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49화 (49/404)

49.블랙 와이번 1

페링 남작의 검을 막아낸 힐튼 남작은 머리 위로 들어 올렸던 검을 서서히 내렸다.

몇 번 오간 공방은 전체적으로 페링 남작의 공격을 힐튼 남작이 묵묵히 막아내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얼굴을 일그러트린 것은 힐튼 남작이 아닌, 공격을 계속 주도한 페링 남작이었다.

“크윽.”

그때 페링 남작의 입술 사이로 짙은 핏물이 조금씩 흘러내렸다.

작게나마 내상을 입은 것이다.

페링 남작의 검술이 전체적으로 빠르고 가벼운 검술이라면 힐튼 남작의 검술은 페링 남작에 비해 다소 느리지만 무겁고 파괴적인 검술이었다.

단 몇 번의 검격이지만 최상급에 근접한 파괴적인 힐튼 남작의 검격을 막아내는 순간 거친 힐튼 남작의 오러가 페링 남작에게 침투해 내상을 입힌 것이다.

“그럼 이제 내 차례인 것 같군!”

힐튼 남작이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웅웅웅

힐튼 남작의 검 위로 진득한 푸른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단번에 검을 부수고 페링 남작을 꿰뚫을 것 같은 강렬한 기운이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페링 남작의 목숨을 앗을 것 같이 보였던 검이 향한 곳은 뜻밖의 곳이었다.

쉬익-

짧은 파공성과 함께 힐튼 남작의 머리 위로 섬뜩한 기운이 다가왔다. 남작이 본능적으로 머리 위로 떨어지는 기운을 향해 푸른 오러가 가득 맺힌 검을 휘둘렀다.

꽈광-

공중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울렸다. 정체 모를 공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정작 힐튼 남작은 발목은 땅속 깊이 파묻혀 있었다.

“크윽~.”

힐튼 남작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검을 땅에 박아 넣어 후들거리는 무릎을 겨우 바로 세웠다.

그리고 몸을 바로 세웠을 때 그는 페링 남작 앞으로 한 중년의 사내가 내려서 있는 것을 눈치챘다.

“제국 제 3기사단 단장 후안 백작이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후안 백작은 하늘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꽈앙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큰 소리와 함께 주변으로 잘게 부서진 나무 파편이 이리저리 휘날렸다.

후안 백작이 날린 충격파에 화살이 버티지 못하고 터져 나간 것이다.

“성가시군.”

후안 백작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이번에 막아낸 화살까지 합하면 모두 7번째 화살이었다. 페링 남작이 막아낸 하나의 화살까지 더하면 총 8발의 화살이 날아온 셈이었다.

모두 절벽을 오르기 위해 뛰어오르는 순간의 빈틈을 노려 정확히 심장을 향해 섬전 같이 날아온 화살이었다. 더군다나 화살 자체에도 은은하게 오러가 담겨 있어 감히 방심할 수가 없었다.

“상처를 입은 것도 오랜만이군.”

후안 백작이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 안쪽이 찢어지며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페링 남작이 힐튼 남작을 상대하면서부터, 카일이 쏘아낸 화살이 모두 후안 백작에게 집중되다 보니 쉽게 페링 남작을 도우러 올 수 없었다.

뒤늦게 화살의 충격력을 이용해 힐튼 남작을 기습하는 데 성공했으나 페링 남작을 돕기 위해 급히 움직였던 터라 충격력을 해소하지 못했고, 그 상태 그대로 오러를 잔뜩 끌어올린 힐튼 남작의 검과 충돌하면서 손바닥이 찢어지고 만 것이다.

“아무래도 여기부터 먼저 해결해야겠어. 그렇지 않으면 계속 귀찮게 굴 것 같으니 말이네.”

후안 백작은 힐튼 남작을 보며 노골적으로 빈정거렸다.

쉬익

그때였다. 오싹한 파공성과 함께 무엇인가가 이쪽으로 날아오는 게 느껴졌다. 무어라 더 말하려던 후안 백작은 급히 몸을 돌려 검을 휘둘렀다.

콰아앙

거대한 충격파와 함께 후안 백작의 몸이 튕겨 나갔다. 그는 등이 절벽에 막히고서야 겨우 멈춰 섰다.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후안 백작은 푸르르 머리를 털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이젠 공작가!”

푸른 하늘엔 거대한 검은색 와이번 한 마리와 골드 와이번 4마리가 유유히 날고 있었다. 후안 백작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하늘 위로 모습을 드러낸 와이번 나이트들은 후작으로서도 처음 보는 자들이었으나, 그들이 아이젠 공작가의 와이번 나이트라 확신한 건 바로 하늘 위, 압도적인 위엄을 자랑하는 단 하나의 거대한 블랙 와이번 때문이었다.

블랙 와이번 기사단은 세상에 잘 알려지지는 않은 비밀스러운 기사단일 뿐만 아니라 기사단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실제로 희귀 와이번 중 하나인 블랙 와이번을 보유한 유일무이한 기사단이었다.

“백작님!”

페링 남작이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당장 스피어를 가져….”

푸욱

격노한 후안 백작은 공격을 되돌려주기 위해 앞을 막고 있는 페링 남작을 밀쳐내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차가운 금속이 자신의 몸을 파고들었다.

오러가 머금은 단검의 정확히 갈비뼈를 부수고 심장을 파고들었다.

푸확-

심장을 찌른 단검이 뽑혀 나오자 붉은 피가 폭포수처럼 뿜어져 나오며 페링 남작의 갑주를 붉게 물들였다.

“왜….”

후안 백작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뿜어져 나오는 핏물을 손으로 막으며 힘겹게 물었다. 아무리 최상급 엑스퍼드의 실력자라도 심장에 망가진 이상 살아남을 방법은 없었다.

“죄… 송합니다.”

단검을 떨어트린 페링 남작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는 뒤로 물러나며 품 안에서 마나석을 꺼냈다.

“저들은 제가 불렀습니다.”

“어찌 자네가….”

후안 백작은 페링 남작의 대답도 채 듣지 못하고 그대로 고개를 숙이며 바닥에 쓰러졌다. 최상급 엑스퍼트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비참한 죽음이 아닐 수 없었다.

* * *

푸우욱

날카로운 무언가가 근육과 살을 가르는, 결코 울려선 안 될 소음이 울렸다. 아군끼리 등을 맞대고 적들에게 저항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소리가 의미하는 바는 한가지뿐이었다.

주안 기사단장은 자신의 가슴을 뚫고 나온 보틀러의 검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봤다. 손에 들려 있던 바위가 맥없이 흘러내렸다.

쉬이익

그때 보틀러도 차마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이니엘 영애를 인질로 잡으려던 달려가던 피툰의 심장에 화살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일들이 마치 한순간 동시에 일어난 것처럼 절벽 위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단장님!”

피툰이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시안느가 비명을 지르며 주안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카일이 그녀의 앞을 급히 막아섰다.

“아가씨를 보호해요!”

카일의 말에 시안느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고 있는 이니엘 영애를 바라보곤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보틀러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급히 이니엘 영애에게 달려갔다.

“알고 있었나?”

“의심은 하고 있었습니다.”

“언제부터지?”

“당신이 우리를 찾아온 처음부터죠. 아버지께서 용병은 아무리 친한 동료라도 가장 먼저 의심하고 경계하라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역시 보일이군. 헌데 어찌 아들인 널 이곳에 보냈지?”

“제가 이곳을 더 잘 알기 때문이죠. 그리고 절 가장 믿고 계시니까요”

“흠… 그런가?”

보틀러가 고개를 끄덕이며 가슴 위로 검의 삐져나온 주안으로 자신의 앞을 막아서며 천천히 상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크으윽~.”

비록 가슴 위로 검이 뚫고 나왔지만 아직 숨이 붙어있는 주안의 얼굴은 보틀러가 움직일수록 더욱더 고통으로 일그러져 갔다.

“당신이 저들을 부른 겁니까?”

“아! 카데인 제국의 와이번 나이트 말인가? 당연하지 않은가! 원래 난 카데인 제국의 사람이라네. 벌써 수십 년 동안 왕국에 잠입해 있었지만…. 이번 일을 마지막으로 제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지.”

보틀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에 화이트 와이번의 알을 가지고 제국으로 돌아가면, 공을 인정받아 큰 상을 받게 될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피툰 역시 카데인 제국 사람이었던 건가 싶어 카일이 피툰의 시체를 빤히 바라봤다. 시선에 담긴 의문을 알아챈 보틀러가 짐짓 유쾌하게 답했다.

“저 녀석은 내가 용병 생활을 하며 알게 된 놈이라네. 제법 괜찮은 놈이라 이번에 제국으로 데려가려 했는데, 아깝게 되었지.”

보틀러의 목소리엔 애석하다는 기운이 듬뿍 서려 있었다. 미주알고주알 떠드는 사이 보틀러는 상자의 바로 앞에 당도했고, 그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뭐, 내 목표는 이 상자를 온전히 가져가는 거라네. 그러니 물러나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으면 너 또한 무사하지 못할 것 테니까.”

보틀러가 웃으며 하늘 위로 눈짓했다.

“이런! 어서 절벽 틈으로!”

카일은 시안느를 향해 소리치며 그대로 절벽 틈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시안느는 이미 상황을 알아채고, 이니엘 영애를 안고 바위 뒤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퍼벅 퍽

카일과 시안느가 있던 자리로 황금빛으로 빛나는 스피어 두 자루가 박혀 들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피하지 못했을 정도로 강력한 공격이었다.

“젠장, 이제야 왔군.”

보틀러가 급히 상자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절벽 위로 황금빛 골드 와이번 한 마리가 다가왔다.

그리고 검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기사가 와이번 위에서 뛰어내렸다.

보틀러는 그때까지 방패 삼아 들고 있던 주안의 몸을 팽개치고 가슴에서 검을 뽑아냈다.

“허억.”

주안 기사단장은 힘없는 단말마를 뱉으며 정신을 잃었다. 그 모습을 무감각하게 지켜보던 와이번 나이트가 고개를 들어 보틀러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대는 누군가?”

사내의 입에서 굵직한 저음이 흘러나왔다.

“크로노스 방면 검은 여우 제 4지대 소속의 보틀러 입니다.”

“자네가 이번 일을 지휘한 보틀러인가?”

“그렇습니다. 이번 임무를 마지막으로 본국에 복귀하기로 되어있습니다.”

사내는 보틀러가 말한 내용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자인가?”

“그렇습니다. 이 안에 설원의 학살자라 알려진 화이트 와이번의 알이 들어있습니다.”

“확인은 했나?”

“이제 해야지요.”

보틀러가 미소를 지어 보이며 품 안에서 낯익은 황금열쇠를 사내에게 내밀었다.

“도대체 언제…!”

뒤늦게 열쇠가 사라졌다는 걸 알아챈 이니엘이 소리를 지르려 하자 시안느가 급히 입을 막았다.

“지금은 이대로 계셔야 해요.”

한동안 씨근덕거리던 이니엘 영애는 이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자신을 지켜주던 기사들은 모두 사라졌고 남은 것은 시안느와 카일 뿐이었다.

철컥

열쇠가 돌아가며 짧은 소성과 함께 상자가 서서히 열렸다.

그리고 순백의 둥근 알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고가 많았네.”

와이번의 알을 확인한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검을 뽑아 그대로 보틀러의 가슴에 박아 넣었다.

“커억~.”

“미안하네. 주군께서는 후안 백작이 우리의 손에, 특히 페링 남작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길 원치 않으신다네.”

“이…럴 수는… 이렇게 죽을 수는….”

보틀러는 주안처럼 숨을 헐떡거리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의 심정을 대변이라도 하듯 들고 있던 상자가 덜걱거리며 흔들렸다.

“이런 조심하게 와이번의 알이 떨어지면 큰일이 아닌가.”

상자가 떨어질 것처럼 불안해 보였는지 와이번 나이트가 급히 손을 뻗어 상자를 빼앗아 들었다.

핑-

그때 와이번 나이트의 등 뒤로 화살이 빠르게 날아왔다.

한쪽 손에는 상자가, 남은 한 손은 보틀러의 가슴에 검을 박아 넣은 상황이라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에 무방비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미 와이번 나이트는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보틀러의 가슴에 검을 박아 넣은 채로 몸을 돌려 화살을 막아내려 했다.

보틀러의 몸 자체를 방패로 사용하려 한 것이다.

임기응변 실력으로 미뤄보면 기사는 많은 전투를 거쳐온 경험자인 것 같았다. 기사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분명 일반적인 화살이라면 능히 막아내고도 남을 대처였다.

그러나 카일이 쏜 화살은 최상급의 기사도 밀어냈던 화살이었다. 더군다나 가까운 절벽 위에서 직사로 쏘아진 화살은 그대로 보틀러의 가슴을 관통해 기사의 어깨로 파고들었다.

퍼어억

“커억~.”

기사가 뒤로 급히 물러나며 새로운 화살을 걸고 활시위를 잡아당기는 카일을 노려보았다.

“삐이익~.”

활시위가 팽팽히 당겨졌을 즈음 돌연 기사의 입에서 휘파람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카일을 경계하듯 뒷걸음질 치다가 그대로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곧이어 절벽 아래에서 골드 와이번 한 마리가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기사의 목적은 처음부터 와이번의 알이 든 상자와 보틀러를 죽이는 것이었지, 카일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목적을 달성한 이상 굳이 무리해서 카일과 일행을 죽일 필요가 없었다.

“이대로 순순히 보내줄 것 같으냐!”

카일이 바위틈에서 달려나가 화살을 던져 놓고는 그대로 가방 안에서 삐죽 튀어나와 있던 가죽 주머니를 어깨에 메고서 그대로 절벽 위를 오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절벽 위로 기어오른 카일은 절벽 바위틈 위로 겨우 사람 한 명이 누워 있을 정도의 작은 틈새로 몸을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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