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57화 (57/404)

57.조우 1

“왜 이리 늦은 겁니까?”

일칸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겨우 카일의 옆에 도착했을 때 처음 카일이 내뱉은 말이었다.

“헉헉~. 너 지금 뭐라고…. 헉헉~.”

땅에 검을 박아 넣고 허리를 숙여 헐떡거리고 있던 일칸이 고개를 들어 카일을 노려보았다.

“우릴 기다렸다는 말이냐?”

“당연한 것 아닙니까? 설마 그냥 미친놈이라 저놈들을 끌고 죽으려고 이곳까지 달려온 줄 아십니까?”

할 말을 잃은 힐튼 남작이 멈칫 카일을 바라보았다. 사실 처음 수천의 오크 무리로 뛰어드는 카일의 모습에 잠시 미친놈이 아닌가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오크 때와 전투를 벌이고 있는 웨어 울프를 바라보며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군.”

카일의 말대로 웨어 울프를 끌고 온 덕분에 힐튼 남작과 일칸이 포위망을 뚫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곳을 나갈 방법이 있나? 아무리 웨어 울프라고는 하지만 오크 때를 모두 상대하기에는 힘들 것 같은데?”

힐튼 남작이 반걸음 앞으로 나가며 막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오크의 클럽을 피한 뒤, 손목 가볍게 회전시켜 오크의 턱에 검을 박아 넣곤 말했다.

푸욱-

“크억.”

오크가 짧은 신음을 내며 쓰러졌다. 더없이 깔끔하고 간결한 동작이었다. 지난번 제국의 기사 후안 백작을 상대할 때 보았던 검술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일단은 이곳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따라오세요.”

카일은 두 사람의 대답도 듣지 않고 다가오는 오크들을 베어 넘기며 그대로 동쪽을 향해 달렸다.

“저… 저 녀석, 우리가 온 길을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일칸이 카일의 뒷모습을 보며 당황해 소리쳤다.

“할 수 없지, 일단은 따라가는 수밖에….”

힐튼 남작이 카일의 뒤를 빠짝 따라붙었다.

“젠장! 남작님, 같이 가셔야죠.”

일칸이 힘겹게 힐튼 남작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 * *

카일은 오크 때를 돌파해 달리다, 쫓아오는 오크가 보이지 않자 갑자기 방향을 바꿔 북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동안 쉼 없이 달리던 세 명은 날이 저물어 갈 무렵 잡목지대 앞에 도착했다.

“이곳을 잘 아는가 보군.”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힐튼 남작의 시선을 카일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제가 누군지는 어느 정도 짐작하신 것 같습니다.”

“정확히는 자네의 검술을 보고 알았지. 몇 가지 검술이 기억에 남아 있네! 아주 인상적이었지.”

“그렇습니까?”

“사실 좀 의문을 가지고 있었네. 아무리 보아도 백작 영애가 길잡이도 없이 오크 랜드로 향했다는 것이 좀 이상했었거든.”

“샤론 마을에서 길잡이를 찾는다면 못 찾을 것도 없을 겁니다.”

“물론, 길잡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진 않겠지. 정확히 따지면 10명 정도 되려나.”

“그렇습니까?”

“보일 대장과 마을 외곽순찰을 도는 9명의 제자가 있다고 들었다네. 이들이 아니고서는 오크 랜드로 향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더군.”

“생각보다 조사를 많이 하셨군요.”

“내가 다핸 남작령으로 올 동안 저기 있는 일칸이 조사해 보고한 덕분이지.”

힐튼 남작이 거친 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일칸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미 체력과 오러가 바닥 난 상태에서 이곳까지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허억, 허억. 따로 알아볼 것도 없었다. 영지를 돌며 적당한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니 모두 그 10명을 말하더군.”

“뭐… 그거야 조금만 알아보면 어렵지는 않습니다. 다만 영지 사람들이 타지인에게는 쉽게 해주지 않는데 알아냈다고 해서 놀란 거지요. 외지인을 제법 경계하거든요.”

“그야 낯선 사람이 아무런 대가 없이 질문을 했을 때나 그렇지, 적당한 보상만 있다면 어렵지 않다네.”

“그야….”

하긴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몇 가지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해준 것만으로 골드가 손에 들어온다면, 은화 하나 손에 쥐기 어려운 낙후된 영지에서 샤론 마을에 대해 말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더군다나 샤론 마을은 부유하면서도 가장 위험한 마을 중 한 곳이라 모르는 사람이 적었다. 영지에서 가장 위험한 마을 중 한 곳이면서도 점차 부유해지는 샤론 마을, 그중에서도 자경단의 핵심인 외곽순찰조를 영지민들이 모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정보는 틀렸지.”

힐튼 남작의 말은 일칸을 향해 있었지만 눈동자는 11번째 길잡이, 카일에게 못 박혀 있었다.

“그건… 그렇습니다.”

일칸이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훔쳤다. 다핸 남작가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백작 영애가 향한 샤론 마을에 대해 알아보는 일이었다. 힐튼 남작이 다핸 남작가로 올 10여 일 동안 조사를 해보았지만, 10명 외의 11번째 길잡이에 관한 정보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보일 대장의 검술을 능숙하게 펼치려면 적게는 수년 많게는 수십 년을 수련해야 하니, 마을이나 영지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터. 그들이 길잡이로 쓸 거라 생각지 못한 존재는 단 한 명밖에는 없지. 특히나 자네처럼 나이 어린 젊은 청년이라면 말이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보일 대장에게 아들이 하나 있다고 하더군요. 올해 17세가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자신이 호명되자 카일이 씩 미소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카일이라 합니다.”

“역시 보일 대장의 아들이었군. 더군다나 그 나이에 이미 중급 엑스퍼드에 올랐군!”

“지, 지금 중급 엑스퍼드라고 하셨습니까?”

화들짝 놀란 일칸이 말을 더듬거리며 물었다. 서른 살의 나이에 아직도 중급 엑스퍼트의 경지에 머물러 있는 일칸으로서는 카일의 경지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하, 중급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아직은 초급일 뿐입니다. 단지 약간의 편법을 사용한 것뿐입니다.”

카일이 고개를 저었지만 힐튼 남작은 믿지 않는단 것처럼 카일을 지그시 바라볼 뿐이었다.

“본인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힐튼 남작이 묘한 웃음을 짓곤 어깨를 으쓱였다. 카일은 가타부타 말을 덧붙이는 대신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한곳을 가리켰다.

“오늘은 저곳에서 머무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카일이 가리킨 곳은 언덕 아래쪽으로 지반이 침하 된 곳이었다. 언덕 아래쪽이라 바람을 막아줄 뿐만 아니라, 지반이 꺼져있어 불을 피워도 주변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지형이었다.

“흠…. 과연 나쁘지 않은 곳이군.”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곤 카일이 앞장서자 힐튼 남작과 일칸이 뒤를 따랐다.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며칠 동안 쉬지 않고 도주와 전투를 반복하다 보니 두 사람 모두 상당히 지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일이 걸어가며 주변에 널려 있는 바짝 마른 잡목 가지를 줍기 시작하자 뒤에 있던 일칸 역시 카일을 따라 잡목을 줍기 시작했다.

어차피 밤을 보내려면 상당한 땔감이 필요했고 이 모두를 카일에게만 맡겨 둘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힐튼 남작이 할 수도 없으니 결국 일칸 자신이 해야만 했다.

“헌데 자네의 검술은 보일 대장과는 좀 차이가 있더군. 혹 쌍검술을 익혔나?”

목적지에 도착한 카일이 챙겨온 잡목을 얽어 불씨를 떨어트렸다. 타닥거리는 소리가 나며 불꽃이 피어오르자 힐튼 남작이 카일의 허리, 정확히는 서로 다른 형태의 검을 보며 물었다.

“쌍검술이라….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모호한 카일의 대답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힐튼 남작이 마른 나뭇가지 하나를 타오르는 모닥불 위로 던지며 말했다.

“기사들은 용병들보다 상대적으로 실전적인 경험이 부족하지. 왜일 것 같은가?”

힐튼 남작의 엉뚱한 질문에 카일은 선뜻 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힐튼 남작은 처음부터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는지 자신이 하려던 말을 이어갔다.

“기사들이 검을 뽑기 위해서는 명분과 함께 가문의 명예까지 모두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지.”

“용병은 다르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네. 용병들은 명분보다는 실리를, 명예보다는 돈을 따르다 보니 쉽게 검을 뽑게 되지. 헌데 말이야, 왜 용병들보다 기사들의 경지가 더 높을 것 같은가?”

“…기사들의 가문에서 더 뛰어난 검술이나 마나 연공술이 있기 때문 아닙니까?”

“많은 용병들이 그렇게 여기지. 허나 생각해 보게 처음 검술이 시작되었을 때는 어떠했을 것 같은가? 기사의 검술이든 용병의 검술이든 오래전에는 모두 하나에서 시작했을 것이네.”

막 잠자리를 만들고 있던 일칸은 카일과 힐튼 남작이 검술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자 슬그머니 다가와 힐튼 남작의 옆에 앉았다.

힐튼 남작이 잡목 가지를 들고 손목만으로 가장 기초적인 검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근본적인 검술인 만큼 용병이든 기사든 상관없이, 그들이 처음 배우는 기초 검식은 이 동작이나 초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용병의 검술이 기사의 검술보다 떨어지는 이유가 따로 있다는 말이세요?”

“그렇다네. 기사의 검술은 처음 말한 것처럼 명분이 있어야만 검을 뽑을 정도로 정직하지. 그리고 가문의 명예와 충성심으로 다른 길을 넘보지 않고 우직하게 한길을 향해 정진하지만 용병들은 다르다네.”

카일은 힐튼 남작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남작은 지금 카일의 검술에 대한 우려를 표하고 있었다.

“용병들은 실리와 금전을 먼저 생각하다 보니 검술보다는 다른 곳에 눈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네. 기사들처럼 하나의 검술을 오랫동안 익히기보다는, 당장 사용할 수 있는 실리적이고 변칙적인 검술을 익히거나 병기의 이점을 보려 하기도 하지. 그러다 보니 검술 자체의 발전이 더딜 수밖에는 없다네. 이 때문에 지금에 와서는 용병들이 익히는 마나 연공법이나 검술의 발전이 더딘 거라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자 힐튼 남작이 웃으며 말했다.

“보일 대장의 실력과 검술이라면 분명 이와 같은 이치를 알고 있을 것인데, 자네를 말리지 않은 것이 이상하군.”

“제가 알기로는 아버님께서는 남작님과 친분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보일 대장과는 이번에 샤론 마을에서 만나 본 게 전부긴 하다네. 하지만 경지에 오른 검사라면 검을 맞대 본 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경지와 성격을 어느 정도 예상을 할 수 있지.”

일순 카일의 눈빛에 서린 감정을 읽어낸 힐튼 남작이 호탕하게 웃었다.

“허허! 걱정 말게. 그저 잠시 실력만 가늠해 본 것뿐이니…. 이런 오지에 그만한 경지의 검사가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거든.”

“…그렇습니까?”

카일은 담담한 척 말했지만 내심으로는 깜짝 놀라고 있었다.

비록 보일의 경지가 상급에 이르렀다고는 하지만 힐튼 남작에 비해서는 크게 떨어질 수밖에는 없었다.

같은 경지라도 오래전 상급에 이른 남작과의 실력의 차이는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내 아무리 생각이 없다고 하지만 다른 영지의 가신에게 위해를 가할 정도로 무례하지는 않다네.”

“아버지의 경지는 어떻게 아신 겁니까?”

“경지에 오르면 걷는 모습, 숨 쉬는 것 하나만 보아도 하위 검사들의 경지를 짐작할 수 있지. 하지만 보일 대장의 경지는 쉽게 파악이 안 되더군.”

“그래서….”

“이런 때는 직접 검을 맞대어 보는 게 가장 정확하고 확실한 방법이지.”

“….”

“그래서 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어. 그만한 경지라면 자네가 쌍검술을 익히는 걸 그대로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것인데…. 아마도 분명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래도 한가지 충고를 해준다면 쌍검술로서는 결코 경지에 오르기는 힘들 것이니 깊이 생각을 해보게.”

“알겠습니다.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진심이 담긴 조언에 카일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물론 카일의 검술은 정확히 보자면 쌍검술이 아니었다. 두 가지의 서로 다른 형식과 개념의 검술을 왼손과 오른손으로 따로 익히고 있지만, 굳이 이를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힐튼 남작의 순수한 충고가 고마워 머리를 숙인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