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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용병라이더-46화 (46/404)

46.절벽위에서 2

“딱히 그런 걸 의도한 건 아닙니다. 제가 이 길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어요. 바로 저들을 파악하기 위해서입니다.”

동쪽을 가리키던 카일은 화살대를 돌려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서쪽은 지금까지 카일 일행이 향하던 방향이었다.

그곳에도 여러 불꽃이 뭉쳐 타오르고 있었다.

“저건…?”

“정체는 모르겠으나 저들도 대략 반나절 거리에 있습니다.”

만일 처음 계획대로 고원을 가로질렀다면 아침나절에 기습을 받거나, 정면에서 딱 마주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쓸어내리던 주안이 말했다.

“설마 마파린 후작의 추적대가 둘로 나뉜 건가?”

힐끔 서쪽을 바라본 카일은 다듬던 화살대로 시선을 돌린 뒤 대답했다.

“글쎄요. 제 생각에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전혀 다른 세력이 끼어든 모양입니다.”

“저들이 마파린 후작의 추적대가 아니란 말이냐?”

“저도 서쪽 길은 모두 파악하고 있진 않습니다만 그쪽은 평원에서 고원으로 진입하는 곳과 맞물려 있어 아마도 대규모 오크들이 서식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곳을 단 며칠 만에 주파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최소한 우리가 마을에서 출발할 때쯤 저들도 출발을 했거나, 오히려 우리보다 먼저 움직였어야 얼추 시기가 맞죠. 하지만 그때는 추적대도 우리가 오크 랜드로 향한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결국 저들은 마파린 후작가의 추적대가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 말인즉슨 전혀 새로운 자들이 줄곧 우릴 쫓고 있단 말인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주안 단장에게 카일은 안심하라는 듯이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저들이 왕국의 서쪽에서 온 자들이기만을 바래야겠지요.”

“저들이 서쪽에서 온 자들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인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보틀러가 되물었다. 동쪽에서 출발한 추적대가 동쪽에서 야영을 하고 있으니, 서쪽에서 야영을 한다는 건 서쪽에서 왔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한 것일 텐데, 카일이 ‘그러길 바란다.’고 하자 깜짝 놀란 것이다. 피툰 역시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카일은 이 둘을 향해 차분히 설명했다.

“반대편에서부터 오크 랜드를 관통해 달려왔을 수도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오크 랜드는 남북으로는 짧지만, 동서로는 길게 뻗어 있는 곳입니다.”

“만약 저들이 동에서 서로 오크 랜드를 돌파했다면….”

“이곳에 있는 누구도 살아남기 힘들 겁니다. 단시간에 오크 랜드를 돌파했다는 건 일행 중 상당한 실력자가 포함되어 있단 소리니까요. 어쩌면 와이번 나이트가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고일이….”

“가고일 무리의 영역과는 다소 가깝기는 합니다. 그러나 앞서 가고일들이 와이번을 공격한 것은 둥지 주변에 상위 포식자인 와이번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른 곳이었다면 가고일들이 와이번을 먼저 공격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카일이 말을 끝맺자 모든 이들의 낯빛이 거무죽죽하게 변했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일은 태연하게 화살을 다듬고만 있었다.

“자네는 아무렇지도 않은가? 저들에게 공격받을 시 자네 또한 무사하지 못할 텐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저들 중 와이번 나이트만 없다면 그래도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입니다.”

“해볼 만하다?”

“만약 추적대와 새로 나타난 자들이 같은 편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기회가 있지 않겠습니까?”

침통하게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시안느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서로 싸움을 붙이겠다는 말인가요?”

“새롭게 나타난 자들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서로 같은 편이 아닌 건 분명하니, 필연적으로 싸움이 벌어질 수밖에 없겠죠. 더군다나 우리는 지금 절벽 위에 있습니다. 저들보다 지형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을 뿐만 아니라, 적들과 직접적으로 마주칠 일이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겁니다. 여차하면 저들끼리 싸움을 붙인 뒤 우린 이곳을 넘어가면 되고요.”

“아!”

“물론 와이번 나이트까지 왔다면 힘들어지겠지만 추측건대 그런 것 같진 않습니다. 만약 와이번 나이트가 있었다면 피해를 입으면서까지 저렇게 오크들을 몰살할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더니. 주안은 깊은숨을 내쉬며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휴~. 다행이군! 자네의 말이 맞다면 우리에게도 아직 기회가 있다는 말이니까.”

“그저 희망 사항일 뿐입니다. 제 생각이 틀릴 수도 있어요.”

덤덤하게 자신의 말이 틀렸을 수도 있다 말하는 카일을 바라보며, 주안 단장은 머릿속으로 소년의 나이를 떠올려보았다. 이제 고작 17살, 해가 바뀌면 18살이 되는 소년은 숲에 대한 지식과 앞일을 예견하는 통찰력, 그리고 타고난 체력과 힘을 지니고 있었다. 여러모로 뛰어난 재목이라 할 수 있었다.

‘아직은 좀 더 지켜보는 게 좋겠지.’

그 생각을 끝으로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주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절벽 틈 바로 입구에 자리를 잡고 털썩 주저앉았다. 가장 안쪽에 자리 잡은 영애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보틀러와 피툰은 주안의 반대쪽에 자리를 잡고 잠자리를 만들었다.

“활도 없는데 화살은 왜 자꾸 만드나요?”

한쪽에 쌓인 화살대를 보며 시안느가 말했다. 서쪽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존재들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쉬지 않고 만들다 보니 이제 수십 대의 화살대가 한쪽에 쌓여 있었다.

“라스피 나무만 보면 자연스럽게 화살을 만들다 보니….”

카일은 시안느의 물음을 대충 얼버무리면서도 화살을 깎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대충 50발이 넘는 화살대를 만들었을 때, 카일은 가죽가방 안에서 쇠로 만든 작은 철합을 꺼내어 모닥불 가까이에 두었다. 시안느는 잊을만하면 신기한 물건이 튀어나오는 카일의 가방을 흥미롭다는 듯이 관찰했다.

“이건 뭔가요?”

작은 솥처럼 생긴 물건을 불가에 가져다 놓자 시안느가 말똥말똥 눈을 빛내며 물었다.

“블루 우드의 진액과 오크의 가죽을 녹여 만든 아교풀입니다. 접착력이 제법 강합니다.”

카일이 웃으며 철합의 뚜껑을 열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투명한 갈색 덩어리가 모닥불의 열기에 의해 조금씩 녹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걸 항상 가지고 다니나요?”

“순찰을 돌 때면 가끔 필요할 때가 있어, 이렇게 늘상 가지고 다닙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카일은 가방의 앞주머니에서 남청색의 무언가를 꺼내어 놓았다. 처음 보는 생소한 재질의 물건에 가늘게 눈을 뜬 시안느가 물었다.

“이건?”

“가고일의 깃털입니다.”

“가고일에 깃털이 있다니. 처음 들어봐요.”

“아, 깃털이라고 보기엔 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비늘이라고 하는 게 적합하겠네요. 이것들은 지난번 와이번과 싸우던 가고일들이 떨어트린 것들입니다. 가고일의 날개 가장 안쪽에 자리한 비늘이라, 얻기 쉬운 물건은 아니지요.”

카일이 들고 있던 긴 삼각형 모양의 비늘 하나를 시안느에게 건네주었다. 둥근 삼각형 모양으로 이루어진 비늘은 생각보다 딱딱하지 않았고 날짐승의 깃털처럼 부드러웠다. 다만 진짜로 짐승의 깃털은 아니었기에 가는 털로 이뤄진 대신, 파충류의 비늘같이 하나의 조직으로 되어 있었다.

“엄청 단단해 보였는데 예상외로 부드럽네요.”

시안느가 가고일의 비늘을 이리저리 만져 보고 있을 때 카일은 허리에서 단도를 꺼내 비늘을 반으로 잘라, 아교를 이용해 만들어 놓은 화살대에 붙이기 시작했다. 중앙이 두껍고 양쪽으로 가늘어지는 형태라 화살대에 깃털 대신 쓰기에는 좋은 재료였다.

“가고일의 안쪽날개는 알을 품어야 하기에 부드럽지만, 바깥쪽은 아주 단단해서 방어구를 만들 때 간혹 사용하지요.”

“들어본 적이 있어요. 가고일의 비늘은 단단하고 가벼워서 값이 무척 비싸다고 하더군요.”

“가고일 둥지 주변에서 어렵게나마 구할 수 있는 바깥쪽 비늘과 달리, 지금 제가 들고 있는 안쪽 비늘은 얻기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힘듭니다. 아마 와이번과의 전투가 아니었다면 저도 이렇게 얻지 못했을 거예요.”

시안느는 만지작거리던 비늘을 카일에게 되돌려 주었다.

“화살촉이 없으면 화살을 만들어도 소용이 없을 텐데. 혹시 화살촉도 가지고 다니나요?”

화살대에 자른 비늘을 붙이던 카일의 손이 멈췄다. 그는 살짝 미소짓더니 또다시 가방 깊숙한 곳에서 작은 자루를 꺼내 보였다.

“정말이군요! 세상에나.”

시안느가 가죽 주머니 안을 열어보며 말했다. 안쪽에는 수십 발은 만들 수 있는 화살촉이 가득 들어있었다.

“화살촉까지 가지고 다닐 줄은 몰랐어요.”

“화살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불편하니까요. 지천에 재료가 있으니 굳이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죠.”

“하지만 몬스터를 사냥하는 데는 화살은 잘 사용하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어지간한 강궁이 아니면 오크의 가죽을 뚫기는 힘들다고 하던데요? 굳이 이렇게 화살을 만들 필요가 있나요?”

“이렇게 만들어 놓으면 쓸 때도 있을 겁니다. 추적대가 절벽을 올라오면 오러를 이용해 아래로 던져도 될 겁니다.”

카일의 말에 시안느가 화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절벽의 높이가 있으니 아래에서 올라오는 추적대에게 오러를 이용해 던져도 제법 위력이 클 것 같았다. 굳이 큰 상처가 아니더라도 팔이나 어깨 쪽에만 맞아도 절벽에서 떨어질 수도 있었다. 특히 절벽을 올라가는 중이라면 더더욱 피하기 힘들 것이다.

“좋아요. 그럼 제가 도와드릴게요!”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해도 됩니다.”

카일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같이 하면 금방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시안느가 다듬어 놓은 화살대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 모습에 카일이 고개를 저으며 화살촉을 건넸다.

“그럼 화살촉을 화살대에 붙여주세요.”

카일이 직접 화살대에 아교를 바르고 화살촉을 붙이는 시범을 보여주었다.

다듬어 놓은 화살대 끝을 녹은 아교풀이 살짝 담갔다가 꺼내 화살촉을 끼우면 끝나는 아주 단순한 작업이었다.

“화살촉이 삐뚤어지면 안 됩니다.”

“걱정 말아요. 이 정도는 저도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화살대에 가고일의 비늘을 붙이기 시작했다. 한동안 화살 깃을 붙이는 일에 집중하던 카일이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휴~. 일이 늘었군.”

카일이 화살촉을 붙이다 말고 졸고 있는 시안느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붙여 놓은 화살촉 대부분이 삐뚤어져 있어 다시 붙여야 했다.

카일은 비뚤어진 화살촉을 잘라낸 다음 불 속으로 집어넣었다. 아교로 굳어진 상태라 화살촉에 붙어 있는 나무를 태워야 화살촉을 다시 쓸 수 있기 때문이었다.

* * *

“이거 골치 아프게 되었군.”

힐튼 남작은 이른 새벽녘 절벽 위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라보며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기습을 하기 위해 새벽을 틈타 달려왔건만 이니엘 영애가 있는 곳은 높은 절벽의 중턱이었다.

몰래 절벽 아래까지 접근한다 해도 아마 절벽을 타고 오르는 중 발각될 가능성이 높았다.

더군다나 이곳은 낮은 풀들과 잡목들이 주를 이루고 있어 주변 재료로 밧줄을 만들기도 힘들었다. 그렇다고 맨몸으로 바위 절벽을 오르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들이 뛰어난 엑스퍼트 기사이긴 했으나, 절벽 위에서 공격을 받아 추락하면 죽거나 다치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어떤가?”

힐튼 남작이 주변을 살피고 돌아온 일칸에게 물었다.

“밧줄로 쓸 만한 것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잡목의 줄기를 벗겨 만들 수도 있지만….”

“그때는 이미 절벽을 넘어 사라진 후겠지.”

힐튼 남작이 끙하는 침음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그로서는 전혀 생각지 못한 상황에 부닥치고 만 것이다.

“도대체 저 높은 절벽을 연약한 영애를 데리고 어찌 올랐지?”

밧줄로 사람을 끌어 올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밧줄이 바위에 쓸려 끊어질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어찌합니까? 이대로 저들이 절벽을 넘어간다면 큰일이 아닙니까?”

“이럴 줄 알았다면 와이번 나이트들을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었는데.”

힐튼 남작이 난감한 얼굴로 절벽 위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힐튼 남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더니 일칸을 힘껏 밀어내며 앞을 막아섰다.

“비켜!”

힐튼 남작에게 밀려난 일칸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가 바닥에 볼썽사납게 뒹굴었다. 그와 동시에 힐튼 남작의 중검이 무섭게 뽑혀 나와 하늘에서 떨어지는 무언가를 막아냈다.

꽈앙-

엄청난 폭음이 울렸다.

힐튼 남작의 몸이 뒤로 주르르 밀려났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에는 붉은 용이 새겨진 스피어 한 자루가 땅에 깊숙이 처박혀 있었다. 힐튼 남작이 아니었다면 일칸은 그대로 스피어에 관통당해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레드 드레곤이라면… 카데인 제국 황실기사단!”

쓰러져 있던 일칸이 급히 일어나며 바닥에 박혀 있는 붉은 단창을 바라보더니 무언가를 깨닫곤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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