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고원에서 2
“설마 저들이 와이번들을 동원할 걸 알고 이곳으로 온 건가요?”
공중에서 치열하게 싸움을 벌이는 가고일과 와이번 나이트들의 모습을 보며 시안느가 물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가고일들은 야행성이라 이렇게 해가 질 무렵에 둥지를 나와 활동을 시작합니다. 단지 시기가 맞았을 뿐입니다.”
카일은 하늘 위를 빠르게 움직이는 와이번들을 신기한 듯 바라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곳에 가고일의 둥지가 있다면 마을이 위험하지는 않나요?”
일행들이 며칠 동안 걸어 이곳 고원으로 진입을 했지만, 하늘을 날아다니는 가고일이라면 마을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리였다.
“저들은 산맥을 넘어오지 않습니다. 주로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며 평원을 돌아다니는 오크들을 사냥하며 살아갑니다. 가고일들이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것 같지만, 산맥을 넘어 장시간 비행할 정도로 오랫동안 날지는 못합니다.”
“그런가요?”
하늘을 바라보던 이니엘이 흥미롭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가고일이 와이번을 상대할 수 있을까요? 비록 숫자는 많다고 하지만… 가고일이 아무리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가지고 있어도 와이번들의 비늘은 뚫지 못할 거예요.”
시안느가 와이번들에게 득달같이 달려드는 가고일 무리를 보며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수백 마리의 가고일 무리가 와이번에게 달라붙어 있긴 했으나, 오히려 와이번들의 공격을 받은 가고일들이 하늘에서 무수히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물론 가고일들이 와이번을 죽일 수는 없겠죠. 하지만 저곳에는 와이번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아! 와이번 나이트!”
보틀러는 카일이 무엇을 말한 건지 단박에 눈치챘다. 아무리 많은 가고일들이 공격을 가한다고 해도 와이번의 넓은 날개와 단단한 비늘을 뚫을 수는 없을 터였다. 하지만 와이번을 타고 날아다니는 와이번 나이트들은 달랐다.
비록 와이번들이 빠르기는 하지만 순간적인 가속도나 방향전환은 오히려 와이번보다 체구가 작은 가고일들이 더 민첩했다. 그만큼 집단적인 가고일의 공격은 와이번 나이트에게는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와이번들이 적극적으로 가고일을 공격하지 않고 피하기만 하는 게….”
“아마도 맹약자를 보호하려는 것이겠지!”
주안 기사단장 역시 하늘 위에서 벌어지는 가고일과 와이번들의 전투를 보며 말했다. 아무리 엑스퍼트 급 기사들이라도 가고일 수 마리를 직접 상대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 하늘 위를 무리 지어 날아다니는 가고일은 무려 수백 마리에 달했다. 아무리 엑스퍼트 기사라도 감당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다. 때문에 와이번들도 직접적으로 가고일을 공격하지 않고 피하면서 맹약자를 보호하고 있던 것이다.
“저들이 가고일에게 둘러싸여 있는 지금이 이곳을 벗어날 기회입니다. 따라오세요.”
카일이 바짝 엎드려 있던 잡목지대에서 일어나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가고일이 와이번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해도, 그 숫자가 수백 마리에 달하는 이상 일행 역시 가고일의 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 * *
“키아악~.”
비명 같은 소리를 내뱉으면서 가고일 한 마리가 빙글빙글 돌며 볼품없이 추락했다.
골드 와이번 위에 올라선 기사들은 푸른 오러를 두른 롱 소드를 휘두르며, 공격해 오는 가고일들을 떨쳐 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놈들을 떨어트려야 한다!”
빌리얀은 급히 고도를 높였다. 동시에 와이번에게 들러붙어 있는 가고일을 떨쳐 내려 했지만 가고일들은 물러나긴커녕 더욱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빌리얀!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빌리얀의 머릿속으로 와이번의 음성이 들려왔다.
“젠장, 조금만 버텨!”
쩡-
빌리얀은 와이번의 방어를 뚫고 다가온 가고일의 이빨을 급히 쳐냈다. 와이번보다 못할 뿐이지, 가고일 역시 단단한 가죽과 비늘로 이루어져 있어, 오러를 두르지 않은 검으로는 가고일의 공격을 되받아치는 게 고작이었다.
-가고일 따위의 공격은 나의 비늘을 뚫지 못한다.
또다시 머릿속에 올리는 와이번의 음성에 빌리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결국 와이번이 이곳을 벗어나려는 이유는 바로 맹약자인 자신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맹약자를 잃을 수는 없다. 이 아래에는 가고일들의 둥지가 몰려 있다. 가고일들은 절대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나도 죽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아직 신호가 오지 않았단 말이야!”
빌리얀은 꾸역꾸역 몰려드는 가고일들을 베어내며 안장을 흘긋 내려다보았다. 안장에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스피어 십여 개가 가지런히 꽂혀있었다.
모두 와이번 나이트들이 공중전을 벌이거나 지상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하는 스피어들로, 적 와이번들의 가죽을 뚫을 수 있게 미스랄의 순도를 높여 만들어진 값비싼 고 합금 무기였다.
빌리얀은 당장이라도 스피어를 뽑아 다가오는 가고일들을 공격하고 싶은 욕망을 눌러 참았다. 수백 마리에 달하는 가고일에게 고작 십여 개에 불과한 스피어를 던져봤자 큰 의미가 없이 값비싼 스피어만 소모하게 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 * *
“저기에 이니엘 영애가 보입니다.”
잡목지대를 빠져나오는 일행을 발견한 일칸이 힐튼 남작에게 말했다. 그러나 힐튼 남작은 미간을 구긴 채 와이번 나이트와 가고일의 전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남작님….”
“이대로 고원으로 내려갈 수는 없다. 저들은 잡목과 덤불 숲이 그나마 몸을 가려주지만 우리는 평원을 가로질러야 한다. 당장 가고일들에게 발각당하고 말 것이야.”
남작 역시 당장이라도 평원으로 달려가 놈들을 잡고 싶었지만, 하늘을 까맣게 뒤덮은 가고일 무리로 인해 선뜻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만약 가고일 무리의 공격을 받게 된다면 힐튼 남작이나 일칸은 몰라도 뒤를 따르는 기사단은 큰 피해를 볼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저들을 놓치면, 다시 따라잡기는 힘들 겁니다.”
이니엘 영애와 하늘을 번갈아 보던 일칸이 초조히 말했다. 이곳에 수백의 가고일 무리가 있는 이상 와이번을 통해 추적을 이어나가기 힘들 게 뻔했기 때문이다. 비록 가고일이 야행성이긴 하지만 자신들의 영역을 침입한 강력한 적을 발견했으니, 낮에도 돌아다니며 경계를 설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무모하게 기사를 잃을 수는 없는 일! 아쉽지만 지금은 물러나야 하네. 그리고 서둘러 와이번 나이트들을 불러들이게.”
와이번 나이트들이 더는 버티기 힘들어 보이자 힐튼 남작은 고민을 끝내고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여기서 와이번 나이트를 잃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야. 자칫 와이번까지 잃을 수가 있으니 말이네.”
힐튼 남작의 말에 일칸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와이번 나이트가 죽어버리면 와이번들은 새로운 맹약자를 찾아 3일간 주변을 떠돌았다. 그러나 새 맹약자를 찾지 못하면 그대로 떠나버리고 말기에 지금처럼 위험한 상황을 오랫동안 방치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이곳에 엑스퍼트 급의 실력자들이 있다고 해도 가고일들이 몰려 있는 이상 와이번 나이트를 잃은 와이번과 새롭게 맹약을 맺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우리도 이곳에서 물러난다. 자칫 가고일과 마주칠 수 있다.”
가장 먼저 바위 위에서 내려온 힐튼 남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반론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단호한 행동이었다.
* * *
“와이번들이 물러가는군요.”
부지런히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하늘 상황을 확인하던 카일이 발을 멈추곤 말했다. 과연 그의 말처럼 하늘 위에서 치열하게 싸우던 와이번들이 빠르게 동쪽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수십 마리의 가고일들이 죽었지만 가고일들은 와이번들이 둥지에서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집요하게 추적했다.
“와이번들이 물러난 건 아마도 가까운 곳에 추적대들이 도착했기 때문일 거다.”
한시름 덜 법도 한데, 주안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주변에 추적대가 도착해 있다면 걸음이 느린 이니엘 영애를 데리고 도주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추적대를 떨치고 갈 수 있겠느냐?”
주위를 둘러본 보틀러는 카일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장 추적대를 상대로 전투를 벌인다면 일행이 이길 가능성은 전무했다.
지금으로서는 추적대와의 거리를 벌리는 것만이 유일한 돌파구였다.
“가고일 때문에라도 와이번들을 이용하지 못할 테니, 강행군을 한다면 거리를 어느 정도 벌릴 수도 있지만….”
카일이 이니엘 영애가 짊어지고 있는 커다란 상자를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지금까지 일행의 속도가 늦어진 것은 어디까지나 이니엘 영애의 걸음이 느린 이유가 가장 크기 때문이었다.
“추적에서 벗어나려면 잠시라도 상자를 저에게 맡기시지요.”
“상자를 말인가요?”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고른 영애는 카일에게 불신의 눈빛을 쏘았다.
“이곳을 가장 잘 알고 돌파할 수 있는 사람은 저뿐입니다. 그러니 시안느 경이 영애를 업고 달리는 동안 제가 상자를 잠시 보관하겠습니다. 만약을 위해 주안 기사단장님은 저희를 지켜 주시고요.”
카일의 말이 옳았다. 일행 중 숲속을 기민하게 달릴 수 있는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더군다나 기사단장인 주안이나 카일이 영애를 업고 달릴 수 없으니, 결국 시안느가 영애를 업고 달리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시안느 경의 짐은 저희가 나누어지겠습니다. 우선 지금은 카일의 말을 따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보틀러는 차분히 영애를 설득했다. 이대로는 엑스퍼트 급 기사들의 추적을 피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주안이 상자를 짊어질 수도 있지만, 가장 실력이 좋은 그가 일행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아야 했기에 거추장스러운 상자를 맡길 순 없었다. 최상의 방안은 기사단장 주안이 일행의 전력을, 체력이 좋고 길을 잘 아는 카일이 상자를, 같은 여성인 시안느는 영애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보틀러는 영애에게 다시 한번 간곡히 호소했다.
“상자를 넘기시는 게 껄끄러우실 것 잘 압니다. 하지만 지금은 추적대를 피해야만 합니다. 이대로 추적대에게 잡힌다면 상자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상자의 열쇠는 영애께서 지니고 계시지 않습니까?”
황금열쇠를 언급하는 보틀러의 목소리에 이니엘 영애는 무심코 목 주변을 더듬거렸다.
“영애, 그렇게 하시지요. 상자는 제가 잘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주안 기사단장까지 카일에게 상자를 맡기는 데 찬성을 하자 이니엘 영애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보틀러의 말이 틀리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았다. 다만 귀한 알이 담긴 상자를 넘기는 것이 껄끄러워 망설였을 뿐이었다. 크게 한숨을 쉰 이니엘 영애는 카일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부디 잘 부탁해요.”
“걱정 마십시오. 기사단장께서 계속 지켜보실 겁니다.”
안심하라는 듯이 미소지은 카일은 상자를 등에 지고 있던 가죽가방 위에 올리고 끈으로 단단히 묶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언제 멈췄냐는 듯 일행은 땅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여전히 선두에 선 것은 카일이었고 그 뒤로 주안과 이니엘 영애를 업은 시안느, 그리고 보틀러와 피툰이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