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52화 (52/404)

52.블랙 와이번 4

-다시 묻겠다. 나와 맹약을 맺겠느냐.

카일은 눈앞의 존재가 바로 와이번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새까만 밤보다 더 어두운 검은 몸체에 절벽의 중턱을 모두 차지할 정도로 거대한 몸체를 가진 블랙 와이번이었다.

“지금 나와 맹약을 맺고 싶다는 말인가요.”

카일은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 노력을 했지만, 목소리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그렇다. 지금까지 너와같이 젊은 나이에 그만한 마나를 품은 자는 보지 못했다. 나와 맹약을 맺겠느냐!

블랙 와이번은 다시 한번 카일을 바라보며 물었다. 와이번의 말에 카일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잠시 망설이며 입술을 달싹이던 카일이 블랙 와이번에게 되물었다.

“당신과 맹약을 맺으면 다른 와이번과도 맹약을 맺을 수 있나요?”

-그럴 수는 없다. 와이번과 인간은 맹약 상대가 죽지 않는 이상, 오직 단 한 명과 맹약을 맺는다.

죽기 전까지는 오로지 서로에게 묶여있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럼 전 당신과 맹약을 맺을 수 없어요.”

-이해할 수 없다. 이 세상에 화이트 와이번을 제외하면 블랙 와이번과 비견될 와이번은 없다. 더군다나 종족 중 외부로 나온 블랙 와이번은 오직 나뿐이다. 어찌하여 맹약을 거절하는가? 그대에게서는 다른 와이번과 맺은 맹약의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블랙 와이번은 본인이 납득할 만한 해답을 주기 전까지 떠나지 않을 것 같았다. 머뭇거리던 카일은 가방에서 작은 솥을 꺼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일행들의 음식을 만들어주던 솥이었다.

카일이 조심스럽게 솥뚜껑을 열자 두꺼운 털가죽에 둘러싸여 있는 와이번의 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알은 달빛을 반사하며 기기묘묘한 빛을 발했다.

“전 이미 화이트 와이번의 알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 당신과는 맹약을 맺을 수 없어요.”

블랙 와이번이 카일의 손에 들려 있는 와이번의 알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카일에게 말했다.

-이 알 때문이라면 그대와 맹약을 맺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카일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와이번과 인간은 죽기 전까지 오직 서로에게 귀속된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다. 맹약은 신성한 것. 와이번과 인간은 둘 중 하나가 죽기 전까지 오직 하나의 맹약자만 존재할 뿐이다. 이를 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당신과 맹약을 맺을 수 없단 겁니다. 전 화이트 와이번의 알을 깨워 맹약을 맺을 거니까요.”

카일이 다시 한번 거절하며 와이번의 알을 소중히 감싼 다음 솥 안에 넣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블랙 와이번이 다시 카일을 바라보며 무미건조하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다시 말하지만, 그 알이 깨어나더라도 맹약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뚱딴지같은 소리에 카일은 눈을 가늘게 뜨고 블랙 와이번을 올려다봤다. 설마 와이번이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 것이다.

-와이번은 인간과 달리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와이번은 드레곤의 피와 살로 빚어진 존재. 말속에 언령이 깃들어 있다. 절대 거짓을 말할 수 없는 몸이지.

마치 카일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와이번이 단호하게 말을 했다. 당혹을 감추지 못한 카일이 깊은 생각에 빠졌다. 블랙 와이번은 인내심 있게 어린 맹약자 후보를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일이 명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요. 알에서 깨어난 와이번과도 맹약을 맺을 수 있다면, 그대와도 맹약을 맺겠어요.”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자 블랙 와이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대 이름을 말하라!

“제 이름은 카일입니다.”

-나 블랙 와이번 시카니스는 인간 카일과 태초 드레곤이 정한 율법과 법칙에 따라 맹약을 맺는다. 인간 카일은 이 맹약에 동의하는가?

“동의합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카일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블랙 와이번 시카니스와 하나의 끈이 이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로써 맹약은 이루어졌다. 이 맹약은 둘 중 어느 하나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계속되리라!

-앞으로 잘 부탁한다. 카일!

시카니스의 목소리는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자신이 원하던 인간과 맹약을 맺은 것이 퍽 기쁜 모양이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하나 물어볼 게 있습니다. 제가 당신의 맹약자를 죽인 것을 알고 있나요?”

-알고 있다. 그대가 나의 맹약자를 죽였기에, 그대는 다른 누구보다 우선해 맹약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먼저 복수를 생각해야 하지 않나요?”

-맹약을 맺는 순간 맹약에 따라 맹약자를 보호해야 한다. 하지만 맹약자가 죽는 순간 맹약은 깨어진다. 약자로서 죽임을 당한 이상 복수도, 화를 낼 이유도 없다.

“하지만 그는 당신과 오랫동안 함께한 첫 인간이잖아요.”

-물론 그는 나의 첫 맹약자로서 많은 일을 함께했다. 때문에 그에 대한 답으로 맹약이 깨어지고도 맹약자의 시신을 그의 보금자리에 가져다주었다. 그것만으로도 그와 함께한 지난날의 보답은 충분했다 생각한다.

“그렇군요.”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인즉슨 와이번과 인간의 맹약은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상호 계약의 관계일 뿐이란 소리였다.

결국 계약의 대상자가 죽는 순간, 모든 계약관계는 사라지고 적으로 싸우던 자라도 맹약자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면 와이번이 맹약을 청할 수 있단 의미였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용병 중에도 와이번과 맹약을 맺어 와이번 라이더가 나올 수 있던 것이다.

-카일, 아공간석을 가지고 있나? 이전 맹약자가 죽으며 심령에 큰 타격을 입었다. 심령을 손상을 당한 상태에서 제국에서 이곳까지 왕복하느라 나는 많이 지쳤다.

시카니스의 말에 카일이 급히 가방을 뒤졌다. 보틀러의 품 안에서 빼낸 아공간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 말인가요?”

카일이 아공간석을 치켜들자 시카니스가 다소 떨떠름히 말했다.

-음… 수정으로 된 아공간석이군. 무속성의 아공간석이니 휴식을 취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다만 수정 아공간석은 무속성이라 안정성이 떨어져 몸을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후 아공간석을 검은색 보석으로 바꾸어 주길 바란다.

“아공간석을 도중에 바꿀 수도 있나요?”

-물론이다. 아공간석은 단지 내가 잠들 수 있는 보석 속에 만들어진 아공간일 뿐이다.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좋아요. 최대한 빨리 아공간석을 바꿔 볼게요.”

-고맙다. 이제 난 아공간 속에 들어가 있겠다.

시카니스가 수정을 바라보며 느릿느릿 눈을 깜빡이자 수정에서 빛이 새어 나오더니 갑자기 공간이 갈라졌다. 시카니스는 그 속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멍하니 구경하던 카일은 거대한 시카니스의 몸체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자신의 손에 들린 아공간석을 바라보았다.

“이럴 수가!”

카일이 깜짝 놀란 얼굴로 수정을 바라보았다. 수정 안쪽에 검은 와이번이 거대한 날개로 몸을 감싼 후 잠들어 있었다.

-다행히 수정의 상태가 나쁘지 않다.

카일의 머릿속으로 시카니스의 음성이 들려왔다.

“수정 안에서도 대화가 가능한가요?”

-아공간석을 몸에 지니고 있는 이상 대화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렇군요.”

-굳이 입으로 대화를 하지 않아도 된다. 마음속으로 말을 해도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이렇게 말인가요?’

카일이 마음속으로 말을 하지 곧 시카니스의 대답이 들려왔다.

-그렇다. 우리의 대화는 마음속 언어의 대화이다.

* * *

“지금 가짜라고 했나!”

아이젠 공작이 데너리스와 화이트 와이번 알을 번갈아 가며 황망히 쳐다봤다.

“…그렇습니다. 내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와이번 특유의 마나 반응이 전혀 없습니다. 저 와이번 알이 설령 진짜라 하더라도 이미 죽은 알입니다”

“이, 이게 무슨….”

비틀거리던 아이젠 공작은 간신히 균형을 잡고 티론드를 노려봤다. 그러나 티론드도 억울했다. 지금 가장 억울하고 황당한 사람은 보틀러를 죽이고 상자를 가져온 장본인인 자신이었다.

“공작님, 이 화이트 와이번의 알은 이미 맹약석을 한번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그렇네! 이 와이번의 알은 크로노스 왕국의 토샤 영지에서 이미 맹약석이 제작되어 있었던 알이네!”

공작의 말을 들은 데너리스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곤 와이번의 알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결국 세 가지 중 하나군요.”

“무슨 말인지 알려 줄 수 있겠나?”

아이젠 공작은 끓어 오르는 화를 겨우 잠재우며 물었다.

“첫 번째는 이 사건 자체가 크로노스 왕국 차원에서 꾸며낸 일일 수도 있단 겁니다.”

“화이트 와이번의 알이 발견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거짓이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자칫 크로노스에 있는 검은 여우 조직에 큰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알아챈 아이젠 공작이 눈을 홉뜨며 낮은 침음성을 내뱉었다.

“설마 잠입한 조직을 찾기 위해….”

“제 추측에 불과하긴 하지만 제법 신빙성은 있습니다. 실제로 이번 일로 인해 제법 않은 검은 여우들이 죽임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티론드가 데너리스의 말을 거들었다.

“실제로 북부에서 남부까지 내려오는 동안 제법 많은 검은 여우들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혹시 은신처까지 드러났나?”

“그럴 리는 없습니다. 마파린 후작가의 기사들을 저지한 후, 살아남은 검은 여우들은 곧장 사방으로 흩어졌으니까요.”

“그렇다면 은신처는 안전하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아이젠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데너리스를 바라보았다.

“일단 은신처가 발견되지 않은 것은 다행입니다. 그러나 정확한 사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번 일을 주도한 검은 여우를 불러 이번 일에 대한 정보를 취득 과정을 상세하게 확인해야 합니다.”

데너리스의 말에 티론드가 말했다.

“이번 일을 주도한 자는 보틀러란 자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살아 돌아오지 않습니다.”

티론드와 아이젠 공작이 은밀한 눈빛을 주고 받았으나, 데너리스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흠,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다만 당분간은 검은 여우의 활동을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네. 아무래도 조심은 해야 할 것 같군…. 그렇다면 두 번째는 뭔가?”

“두 번째는 처음부터 와이번의 알을 발견한 그린넨 백작가 역시 이것이 가짜이거나, 죽은 알인지 몰랐을 경우입니다.”

“처음부터 그들도 진짜로 알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허나 이미 맹약석을 만들었고 그동안 마파린 후작가의 기사단이 추적을 해왔습니다.”

“저 또한 그렇게 들었습니다. 명확한 사실관계를 파악하려면 사건을 주도한 보틀러라는 자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데, 그가 죽었으니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정말 맹약석이 만들어진 것인지, 후작가의 추적대가 과연 맹약석을 이용해 추적해 왔는지, 아니면 그린넨 백작가의 사람들을 오크 랜드로 유인하기 위해 보틀러란 자가 검은 여우들을 이용한 것인지 말입니다.”

“으음….”

아이젠 공작은 피로한 낯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에 와이번 알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공작에게 알려온 것도, 그린넨 백작가의 영애를 오크 랜드로 유인한 인물도 보틀러였다.

당시에는 화이트 와이번 알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최대한 감추기 위해 보틀러에게 일을 일임했고, 나중에는 후안 백작과 기사단의 죽음을 감추기 위해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보틀러를 죽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가 죽으면서 아이젠 공작 역시 모든 사실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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