작님”
이니엘 영애도 방긋 웃으며 말했다.
“내 명예를 걸고 그대의 안전은 책임질 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남작님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이니엘 영애가 감사의 인사를 전하자 힐튼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최대한 조심해서 따라와 주십시오.”
카일이 선두에서 길을 잡고 이니엘 영애와 시안느가 자연스럽게 카일의 뒤에서 따라붙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힐튼 남작과 일칸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뒤를 따랐다.
* * *
이니엘 영애까지 합류한 카일 일행은 해가 서서히 저물어 가는 저녁이 되어서야 한 장소에 도착했다. 그곳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던 고원의 풍경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고만고만한 잡목과 덤불이 이어지던 지대와 달리 사람 키만 한 나무가 빽빽하게 자라고 있었다.
“이곳에 이런 숲이 존재할 줄은 예상치 못했는데.”
카일의 옆으로 다가온 힐튼 남작이 숲을 둘러보며 말했다.
“고원의 아래로 내려오다 보면 이렇게 낮은 나무들이 자라기도 합니다. 이 숲 안쪽으로는 제법 넓은 습지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덕분에 화이트 우드가 이렇게 군락을 이루며 자랄 수 있답니다.”
카일의 말에 힐튼 남작이 미간을 좁히고 숲 안쪽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뿌리는 물론이고 가지와 몸통까지 온통 순백색인 나무 아래로, 두꺼운 이끼층이 형성되어 있고 그 위로 촉촉하게 물기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지대가 높은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넓은 습지가 있을 줄이야. 정말 놀랍군.”
힐튼 남작이 화이트 우드 숲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있을 때, 카일은 일행을 데리고 숲 가장자리에 자라고 있는 제법 오래된 고목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거대하진 않고 사람 키만 한 나무들이 모인 장소였으나 빽빽하게 자란 수림과 무성하게 자란 가지로 인해, 차가운 바람을 막아주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카일은 한편에 가방을 내려놓고 숲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천천히 숲 밖으로 걸어 나왔다.
“굴 안에서 피우던 게 바로 이거였군요.”
카일은 검은 벽돌같이 생긴 물건을 한 아름 안고 있었는데, 그 물건을 알아본 이니엘 영애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탄이란 겁니다. 이끼가 수십 수백 년 동안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습지 안쪽에 두껍게 층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걸 적당한 크기로 파내서 습기를 말리면, 나무를 대신해 불을 피울 수 있습니다. 나무보다 오래 타고 화력도 좋습니다.”
“신기하군요. 이런 것도 보일 대장에게 배운 건가요?”
“…그렇죠.”
카일은 이니엘 영애의 질문을 대충 얼버무리곤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사실 이탄은 이곳 습지를 둘러보던 중, 두껍게 층을 이루고 있는 이끼(이탄)층을 발견하고 전생의 기억을 토대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원 위에는 굵은 나무가 많이 자라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이탄을 미리 파놓고 말려 사용하게 된 것이다.
물론 습지 주변에 화이트 우드가 자라고 있긴 했으나, 화이트 우드는 기본적으로 습기가 많은 나무였다. 때문에 아무리 잘 말려 불을 피우더라도 매운 연기가 날 뿐 불을 피우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물이 다 떨어져 가는데 여기서 채워 가면 되겠군요.”
불을 피우고 있는 카일을 보던 시안느가 나무 수통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일칸 역시 수통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힐튼 남작과 일칸도 그동안 오크들에게 쫓기다 보니 제대로 물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카일이 가지고 있던 물을 나누어 마시며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이곳 습지의 물은 먹을 수 없는 물입니다.”
막 이탄 위로 불길이 피어오르는 걸 확인한 카일이 자리에서 일어나 시안느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네? 왜요?”
“보기에는 깨끗해 보이지만, 습지 안은 오랫동안 썩은 동식물들이 쌓이고 쌓인 곳입니다. 마실만 한 물은 아닙니다.”
카일의 설명에 엉거주춤 선 채 눈치를 살피던 일칸이 도로 자리에 슬며시 앉았다.
“그럼 물을 구할 수 없단 소리군요.”
“아닙니다. 잠시만 계시지요.”
카일은 수통을 들어 화이트 우드로 다가간 다음 단도를 꺼내 사선으로 길고 깊은 흠집을 만들었다. 그러자 흠집을 따라 뿌연 수액들이 스며 나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카일은 사선의 가장 아래쪽에 수통을 묶어, 수액이 자연스럽게 수통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이 화이트 우드의 수액은 깨끗하니 안심하고 마셔도 됩니다. 게다가 피로를 풀어주는 효능도 있지요.”
“이런 방법이 있었군.”
카일의 행동을 눈여겨보던 일칸이 적당한 화이트 우드를 찾아 나무에 흠집을 내고 수액을 받기 시작했다. 화이트 우드는 습지에서 자라는 나무라 그런지 생각보다 흘러내리는 수액의 양이 많았다. 수통이 꽉 차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통이 어느 정도 차오르자 카일은 가장 먼저 수액을 들이켰다.
이른 아침부터 선두에서 길을 찾아 걸어가느라 상당히 지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목이 상당히 말랐나 보군요.”
카일이 단숨에 가득 찬 수통을 비우자 시안느가 옆으로 다가와 카일에게 말했다.
“길을 찾느라 물을 제대로 마시지 못했거든요.”
“가장 앞서 길을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수통을 넘겨받은 시안느는 수액을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아~.”
수액을 한 모금 들이킨 시안느가 작은 탄성을 지르며 연신 수액을 들이켰다.
“이렇게 맛있는 물은 처음이에요. 약간 달콤하면서 은은한 나무 향과 약간의 흙냄새까지…. 어서 아가씨께 가져다드려야겠어요.”
시안느가 미소를 지으며 수액을 가지고 이니엘 영애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일은 몸을 돌렸다. 뒤돈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일칸과 힐튼 남작 역시 수통에 차오른 수액을 연신 들이키는 장면이었다.
* * *
날이 완전히 저물고 어둠이 밀려오자 일행은 대충 육포로 저녁을 해결한 뒤, 적당한 곳에 마른풀과 덤불을 깔고 잠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때 카일이 가방 안에서 작은 솥을 꺼내 주변에 있는 돌을 쌓아 만든 화덕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수통 안에 미리 받아 놓았던 화이트 우드의 수액을 솥 안에 쏟아부었다.
치이익-
이탄의 강력한 화력 덕분인지 금방 달궈진 솥 안에서 뿌연 수증기가 몽글몽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지금 뭘 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