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58화 (58/404)

58.조우 2

“이 이야기는 이쯤하고, 이제 자네도 말해 보게.”

“무슨….”

시치미를 뗐으나 카일의 눈동자는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힐튼 남작이 가소롭다는 것 같이 코웃음 쳤다.

“자네, 우릴 일부러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 아닌가? 정확히는 이니엘 영애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겠지.”

“눈치채고 계셨습니까?”

“한동안 이 주변을 맴돌고 있었는데 모를 수가 있나.”

“…언제부터 아신 겁니까?”

“자네가 세 번이나 같은 곳을 돌고 있을 때 알게 되었지.”

“그런데도 저를 따라오셨습니까?”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이 없으니까.”

힐튼 남작을 대신해 일칸이 말했다. 일칸 역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제가 좀 안일했습니다. 설마 눈치채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자네가 오크 랜드의 지형에 익숙하다고는 해도, 우리 또한 수많은 경험을 쌓은 기사라는 사실을 잊지 말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곳으로 오는 동안 두 분을 속인 점, 사과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카일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 후 말을 이었다.

“먼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미 짐작하시겠지만, 영애께서는 더 이상 와이번의 알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네. 지난 전투에서 제국의 와이번 나이트가 상자를 가지고 가는 것을 보았으니까.”

“보셨다니 말이 빠르겠네요. 제가 바라는 것은 단지 영애께서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영애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허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두 분을 무사히 샤론 마을까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둘의 대화에 일칸이 툭 끼어들었다.

“이미 오크 무리에서 벗어난 이상 우리만으로 충분히 샤론 마을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카일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모습이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일칸이 표정을 굳혔다.

“무슨 말이지?”

“고원의 지형은 대부분이 비슷합니다. 짧은 풀이 자라는 초원과 언덕, 그리고 잡목지대가 여러 곳에 군락을 이루고 있지요.”

“자네 말은….”

“분명 이 주변을 세 번 이상 맴돈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그전에 제가 왜 이 주변을 세 번이나 맴돌았을까요? 두 분이 알아볼 정도로 표시 나게 말입니다.”

“우리가 눈치챌 걸 알고 있었다?”

“알아채길 바랐다는 말이 정확할 겁니다.”

카일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왜 그런…?”

일칸이 당황스런 얼굴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같은 곳을 세 번이나 은밀하게 맴돌면서 정작 두 사람이 눈치채길 바랐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제가 이 주변을 반복해서 돌다 보니, 두 분께서는 이 주변 지형을 면밀하게 살피셨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카일의 말대로 두 사람은 이 주변 지형을 면밀히 살피고 혹 있을지 모를 일에 대비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사실 이 주변을 맴돈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이동했는지가 중요하지요. 혹 이곳을 벗어나 오크 때를 만난 장소로 찾아갈수 있겠습니까?”

일칸과 힐튼 남작의 얼굴에서 표정이 완전히 사라졌다.

카일의 뒤를 쫓아 다급하게 오크무리를 벗어났을 뿐 아니라, 주변을 반복해서 돌다 보니 정작 되돌아갈 길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힐튼 남작이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원하는 것이 뭔가?”

“앞서 말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원하는 건 영애를 데리고 이곳을 탈 없이 빠져나가는 것뿐이라고요. 두 분 역시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영애의 안전만 보장해 주면 된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두 분께서 영애의 안전을 약속해 주십시오.”

“우리는 오늘 처음 만난 사이라네. 우리의 무엇을 믿고 약속만으로 영애의 안전을 확신하는가? 영애를 만난 이후 생각이 바뀔 수도 있지 않은가?”

“제가 믿는 건 남작님의 명예입니다. 최상급 엑스퍼트를 목전에 둔 기사로서의 명예를 믿어 보겠습니다.”

명예를 들먹이는 카일의 말에 힐튼 남작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예라…. 어차피 우리의 목적은 와이번의 알이었지 영애가 아니었으니, 자네의 말대로 하겠네. 영애의 안전을 내 명예를 걸고 보장하지.”

“나 또한 영애에게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않겠네!”

힐튼 남작과 일칸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우릴 구해주었으니 그만한 요구는 당연하게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아! 그러고 보니 이니엘 영애는 지금 어디에 있나? 제국의 공격을 받았다면 영애의 일행들도 제법 피해를 입었을 텐데.”

“그렇습니다. 용병으로 따라온 보틀러가 제국의 첩자였습니다. 그 자가 주안 기사단장을 죽이고 제국의 와이번 나이트를 불러들였습니다.”

카일은 그동안 벌어졌던 일들을 짧게 간추려 알렸다. 어차피 이니엘 영애와 합류해 돌아가려면 알게 될 사실들이었다.

“제국의 첩자! 설마 용병으로 있던 자가 검은 여우였단 말인가?”

“제국 와이번 나이트와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보틀러가 검은 여우를 이끌고 이번 일을 주도했다고 들었습니다. 아마도 마파린 후작가에서 와이번의 알에 대해 알게 되면서 처음 계획에 차질이 벌어졌을 겁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

힐튼 남작의 낯빛이 어두침침해졌다.

“두 가문 분쟁 때문에 귀한 화이트 와이번의 알이 적국인 제국에 빼앗겼으니, 안타까운 일이야!”

침통한 힐튼 남작의 목소리에 카일은 그저 아무 말도 없이 타오르는 모닥불만 바라보았다. 힐튼 남작은 이번 일을 두 가문의 분쟁 때문이라 말했지만, 사실상 백작 가문의 물건을 마파린 후작가에서 탈취하려 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후작가의 잘못이 더 크다 할 수 있었다.

물론 카일로서는 후작가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후작가와 백작가 모두 이번 일에 큰 피해를 입었을 뿐 와이번 알의 주인공이 된 건 정작 카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 영애는 어디에 있나? 호위기사가 있다 해도 오크 랜드에서 영애를 보호하기는 힘들 것인데… 더군다나 주안 기사단장까지 없지 않나?”

“영애께서는 안전한 곳에 계십니다. 내일이면 만나보실 수 있을 겁니다.”

“안전한 곳에 있다니 다행이군.”

힐튼 남작이 안도의 기류를 흘렀다.

* * *

날이 저물고 밤이 깊어 갔지만 힐튼 남작과 일칸은 제대로 잠에 들지 못했다. 지난 며칠 동안 오크 무리에게 쫓기면서 생긴 긴장감과 피로감이 오히려 잠들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었다.

“남작님! 정말 카일과의 약속을 지키실 생각입니까?”

일칸이 잠들어 있는 카일을 바라보며 물었다.

“내 명예를 걸고 한 약속이니 분명 약속은 지켜야겠지.”

“하지만 주군께서 와이번 알과 함께 영애까지 영지로 데려오라 하지 않았습니까?”

“분명 주군께서는 백작가의 영애까지 데려오라 하셨지. 헌데 말이야 우리가 언제 영애를 데려가지 않는다는 약속을 했던가?”

“무슨 말씀입니까? 분명 영애의 안전을 책임지신다고….”

“영애의 안전은 내 명예를 걸고 책임질 것이네. 후작가에 가서도 말이야.”

“아!”

일칸의 낯빛이 확연히 밝아졌다. 와이번의 알을 추적하던 대부분의 기사들을 잃은 일칸으로서는 백작 영애만이라도 후작가로 데려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럼 저 아이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목숨을 걸고 오크 무리에서 우리를 구해주었으니 그만한 보답은 해 주어야겠지. 더군다나 저 아이를 다치게 했다가는 우리도 무사히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야.”

“예? 무슨 말씀인지?”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도 문제지만, 저 아이의 신상에 문제가 생긴다면 보일 대장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네.”

일칸은 힐튼 남작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보일은 최상급에 근접한 힐튼 남작의 검을 무난히 받아 낼 정도로 뛰어난 상급 엑스퍼트의 실력자였다. 힐튼 남작이 온전한 실력을 갖추고 있어도 쉽게 제압할 수 없는 강자라는 말이었다.

무엇보다 지금 힐튼 남작은 후안 백작으로 인해 심각한 내상을 입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오크 무리를 돌파하느라 당분간 오러를 온전히 사용하기 힘들었다.

만약 보일과 충돌이라도 일어난다면 힐튼 남작이 보일을 상대하기엔 무리가 따랐다.

“아! 보일 대장을 잊고 있었습니다. 허나 아무리 보일이라도 설마 남작님을 공격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이곳은 오크 랜드입니다. 보일 대장이 알 수가 없는 곳입니다.”

“오크 랜드를 가장 잘 아는 저 아이가 돌아오지 못한 상황에서 영애를 데리고 간다면, 보일 경이 순순히 받아들일까?”

“그것은… 하지만 우릴 공격한다면 보일 대장도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아무리 다핸 남작의 비호를 받는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일칸의 말에 힐튼 남작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이곳은 오크 랜드야. 우리 두 사람을 정리하고 조용히 묻어둔다면 누가 책임을 물을 수 있겠나? 더군다나 영애까지 데리고 백작가로 간다면 그린넨 백작가의 전력만 높여 주는 일이야. 괜한 분란을 만들어서 좋을 것이 없어.”

힐튼 남작의 말에 일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악의 상황에서는 보일이 후작가 최고의 전력인 최상급 엑스퍼트인 힐튼 남작을 죽이고, 곧장 그린넨 백작가로 간다면 후작가로서는 보일에게 어떤 위해를 가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백작가에 상급 엑스퍼트의 실력자가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일은 최대한 막아야만 했다. 더구나 그 대상이 후작가에 원한을 가진 실력자라면 더더욱….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일단 영애와 카일을 볼모로 잡고 영지로 돌아간다면, 보일 대장을 우리 마파린 후작가로 불러들일 수가 있게 되겠지. 비록 화이트 와이번의 알을 잃었지만, 상급의 기사와 미래의 마스터를 우리 후작가에서 확보하게 될 수 있을 것이라네.”

힐튼 남작이 덤불을 깔고 누워 있는 카일을 보며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마스터라 하셨습니까?”

“그래. 마스터 말이야.”

“저 아이가….”

“나도 처음 저 아이의 검술과 마나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네! 저 나이에 벌써 중급 엑스퍼트라니 놀랍지 않은가? 왕국의 유일한 소드 마스터인 트라발트 공작 전하께서도 16살에 초급을, 19살이 넘어서야 중급에 올랐네. 헌데 저 아이는 17세에 벌써 중급이라니…. 무서울 정도의 재능을 가진 아이야! 어쩌면 화이트 와이번 알이 아니라 저 아이야말로 진정한 보물일 수 있네.”

“…그 정도일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나도 이번 제국기사와의 전투와 오크 때를 만나지 못했다면 알지 못했겠지.”

일칸이 깜짝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힐튼 남작이 입꼬리를 위로 끌어올렸다.

“그래 이번 일로 작은 깨달음을 얻었네. 물론 내상을 치료하고 제법 오랜 시간 수련이 필요하겠지만 이제 최상급으로 가는 단초를 잡았으니, 이만하면 이번 일에 나와 후작가가 얻은 것이 적지 않을 것이야.”

힐튼 남작의 말에 일칸이 작게 감탄했다.

힐튼 남작이 최상급에 오르고 상급 엑스퍼트인 보일과 미래의 마스터를 바라볼 수 있는 카일까지 얻는다면 후작가로서는 이번에 잃은 기사들보다 더 큰 전력을 얻게 되는 것이니 결코 손해 본 것이 아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