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54화 (54/404)

54.쫓기는 힐튼 남작

단출해진 일행은 이전과 비하면 기어가는 속도라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느긋하게 움직였다. 복귀하는 길 이틀 차.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선두를 차지한 카일이 이니엘의 속도를 고려해 걸음을 옮기던 와중,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잠시만!”

카일은 뒤를 따라오는 이니엘 영애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뒤를 따라오던 시안느가 카일의 옆으로 급히 다가왔다.

“무슨 일… 헉! 시체가….”

대뜸 길 한복판에 놓인 시체에 시안느가 이니엘 영애를 보호하는 듯 앞을 막아서며 뒷걸음질을 쳤다. 어느 정도 두 사람이 멀어지자 카일은 들고 있던 팔을 내리고 시체에 다가갔다.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기저기 둔기에 타격을 당했고 시체 일부가 뜯겨나간 걸 보니 몬스터, 그중에서도 오크에게 당한 것 같습니다.”

카일이 참혹한 모습으로 피를 흘리며 죽어있는 시신을 보며 말했다.

“오크에 말인가요? 이자가 왜?”

“쫓기고 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앞서간 힐튼 남작을 수행하던 기사 중 하나인 것 같군요.”

“쫓기다니요?”

“아무래도 제국의 기사들이 오크 랜드를 가로지르며 몰살시킨 오크 부족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문제라니…. 무슨 문제 말인가요?”

“오크들이나 몬스터들은 그들만의 일정한 영역이 있습니다. 허나 한순간 기사들로 인해 오크들이 몰살을 당하면서 균형을 이루고 있던 영역의 경계 일부가 무너진 것 같습니다.”

“그게 문제란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오크들이 영역을 다투는 곳은 이곳과는 정반대 방향이 아닌가요?”

시안느가 혼란스럽다는 기색으로 물었다. 그들이 오는 이틀 동안 오크들의 모습을 어디서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습니다. 정반대 방향이죠. 그렇기에 본래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텐데, 제국의 기사들이 이곳을 향해 오면서 뚫어 놓은 통로가 문제입니다. 이 길을 따라 아무런 제지도 없이 달려온 오크들이 돌아가던 힐튼 남작 일행과 마주쳤던 것 같습니다.”

“아….”

그제야 카일의 말을 이해한 시안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 기사들이 오크 부족과 몬스터들을 몰살시키며 만들어 놓은 좁은 회랑을 따라 아무런 재지도 없이 수많은 오크 때가 몰려들고 있단 소리였다.

부상을 당한 힐튼 남작과 고작 4명의 기사만으로는 끊임없이 몰려드는 오크 때를 감당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시체가 오크들에게 먹히지 않고 일부 남아 있는 것을 보니, 오크들이 빠르게 남작의 뒤를 쫓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곧 힐튼 남작을 추격하는 오크 때를 보게 될 겁니다.”

“그럼 되도록 천천히 북상하는 것이 좋겠군요?”

이니엘 영애의 말대로 오크 때를 선두에서 몰고 가는 힐튼 남작이 있으니 굳이 발걸음을 서둘러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었다. 제국 기사들의 공격에서 도움을 주었다고는 해도 결국 힐튼 남작 또한 와이번 알을 노리고 추적해온 적이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네?”

“힐튼 남작 일행이 이대로 간다면 그들이 갈 곳은 한 곳뿐입니다.”

“샤론 마을!”

그저 오크 때를 만날까 염려해 카일의 낯빛이 어두워진 줄로만 알았던 시안느는 비로소 카일이 무엇을 진실로 걱정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 오크 때는 통곡의 협곡이 아닌 새로운 길을 통해 힐튼 남작의 뒤를 쫓아 샤론 마을로 향하고 있던 것이다.

* * *

푸확-

단 한 번의 검격에 앞을 막아선 오크가 반으로 갈라져 나갔다. 그러나 반으로 갈려져 쪼개진 오크의 뒤로 새로운 오크가 달려들며 손에 들려 있던 돌도끼를 휘둘렀다. 죽은 오크로 인해 교묘하게 시야가 가려진 틈을 노린 오크의 돌도끼는 정확하게 사내의 정수리로 떨어져 내렸다.

퍼억

그러나 사내는 이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침착하게 반걸음 앞으로 다가서며 도끼의 궤적에서 벗어나더니, 검 손잡이로 오크의 턱을 날려 버렸다.

“크아악~.”

오크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비틀비틀 물러나자 사내는 그대로 검을 심장에 박아 넣었다.

푸욱-

“헉, 허억.”

거친 숨을 몰아쉰 사내, 일칸이 어깨를 늘어트리려다가 혼자 지레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주변에는 수백 마리의 오크들이 처참하게 바닥을 뒹굴며 쓰러져 있었다.

사방이 쥐 죽은 듯 고요한 걸 확인한 일칸은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세웠다. 오크들을 겨우 막아냈다고는 하지만 이대로 멈춰 있을 수는 없었다.

오크들은 마치 파도처럼 끊임없이 몰려오고 있었다.

1파가 끝나면 곧이어 2파, 3파로 더 많은 오크 무리들이 몰려들었다. 이대로 오크들을 물리쳤다 방심하고 있노라면 어느새 주변은 오크들로 겹겹이 포위되어 있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끌고 일칸은 앞으로 나아갔다.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일칸은 힐튼 남작을 찾기 위해 급히 머리를 길게 빼 들었다. 남작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쿨럭, 컥 커헉.”

힐튼 남작이 바위에 기대어 격하게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얼마나 심각한지 힐튼 남작이 서 있는 바위 밑은 이미 핏물로 이루어진 작은 웅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남작님!”

일칸이 황급히 달려와 쓰러지려는 힐튼 남작을 부축했다.

“후하~.”

핏덩이를 다 토해낸 남작이 겨우 크게 숨을 몰아쉬며 일어났다.

“괜찮으십니까?”

“허허, 자네는 지금 네가 괜찮은 것으로 보이나?”

“그….”

일칸은 차마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척 봐도 힐튼 남작의 상태는 대단히 심각해 보였다. 어제부터 급격하게 몰려든 오크들로 인해 후위를 막고 있던 기사 하나가 휘말리면서 힐튼 남작도 더는 누워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일칸을 비롯한 일행들이 그나마 오크들에게 휘말리지 않은 것도 힐튼 남작이 무리를 하면서 포위망을 뚫은 덕분이었다.

“후, 오늘에서야 이 오크 랜드가 왜 대륙의 삼대 금지가 됐는지 알겠군. 명색이 최상급 엑스퍼트에 근접했다 자신했던 내가 오크 따위에게 죽임을 당하게 생겼으니….”

“죽다니요. 당치 않습니다. 분명 모두 살아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체념한 얼굴의 힐튼 남작에게 일칸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이미 힐튼 남작은 물론이고 자신과 이제 한 명 남은 기사로는 다가오는 오크 때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일단은 서둘러 이곳을 피해야 합니다. 곧 피 냄새를 맡은 오크 때가 몰려올 겁니다.”

“그래… 그러지 일단은 가보는 데까지 가보도록 해야겠지.”

힐튼 남작이 간신히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 * *

“이제 어떻게 하실 거죠?”

시안느가 카일을 보며 물었다. 힐튼 남작을 따르던 기사를 뒤로하고 서둘러 달려가던 카일 일행은 얼마 가지 않아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오크들을 막아야겠죠.”

“하지만 보세요. 이 넓은 평원 위가 온통 오크들의 피로 뒤덮여 있어요. 적어도 힐튼 남작 일행에게 죽은 오크가 수백은 넘을 거예요. 그런데도 시체 하나 남지 않았다는 건 남작의 뒤를 쫓는 오크들이 죽은 오크보다 더 많다는 말이에요. 우리가 도운다고 해도 오크들을 막을 수가 없어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시안느가 불안스레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대로 오크들이 마을로 향하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카일은 시안느의 걱정을 뒤로하고 둔덕 위에 올라 평원을 멀리 내다보았다. 평원에는 녹색의 피로 이루어진 길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멀리에서나마 오크 때를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오크들은 현재 죽어있는 오크들을 뜯어 먹으며 배를 채우고 있었다. 그나마 힐튼 남작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오크들이 힐튼 남작이나 기사들에게 죽은 수백의 오크들을 지나치지 않고 뜯어먹으며 이동한 덕분에 남작이 도주할 시간적 여유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저기 멀리 보이는 것들이 모두 오크 무리인가요?”

엎드려 무언가를 뜯어 먹고 있는 구역질 나는 오크들의 모습을 보던 시안느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생각보다 더 심각하군요.”

“세상에! 평원을 가득 메우고 있는 저것들이 모두 오크란 말인가요?”

이니엘이 평원을 둘러보며 질렸다는 말투로 소리쳤다. 겨우 형태만 보일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낮은 풀과 잡목밖에 없는 평원의 특성으로 인해 이니엘 영애의 눈에도 멀리 평원 위 오크들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이제부터는 최대한 조심해서 따라오셔야 합니다.”

“어쩔 생각이죠? 설마 이대로 오크 무리에게 다가갈 생각은 아니죠?”

시안느의 물음에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오크 무리를 향해 뛰어들 정도로 무모하지는 않습니다.”

시안느가 미처 무어라 대꾸할 틈도 없이 카일이 그대로 언덕을 내려가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럼 어디로… 잠깐만요! 우리는 남쪽으로 가야 하는 것 아닌가요?”

카일이 내려간 줄도 모르고 말을 걸던 시안느는, 카일이 벌써 내려간 것을 보곤 이니엘과 함께 그의 뒤를 쫓으며 소리쳤다.

방금 말했던 것처럼 시안느는 카일이 북쪽이 아닌 남쪽으로 향하리라 생각했다. 앞서 마파린 후작의 와이번 나이트들을 공격한 수백의 가고일 무리라면 분명 오크 무리를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앗~.”

“헉~.”

시안느의 말에 카일이 갑자기 멈춰 섰다. 카일의 뒤를 따라 달리던 시안느가 간신히 발을 멈췄다. 그녀는 겨우 카일과 부딪치지 않았지만, 힘이 부족한 이니엘 영애는 제대로 멈출 수 없어 그대로 카일과 부딪혔다.

이니엘 영애는 강한 충격을 대비해 눈을 감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아무런 충격도,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괜찮습니까?”

이니엘 영애가 카일의 목소리에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눈앞에 단단한 가슴팍이 보였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녀는 카일의 품 안에 자신이 반쯤 안겨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영애와 부딪치려는 순간 카일이 몸을 돌려 무릎을 살짝 굽힌 뒤 이니엘 영애를 가볍게 받아냈기 때문이었다.

“괘… 괜찮아요.”

귓불을 붉게 물들인 이니엘 영애가 카일의 가슴팍을 벗어났다.

“아가씨!”

눈 깜빡할 사이 벌어진 일에 넋을 놓고 있던 시안느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다가와 영애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지만, 다행히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렇게 갑자기 멈춰서면 어떡해요!”

“아! 죄송합니다. 시안느 경이 남쪽으로 가야 한다는 말에 그만….”

“그야 오크를 상대하려면 지금으로써는 가고일 밖에는 방법이 없잖아요.”

시안느의 말에 카일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물론 그렇습니다. 단번에 오크들을 막으려면 가고일 무리를 끌어들이는 것이 좋긴 하죠. 하지만 가고일을 끌어들이는 순간 우리도 안전을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난번에는 잡목지대에 숨어 가고일을 피하지 않았나요?”

카일이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지난번에 잡목지대에 숨을 수 있었던 건 가고일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침입한 와이번을 공격하는 데 집중하느라 그런 겁니다. 그러나 오크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가고일들의 사냥감에 불과하니까요. 가고일이 사냥을 시작하면 오크는 물론이고 지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사냥감이 될 겁니다.”

“그럼 다른 방안이 있나요?”

“가고일보다는 못하지만 제법 위력적인 몬스터가 있습니다. 그들을 끌어들일 생각입니다.”

“…위험한 몬스터인가요?”

“아마도…. 그래도 감사합니다. 가고일을 생각하신 걸 보니 샤론 마을을 걱정하고 계셨군요.”

“그야 마을 사람들이 저희 때문에 다치는 것은 바라지 않으니까요.”

“고맙습니다. 마을을 걱정해 주셔서….”

카일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는 다시 북쪽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카일은 고원의 북쪽으로 향하며 가끔 바람의 방향을 살피기도 하고, 구릉 위를 올라 주변을 살펴보며 한참을 달리다 이니엘 영애의 체력이 바닥나 쓰러지기 일보 직전에서야 멈춰 섰다.

“이곳부터는 저 혼자 가야 합니다.”

“혼자라니. 이곳에 우리만 두고 가겠다는 말인가요?”

시안느가 기겁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쩔 수 없습니다. 이곳부터는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영애와 함께 움직인다는 것은 더 이상 무리입니다.”

카일이 멀리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이네엘 영애를 보며 말했다.

“하… 하지만….”

더듬더듬 무어라 반박하려던 시안느는 카일과 이니엘 영애를 번갈아 쳐다봤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주안까지 죽은 이상 이니엘 영애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시안느뿐이었다. 시안느로서는 영애를 위험한 곳으로 데려갈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이곳까지 오느라 지쳐버린 이니엘 영애로서는 더 이상 움직이기도 힘들어 보였다. 카일의 말이 옳았다. 이니엘 영애는 이미 한계였다.

“알겠어요. 그럼 이곳에서 기다리면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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