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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용병라이더-47화 (47/404)

47.공동의 적 1

힐튼 남작이 고개를 들어 스피어가 날아온 곳을 노려보았다.

“저곳입니다.”

일칸이 높은 둔덕 위를 가리켰다. 그곳엔 검붉은 레더 아머를 입은 수십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긴장한 힐튼 남작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수백 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던진 스피어는 정확히 일칸이 서 있던 자리로 날아왔다. 이는 최상급 엑스퍼트에 근접한 힐튼 남작도 어려운 일이었다.

“최상급 엑스퍼트다.”

그렇다면 최소한 최상급 이상의 실력자가 저곳에 있다는 말이었다. 아니 정확히 최상급의 실력자일 것이다. 만약 마스터였다면 힐튼 남작이 아무리 최상급에 근접했다 해도 막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일칸이 경악한 얼굴로 힐튼 남작을 바라보았다. 상대가 최상급 엑스퍼트라면 이 싸움은 시작도 하기 전 패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힐튼 남작이 비록 최상급을 목전에 두었다고 해도, 그건 말 그대로 ‘목전에 두었다.’는 거지 최상급 엑스퍼트 기사를 상대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저자들의 숫자는 무려 27명. 그에 반해 이쪽은 열 명이나 적은 17명이었다. 기사들의 숫자도 열세일 뿐 아니라 저들은 제국 황실의 근위 기사들만이 사용한다는 레드 드레곤이 아로새겨진 스피어를 사용했다.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자들이 모인 곳이 바로 황실 근위 기사단이었다. 아무리 마파린 후작가의 기사들이 강하다 해도 제국 황실기사단에는 미치지 못했다. 저들을 상대하려면 적어도 왕실 근위 기사단 정도는 되어야 했다.

“남작님, 피하셔야 합니다.”

“늦었다.”

힐튼 남작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일칸에게 간결히 대꾸했다. 그리고 그의 말이 옳았다. 동쪽에서 온 힐튼 남작과 기사단의 정면은 절벽에 막혀 있었고, 서쪽에서 나타난 제국의 기사단이 후미를 차지해 그들의 뒤는 막힌 상태였다. 더군다나 제국의 기사단이 높은 위치를 선점하고 있어, 목표를 맞추기엔 최상의 위치였다.

“뒤돌아 나가는 순간 수 십여 발의 스피어가 날아들 것이다. 그 사이엔 최상급 엑스퍼트가 날린 스피어도 다수 포함되어 있을 터, 내가 너희 모두를 지켜 줄 수는 없다. ”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순 없습니다. 어차피 저들이 가까이 다가오면 우리는 전멸할 겁니다.”

전멸. 무거운 울림이 담긴 단어에 힐튼 남작은 입술을 깨물었다. 쉽게 생각했던 외유가 죽음의 길이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일단 힐튼 남작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면은 깎아지는 암벽으로 막혀 있고 뒤로는 제국의 기사단이 막고 있었다. 일단 저들의 스피어만이라도 피하려면 결국 힐튼 남작이 갈 곳은 단 한 곳, 절벽 쪽일 수밖에 없었다.

“절벽으로 간다.”

“남작님!”

일칸이 깜짝 놀란 얼굴로 힐튼 남작을 바라보았다. 피해를 입더라도 퇴각을 선택할 줄 알았지, 설마 절벽 뒤로 몸을 숨길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저들의 스피어를 피하는 것이 먼저다. 다행히 서쪽 절벽이 앞쪽으로 돌출되어 있으니, 스피어의 직접적인 공격을 막아 줄 것이다.”

“허나 절벽으로 간다면 스스로를 가둘 뿐입니다.”

힐튼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칸의 말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당장은 돌출된 절벽이 먼 곳에서 날아오는 스피어를 막아준다고 해도 절벽에 막혀 결국 다가오는 적들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힐튼 남작이 굳은 얼굴로 절벽을 바라보았다.

* * *

멀리서 들려오는 폭음소리에 추적대를 바라보고 있던 카일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졌다.

“이게 대체….”

뜬금없는 폭음에 달려온 주안의 얼굴에선 당황한 기색이 역력히 느껴졌다. 아무래도 주안이 놀란 이유는 단순히 새롭게 나타난 자들의 대단한 투창 실력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어디서 온 건지 아시겠습니까?”

긴장한 카일이 주안 기사단장에게 물었다.

“와이번 나이트가 아니면서도 저런 투창을 쓰는 곳은 왕실과 황실밖에 없다. 그중에서도 저렇게 피처럼 붉은 가죽 갑옷을 입고 다니는 곳은 오직 한곳밖에 없지.”

언젠가 보일에게서 붉은 트롤의 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입는 기사단에 대해 들은 기억이 있어 카일은 금방 그들의 정체를 유추해 냈다.

“제국 황실!”

“그렇네. 저들은 바로 카데인 제국의 황실기사단이네.”

“저들이 어떻게….”

주안의 말에 카일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왕실이나 대영지의 기사단이 아니라 갑자기 타국의, 그것도 제국의 기사단이 이 자리에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도 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 당장 절벽을 넘어야 해요.”

어느새 잠에서 깬 시안느가 카일과 주안의 대화를 들었는지 옆으로 다가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대로는 절벽을 오를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시안느의 말이 끝나기도 전 주안을 밀쳐낸 카일이 시안느를 안고 바닥을 뒹굴었다.

꽈앙-

몇 바퀴 정도 바닥을 구르고 나서야 카일은 머리를 치켜들 수 있었다. 그의 시선에 들어온 건 붉은 드레곤이 양각된 창대 하나가 절벽 깊숙이 틀어박힌 장면이었다.

“저곳엔 수백 미터 밖에서도 이곳까지 정확히 스피어를 던질 수 있는 실력자가 있는 이상, 함부로 절벽을 오를 수는 없습니다. 이대로라면 손쉬운 표적이 될 뿐입니다.”

이를 꽉 깨문 카일의 목소리에 일행들은 두려운 표정으로 절벽 깊숙이 박힌 스피어를 쳐다봤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주안만은 카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자신은 중급 엑스퍼트의 실력자였다. 그런데도 카일이 자신을 밀쳐내는 순간 무방비로 당하고 말았다. 만약 카일의 손에 단검이라도 들려 있었다면 자신은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대로 절벽에 갇혀 있을 수만은 없어요.”

“저도 이렇게 당하고 있을 생각은 없습니다.”

카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레더 아머 안쪽 허리에 감고 있던 검은색 재질의 허리띠를 풀어냈다.

“그건!”

허리띠를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은 바로 보틀러였다.

“그걸 가지고 있었나?”

보틀러의 어조에는 미묘한 반가움이 섞여 있었다.

“알아보시는군요.”

“이게 뭐죠?”

시안느가 머리에 잔뜩 묻은 흙을 털어내며 물었다. 허리에 감겨 있던 둥근 물체는 처음 볼 때는 가죽을 여러 겹 붙여 만든 벨트처럼 보였지만, 지금 자세히 보니 가죽이 아닌 알 수 없는 재질의 딱딱한 물체였다.

카일은 아무 말 없이 허리띠를 잡고서 서서히 구부리기 시작했다. 팔부터 시작해 어깨와 가슴까지 상체 근육 부풀어 올랐다. 순간적으로 카일의 몸 전체가 두 배로 커진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지금 카일이 얼마나 많은 힘을 주고 있는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뿌드득

그때 꿈쩍도 하지 않고 있던 허리띠가 서서히 역방향으로 구부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카일이 힘을 풀었을 때에는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작은 단궁 하나였다.

“활… 이었군요.”

시안느가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였다. 이미 카일은 오늘과 같은 일에 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 * *

“이런, 아무래도 실력이 줄었나 보군. 둘 다 실패하다니….”

후안 백작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꽂아 놓은 스피어를 뽑아 들며 말했다. 그러나 옆을 지키고 있던 페링 남작의 생각은 달랐다. 후안 백작이 비록 최상급 엑스퍼트에 오른 지 몇 년 되지 않았으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기사였다. 그러니 감이 떨어지거나 실력이 떨어져 투창에 실패했을 리가 없었다. 백작의 스피어를 막아냈거나 피했다는 건 상대해야 할 자들의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방증이었다.

“일단 절벽 위쪽 놈들부터 잡아야겠군.”

“아래가 아니라 위를 먼저 공격하겠다는 말씀입니까?”

페링 남작이 절벽의 사면으로 모습을 감춘 힐튼 남작의 기사단을 떠올리며 말했다.

“아래에 진을 치고 있는 놈들을 먼저 공격하면, 절벽 위에 있는 놈들이 암벽을 타고 이곳을 벗어날 수도 있다.”

“아!”

“잊지 마라. 우리의 목표는 왕국의 기사 놈들이 아니라 화이트 와이번의 알이다.”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페링 남작이 눈을 크게 떴다.

카일과 이니엘 일행은 절벽의 중간 부분에 머물고 있었다. 특히 한쪽이 약간 튀어나온 터라 만약 후안 백작이 이끄는 기사단이 절벽에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투창을 날릴 수 있는 각도가 줄어들 거라는 건 자명했다.

왕국의 기사단을 잡기 위해 절벽으로 접근하는 순간 투창에서 자유로워진 목표물들은 그대로 암벽을 넘어 사라져 버릴 것이다. 아무리 제국 기사단의 실력이 뛰어나다 해도 최상급 엑스퍼트인 후안 백작이 던진 스피어를 막아낼 정도의 실력자가 버티고 있는 이상, 단시간에 왕국기사단을 제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섣불리 병력을 분산시키는 건 위험했다. 기사들을 나누어 절벽 사면에 진을 치고 있는 왕국기사단을 공격하는 순간, 오히려 제국의 기사단이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저들이 마파린 후작가의 기사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북부 토샤 영지에서부터 이곳까지 쫓아온 자들로 알고 있습니다.”

“제법 끈질기게 따라붙었군.”

“몇 번 붙잡힐 기회가 있었지만 검은 여우들이 나서서 후작가의 추적대를 막은 덕분에 이곳까지 무사히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왕국에 잠입했던 검은 여우들이 제법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검은 여우는 제국에서 파견된 정보 조직으로, 이번에 토샤 자작가에서 화이트 와이번의 알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낸 정보 조직이었다.

이니엘 영애와 주안 기사단장은 호위 기사들의 희생으로 다핸 남작령까지 도주할 수 있었다고 믿고 있었지만, 사실상 제국의 검은 여우 조직에 의해 이곳으로 유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화이트 와이번의 알이다. 후작도 최고의 전력을 보낼 수밖에 없었을 테지. 덕분에 우리 또한 이렇게 오크 랜드까지 오지 않았나.”

후안 백작의 말속엔 그의 분노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이번 일은 황실의 기사단이 아니라 귀족파, 특히 아이젠 공작이 먼저 계획한 일이었다.

처음 계획은 샤론 마을로 이니엘 영애 일행을 끌어들인 뒤 아이젠 공작가의 기사단을 투입해 화이트 와이번의 알을 탈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젠 공작도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니엘 영애 일행이 급작스럽게 오크 랜드로 향한 것이다. 때문에 아이젠 공작은 급히 계획을 수정, 황실을 충동질해 제국 근위 기사단을 파견한 것이다.

“그것도 그렇겠군요. 헌데 절벽은 어떻게 오르실 생각입니까? 저 정도 높이라면 어지간히 능숙하지 않은 이상 쉽게 오를 수 없습니다.”

“쉽게 오를 수 없다면, 쉽게 오를 수 있는 길을 만드는 수밖에!”

후안 백작이 들고 있던 스피어를 힘껏 날렸다.

* * *

꽝- 꽈앙

후안 백작이 스피어를 집어 들자 잔뜩 긴장하고 있던 일행들은 후안 백작의 스피어가 박힌 곳을 보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백작이 던진 창들이 그대로 절벽 아래쪽에 연달아 박히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젠장! 놈들이 절벽을 먼저 오르려 합니다.”

“무슨….”

곧 백작의 의도를 깨달은 카일이 욕설을 뱉으며 말했다. 그러자 시안느가 급히 절벽 앞까지 다가와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며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벌써 다섯 개의 스피어가 절벽 위쪽을 향해 일정한 간격으로 박혀 들고 있었다.

“이 위쪽만 공략하면 마파린 후작의 기사들과 직접 부딪히지 않고도 와이번의 알을 노릴 수 있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일단은 절벽을 올라오는 놈들을 집중 공격해야 합니다.”

“하지만 무슨 수로 공격을 하겠나. 자네야 화살이 있지만, 우리가 가진 거라고는 단검 몇 개와 검뿐이네.”

“일단은 돌이라도 주워 올라오는 기사들을 맞추세요. 저들이 올라오면 그때는 정말 방법이 없을 겁니다.”

카일은 발 앞쪽에 밤사이 잔뜩 만들어두었던 화살 뭉치를 꽂은 다음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는 화살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옵니다.”

카일이 낮게 경고했다. 일행들은 절벽 주변에 떨어져 있던 돌덩이를 급히 모아 절벽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 붉은 레더 아머를 입은 수십 명의 기사들이 빠르게 달려오는 모습들이 들어왔다. 붉은 선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단 착각이 들 정도로 신속하고 기민한 움직임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들어온 자는 가장 선두에서 붉은 피풍의를 휘날리며 다가오는 자였다. 바로 투창을 던진 후안 백작이었다.

뿌드드득

카일이 화살을 걸어 천천히 활을 당겼다. 또 다시 카일의 상체가 크게 부풀어 올랐다. 가까워지는 붉은 물결을 조준하고 있던 카일은 첫 번째 붉은 점이 절벽을 향해 뛰어오르는 순간을 정확히 노렸다.

피이잉

활시위가 놓였다. 화살은 빛과 같은 속도로 목표를 향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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