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절벽위에서 1
카일이 가방을 등에 짊어졌다. 그 모습은 마치 카일과 이니엘 영애가 등을 맞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등을 등받이에 완전히 기대셔야 합니다. 그래야 무게 중심이 뒤로 쏠리지 않고 아가씨께서도 편안하실 겁니다.”
카일의 말에 몸을 잔뜩 앞으로 웅크리고 있던 이니엘이 쭈뼛쭈뼛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어떻습니까? 조금 더 편하지 않습니까?”
“정말 편한 것 같아요.”
이니엘 영애가 한결 편안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온종일 시안느의 등에 업혀 왔지만, 결코 편하다고는 볼 수 없었다.
아무리 충격을 주지 않고 달리려고 해도, 지쳐있는 시안느로서는 흔들리는 충격을 완전히 막을 수 없었고 그건 고스란히 영애에게 돌아갔다. 결국 걸음을 멈췄을 때는 시안느와 영애 둘 모두 녹초가 되어 지쳐있을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가죽가방은 카일의 등판에 맞게 넓었고 크기가 영애의 체구와 딱 맞아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가방의 바닥에 덧대어진 나무판이 있어 힘들게 등 뒤로 매달려 있지 않아도 괜찮았다. 고생한 시안느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내내 업혀 온 것보다 훨씬 편하고 안정적이었다.
“그럼 올라가겠습니다. 되도록 아래는 내려 보지 마십시오. 그저 멀리 풍경을 감상하신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카일은 혹시나 영애가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다 겁을 먹고 발작이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미리 영애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등 뒤에서 발작이라도 일으키면 둘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걱정 말아요.”
카일의 뜻을 알아차린 이니엘이 대답을 하자 카일이 천천히 밧줄을 잡고서 능숙하게 절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아! 정말 아름답네요.”
꽤 높이 올라왔을 무렵 카일의 등 뒤로 작은 탄성이 들려 왔다.
발밑으로 펼쳐진 오크 랜드와 평원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줄기가 저물어가는 붉은 태양 빛에 반짝반짝 빛나는 풍경에, 이니엘이 감탄한 것이다.
추적대에게 쫓기는 현실을 잊을 만큼 아름답고 평온한 풍경이었다.
“이렇게 평온한 곳이 죽음으로 가득한 오크 랜드라니….”
“그것은 인간의 기준일 뿐입니다.”
매끈한 절벽 사이, 작은 혹에 발을 디디고 한발 한발 올라가는 것에 집중하던 카일은 이니엘의 말에 무심코 대꾸했다.
“인간의 기준이요?”
“인간들이 보기에는 이곳이 오크와 몬스터가 가득한 죽음의 땅으로 보일지 몰라도, 동물들과 오크에게는 나름의 영역을 지키며 살아가는 평화로운 공간이라는 말이죠.”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간단합니다. 한 가지 간단한 예를 들자면… 이곳에 존재하는 수십만 마리의 들소가, 평원을 떠돌며 오랜 시간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과연 이 땅을 인간들이 점령하고도 들소들이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건….”
“이 땅에 인간들이 정착하면 넓은 평원을 개간하여 농토로 바꾸겠죠. 그럼 들소들은 갈 곳을 잃게 될 겁니다. 그게 끝이 아닐 겁니다. 인간들은 들소들의 가죽과 고기를 얻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사냥을 하겠지요.”
“하지만 오크들도 들소를 사냥하지 않나요? 그들도 가죽과 고기를 위해 사냥을 하잖아요.”
“하지만 인간처럼 농토를 위해,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 사냥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먹을 것을 얻기 위한 가장 원초적인 목적으로 사냥을 할 뿐이지요. 오크들의 사냥 때문에 매해 수천수만 마리의 소 떼가 죽어 나갈 순 있어도, 수십만 마리의 소 떼는 평원의 풀을 뜯으며 평화로이 살아갈 겁니다. 필요한 만큼의 적당한 고기를 얻으면 오크들은 사냥을 멈추니까요.”
“인간이 나쁘다는 말인가요?”
“글쎄요. 서로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다고 할까요? 어찌 되었든 오크나 몬스터가 인간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인 것은 분명하니까요.”
입술을 달싹이던 이니엘은 이내 말없이 평원을 바라보았다. 카일의 말속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 갔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깊게 생각하기에는 그녀는 너무 지쳐있었기 때문이었다.
“다 왔습니다.”
카일의 말에 이니엘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벌써 절벽의 중턱이었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십시오. 전 다시 내려갔다 오겠습니다.”
“또 내려가나요?”
이번까지 하면 절벽을 3번이나 왕복하게 되는 셈이었다. 한 번도 올라오기 힘든 곳을 세 번이나 연이어 반복한다는 말에 이니엘의 낯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시안느 경 역시 많이 지쳐있을 겁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카일은 손사래 쳤다. 다시 한번 밧줄이 잘 묶여 있는지 확인한 그는 암벽을 타고 내려가다가 숨을 고르며 중간에 멈춰 섰다.
“휴~. 이만하면 값은 충분히 치른 것 같은데….”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그는 이마 위로 흐르는 땀을 닦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니엘 앞에선 괜찮은 척했으나 그로서도 절벽을 여러 번 왕복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 * *
“저도 가방 안으로 들어가라고요?”
황당함을 숨기지 못한 시안느가 가방과 카일을 번갈아 봤다.
“그렇습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저 혼자서도 얼마든지 절벽을 올라갈 수 있다고요.”
“물론 지금은 어떻게 해서든 올라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내일은 올라갈 수 있습니까?”
“당연히…!”
발끈한 시안느가 자신만만하게 소리치려 했지만 결국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 스스로도 상당히 무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절벽을 오른다면 어쩌면 내일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녹초가 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모르는 게 아니라 분명 그렇게 될 것이다. 기사단장인 주안 역시 이를 걱정해 절벽으로 올라가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다.
“저도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나머지 일은 세 분께서 알아서 하셔야 합니다.”
카일의 말에 보틀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말게. 남은 짐들이야 그리 무겁지 않은 식량뿐이니, 아래에서 밧줄에 묶어 올리면 될 거야. 그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네.”
“서둘러야 하지 않을까요? 곧 날이 저물 것 같은데?”
노을이 지는 하늘을 흘긋거린 피툰이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그럼 단장님부터 올라가시지요. 지금 위에는 아가씨께서 혼자 계십니다.”
카일의 말에 주안이 결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먼저 올라가지!”
깊게 심호흡한 주안은 밧줄을 잡고 암벽을 등반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기사단장이지만 절벽 위로 올라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사들이 언제 이런 일을 겪어 보겠는가? 오히려 이런 일은 기사들보다 산전수전 겪은 용병들이 더 능숙했다.
“이제는 올라가야 합니다. 어쩌시겠습니까?”
카일의 재촉에 시안느는 입술을 깨물곤 가방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시안느는 이니엘 영애와는 달리 가방 안으로 들어가기에는 체구도 클 뿐만 아니라 기사 특유의 갑옷과 검을 들고 있어 가방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그녀는 영애와는 달리 가죽가방 위에 그냥 앉을 수밖에 없었다. 마치 카일의 등 뒤로 업힌 것 같이 보이는 모양새였다. 카일은 혹시나 시안느가 떨어질 것을 우려해 가죽끈으로 시안느와 가방을 통째로 허리에 단단하게 고정 시킨 후 절벽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여인이라고는 하지만 무장을 한 사람을 업고서 올라간다는 것은, 이미 두 번이나 절벽을 왕복한 카일로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어느 정도 올라왔을 때 카일의 등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기 시작했다. 거칠어진 그의 숨소리가 시안느의 귀에도 생생하게 들려 왔다.
“많이 무거운가요…?”
시안느가 모기만 한 목소리로 물었다. 카일은 볼 수 없었지만 시안느의 얼굴은 잔뜩 붉어져 있었다. 영애를 업고 올라갔다가 멀쩡한 상태로 내려온 카일이 자신을 업고선 땀을 비 오듯 쏟아내고 있으니, 여인으로서 괜스레 민망한 마음이 든 것이다.
“이런, 시안느 경이 뒤에 있었군요. 등 뒤로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 깜빡했습니다.”
능청스러운 카일의 대답에 시안느의 입꼬리가 비죽 솟았다. 비록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결코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이제 다 와 갑니다. 올라가면 편히 쉴 수 있을 겁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일의 말대로 중턱 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 카일은 시안느와 연결된 가죽끈을 풀어 시안느를 내려준 후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바위에 몸을 기대었다.
뒤이어 올라온 피툰은 밧줄을 끌어당겨 아래쪽에 놓아둔 짐들을 하나둘씩 절벽 위로 올렸다. 보틀러는 짐을 다 챙긴 뒤 마지막으로 도착했다.
다행히 이곳은 평평한 공간 뒤로 바위틈이 ㅅ자 형상으로 벌어져 있는 터라, 산 밑에서 올라오는 바람을 막기에 충분했다. 간단한 야영을 하기에 딱 좋게 아늑한 공간이었다.
더군다나 주변에 라스피 나무 군락이 형성되어 있어, 낙엽과 마른 가지가 두텁게 쌓여 있는 덕에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막아주었다. 겸사겸사 모닥불도 피울 수 있었다.
“이곳에 온 적이 있나 보군요.”
카일이 능숙하게 낙엽을 깔아 잠자리를 만들고 모닥불을 피우자, 그 모습을 빤히 관찰하던 시안느가 물었다.
“이곳은 오래전 아버지께서 발견하신 곳입니다. 전 이번에 세 번째입니다.”
카일은 엄지손가락 굵기의 라스피 나무를 단도를 이용해 다듬으며 말했다.
“함께 이곳에 왔을 때 아버지께서 가장 먼저 가르쳐 주신 건, 이 라스피 나무를 이용해 화살을 만드는 법이었죠.”
슥삭 슥삭
라스피 나무의 껍질을 벗긴 카일은 불을 이용해 굽을 나무를 곧게 폈다. 자리를 잡고 불을 피운 짧은 시간 사이에 벌써 열대가 넘는 화살대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시안느가 의아하게 생각한 것은 갑자기 자리를 잡고 앉아 화살을 만들고 있는 카일의 모습이었다.
“당신… 단순히 절벽을 넘어가기 위해서 이곳으로 온 것이 아니었군요.”
“절벽을 넘어가려는 계획은 처음에는 없었습니다. 중간에 계획을 바꾼 것이죠.”
시안느는 곧장 카일이 말한 바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갑자기 사라진 오크들 때문인가요?”
“오크가 사라진 이상 추적대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추적대보다 오크가 사라진 것이 더 문제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오크 랜드에 오크가 없다?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오크들도 영역을 다투지만 절대 몰살을 시키지 않습니다. 패한 우두머리를 죽이고 두 세력이 하나로 합쳐질 뿐이죠.”
“결국 오크가 아닌 강대한 적이 등장했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더군다나 이렇게 우리의 앞길을 막고 나타났다는 것은 아무래도 일반적인 몬스터는 아닐 거란 생각이 듭니다.”
여전히 화살대를 다듬는 카일의 음성은 덤덤했으나 그 내용은 결코 덤덤하게 들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지금 이 오크 랜드에 마파린 후작가의 기사들 말고도 다른 자들이 들어와 있다는 말인가요? 말도 안 돼요! 어떻게 오크 랜드에….”
“이상할 것 없습니다. 오크 랜드라고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는 건 아니니까요. 저희 역시 외곽이지만 오크 랜드에 들어와 있지 않습니까?”
“그건 자네가 능숙하게 길을 안내하고 있기 때문 아닌가?”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주안 기사단장이 다가와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물론 그렇습니다. 허나 이곳 오크 랜드로 들어오는 길은 여러 곳입니다. 길잡이가 저 하나뿐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소수 정예의 실력자들이 있다면, 피해가 크기는 하겠지만 분명 들어올 수도 있을 겁니다.”
“허나 이는 모두 추측이 아닌가? 오크들이 사라진 다른 이유가 있다면?”
어느새 잠이든 이니엘 영애를 제외한 모두가 모닥불 앞으로 모여들었다. 좌중을 둘러본 카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화살대를 들어 그동안 지나온 동쪽을 가리켰다.
“저기 보시면 작은 불빛이 보이실 겁니다. 저희를 추적해온 자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대략 반나절 정도 떨어진 거리입니다.”
모두들 카일이 가리킨 방향으로 머리를 빼 들었다. 카일의 말대로 작은 불꽃이 여럿 뭉쳐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절벽 위로 오른 것은 저들을 확인하기 위해서인가?”
점점이 찍힌 불꽃들을 바라보던 주안이 말했다. 확실히 높은 지대라면 추적대의 위치를 파악하기 쉬울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