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39화 (39/404)

39.고원에서 1

“제가 갈 수 있는 곳은 이곳까지입니다.”

“이곳이 통곡의 협곡인가?”

힐튼 남작은 눈 앞에 펼쳐진 협곡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높은 산맥과 절벽 사이에 형성된 좁다란 협곡엔 음산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이곳을 지나면 바로 오크 랜드로 향하는 통곡의 협곡입니다.”

“자네는 이곳에 들어가 본 적이 있나?”

“이곳 반대쪽에는 붉은 트롤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곳을 지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알겠네. 이후부터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자네는 이제 돌아가도 좋네!”

“정말 이곳을 통과하실 생각입니까?”

“하하, 걱정이 되는가 보군! 걱정 말게. 우리에게도 방법이 있으니….”

일칸이 웃으며 말하자 매튜도 더는 두 사람을 말릴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조심히 돌아가도록 하게.”

“그럼….”

짧게 묵례한 매튜는 그대로 왔던 길을 돌아갔다. 숲속으로 빠르게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관찰하던 일칸이 중얼거렸다.

“저들은 기사라기보다는 레인저에 가깝군요.”

“이곳 오크 랜드 일대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숲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야겠지.”

매튜가 사라진 숲을 바라보던 힐튼 남작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통곡의 협곡으로 오는 동안 힐튼 남작은 매튜를 적극적으로 회유하려 했었다. 매튜의 뛰어난 실력도 탐이 있지만 매튜를 통해 보일을 회유하려는 목적이 더 컸다. 그러나 이런 남작의 노력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이런 곳에 있기엔 아까운 자들인데, 참 아쉬운 일이야. ”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비록 평민이기는 하지만 이곳에 놓아두기는 아까운 자들입니다.”

힐튼 남작과 비슷한 표정을 지은 일칸이 머리를 주억거렸다.

평민이기는 해도 오크와 전투를 겪으며 충분한 실전 경험이 있는 이들을 놓치는 건 누구라도 아쉬워할 터였다.

* * *

“놀라워요. 산맥 안에 이런 비옥한 대지가 존재하고 있었다니요.”

“이만하면 작은 남작령의 영지들보다도 넓은 땅입니다. 게다가 남부라 기후도 좋고, 토질도 좋으니 분명 농사도 잘될 것입니다.”

보틀러가 직접 흙을 손으로 쥐어 보고 냄새도 맡아보며 말했다.

“아깝네요. 오크 랜드만 아니라면 능히 남작령으로 손색이 없는 땅인데….”

이니엘 영애가 아쉽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야 합니다.”

이니엘 일행이 넓고 평화로운 고원을 바라보며 감탄을 하고 있을 때 카일이 앞서 나가며 대화를 끊어냈다. 평소와 달리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일인가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시안느가 카일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무 일도 없습니다. 다만 이곳부터는 숨을 곳이 부족한 곳입니다. 서둘러 잡목지대로 들어서야 그나마 몬스터로부터 몸을 숨길 수 있어 서두르는 것뿐입니다.”

카일은 시안느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하며 고원으로 들어섰다. 발목을 간지럽히는 낮은 풀들이 넓게 펼쳐진 고원의 모습은 평화롭게만 보였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고원에 들어선 뒤로부터 카일은 상당히 빠르게 움직였는데, 험준한 절벽을 탈 때와 비교하면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속도였다.

덕분에 일행은 예상보다 신속하게 고원 중앙에 위치한 잡목지대로 들어설 수 있었다.

“헉헉~.”

이니엘 영애는 시안느의 부축을 받아 겨우 일행의 뒤를 따를 수 있었다. 그나마 안전이 확보된 잡목지대로 들어선 이니엘은 더는 버틸 수 없었는지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괜찮으십니까?”

주안이 급히 주저앉은 이니엘 영애에게 다가가 물었다.

“헉헉~ 괜, 괜찮, 괜찮아요.”

가쁜 숨을 고르던 이니엘 영애가 간신히 대꾸했다. 그녀는 그러면서도 카일의 모습을 살폈다. 자신을 거의 안다시피 하며 달려온 시안느는 물론이요 용병인 보틀러와 피툰, 그리고 중급 엑스퍼트인 기사단장까지 상당히 지쳐있었으나, 카일에게선 피곤한 기색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숨을 고르는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 주변을 살피고 있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이상해요.”

물끄러미 카일을 살피던 이니엘이 자신의 옆에 앉아 있던 시안느에게 속삭였다.

“무슨 말씀인지?”

“카일 말이에요. 고원에 들어서면서부터 말도 줄었고 긴장한 표정이 역력하잖아요. 무엇보다 이전보다 주변을 살펴보는 횟수도 잦아졌고.”

“아무래도 오크 랜드와 인접한 산맥이라 그럴 겁니다. 이곳은 사방이 뚫려 있는 곳이라 언제 어디서 몬스터나 나타날지 모르니 더 신경을 쓰고 있는 거겠죠.”

“그럴까요?”

시안느의 말에 이니엘은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여전히 불안한 얼굴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모두 엎드려!”

그때였다.

카일의 급박한 목소리에 일행은 영문도 모르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와 동시에 고원 일대로 날카로운 괴음이 울렸다. 카일을 포함한 일행 모두는 황급히 귀를 틀어막았다.

“키이이엑~.”

하늘에 무언가가 나타났다. 땅 위에 집채만 한 그림자를 드리운 그것은 고막을 찢어발길 듯한 괴음을 토해냈다. 카일은 급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와이번이다!”

보틀러가 쇳소리 섞인 고함을 질렀다.

태양의 강렬한 빛을 받아 온몸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는 골드 와이번 세 마리가 위협적인 모양새로 허공을 선회하고 있었다.

골드 와이번은 와이번 중에서도 가장 작은 체구를 지니고 있으나, 그만큼 빠르고 날렵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와이번 나이트의 대부분이 바로 골드 와이번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잘 알려진 보편적인 와이번이었다.

“와이번 나이트! 마파린 후작가의 와이번 나이트들입니다.”

시안느가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그들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그나마 잡목지대에 들어온 상태라 덤불 숲에 몸을 감출 수 있었지만, 더 이상 앞으로 나가는 것은 요원해졌다.

“하필!”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피툰이 외쳤다. 핏기가 가신 새하얀 얼굴로 그는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고 있었다. 그만큼 와이번은 용병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면서도,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이곳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 보군.”

고원 주변 창공을 떠도는 골든 와이번들을 보던 주안이 잔뜩 긴장한 낯으로 말했다. 맹약석이 저들의 손에 있는 이상 고원 일대에 이니엘 일행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감출 수는 없었다.

“이렇게 숨어만 있을 수는 없어요. 와이번 나이트들이 이곳에 있다는 소리는 곧 마파린 후작의 기사단들이 도착할 거란 의미니까요.”

조급한 시안느의 음성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섣불리 움직일 순 없었다. 잡목지대를 벗어나는 순간 와이번 나이트들의 공격을 받게 될 텐데, 와이번들의 공격은 쉽게 피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하늘 위에서 공격을 퍼붓는 와이번 나이트의 공격은 중급 엑스퍼트인 주안이라도 받아내기 힘든 수준이었다.

사실상 이니엘 일행이 도망칠 수 있는 길들이 모두 막혀 버린 것이다. 진퇴양난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지, 일행의 얼굴 위로 서서히 체념의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카일만은 달랐다. 그는 오히려 눈을 빛내며 여전히 괴성을 지르는 와이번들을 세심히 살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이니엘 영애가 카일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방법이 없나요? 이렇게 있다가는 추적대에게 곧 잡히고 말 거예요.”

“이곳은 넓고 비옥한 토질을 가진 고원입니다. 땅도 넓고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작은 강도 있는, 이상적인 곳이지요. 그렇다면 몬스터들에겐 어떨까요?”

“갑자기 무슨 말이죠?”

카일이 고원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인간이 살기 좋은 곳은 몬스터, 특히 집단적인 생활을 하는 오크들도 살기 좋은 곳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넓은 평야 위를 걸어 다니면서 오크들을 본 적이 있습니까?”

단편적이나 핵심을 짚은 질문이었다. 일행들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지금껏 그들은 단순하게 카일이라는 뛰어난 길잡이가 있어 직접적으로 오크들과 마주치지 않았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낮은 풀과 잡목으로 이루어진 고원이라, 넓은 곳까지 확인할 수 있는 이곳에서 단 한 마리의 오크도 보지도 못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이곳 고원에 오크들이 살지 않는 이유가 있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이제 곧 해가 저물 테니 저 와이번 나이트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알게 되겠군요.”

하늘 위를 선회하는 와이번들을 바라보던 카일이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 *

“신호가 왔습니다. 아무래도 놈들을 찾은 것 같습니다.”

협곡의 능선 위로 올라선 일칸이 멀리 선회하고 있는 와이번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힐튼 남작은 매튜가 돌아가자 데려온 3명의 와이번 나이트를 동원해 곧장 길을 찾기 시작했다. 이미 맹약석을 통해 이니엘 일행이 향한 방향은 알고 있어, 하늘 위에서 정찰을 하며 길을 찾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수년을 이곳에서 순찰을 돌던 카일이나 보일도 그동안 찾지 못했던 지름길까지 찾아, 더 빠르게 능선을 넘어 추적할 수가 있었다.

“날이 저물기 전 영애를 잡아야만 한다. 서둘러라!”

바람처럼 능선을 달리는 힐튼 남작의 뒤로 열 명가량의 기사들이 뒤따랐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긴 꼬리를 남기는 유성우같이 보였다.

꽝-

종종 나타나는 장해물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힐튼 남작은 앞을 가로막는 나무와 바위를 베고 뛰어넘으며 와이번이 선회하는 곳을 향해 곧장 달려나갔다.

그리고 힐튼 남작이 막 고원이 내려다보이는 바위산 위에 올라섰을 때, 긴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끼아아악~.”

그 비명은 와이번의 것보다는 낮았으나 무척이나 날카로웠다. 곧이어 고원의 남쪽, 오크 랜드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아래쪽에서 수많은 그림자들이 허공으로 날아들었다.

와이번 중 가장 체구가 작은 골드 와이번 보다도 열 배는 작은 그림자들이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 위를 까맣게 메워가기 시작했다.

못해도 수백 마리는 되어 보이는 그 무리는 곧장 하늘 위를 선회하는 와이번들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럴, 이럴 수가…!”

선두에서 기사단을 이끌던 힐튼 남작과 일칸 역시 얼굴 가득 당혹스러움이 역력한 표정을 지었다.

* * *

“저건!”

하늘을 가득 메우며 날아오른 무리들을 바라보며 이니엘 영애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절벽 주변에 서식하고 있는 가고일들입니다.”

“아, 그럼 전에 말했던 절벽에 살고 있는 몬스터가 바로….”

“그렇습니다.”

2미터에 달하는 체구를 지닌 가고일은 거대한 체구보다 두 배는 더 큰 날개를 지닌 비행 몬스터였다. 주로 절벽 일대에서 단독 생활을 하는 와이번과 달리 무리 생활을 하는 최상위 몬스터 중 하나였다. 수백 마리가 군집을 형성하며 생활할 뿐만 아니라, 호전적인 특성이 오크들과 비슷해 하늘을 나는 오크라 불리는 몬스터였다.

“고원의 남쪽, 오크 랜드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아래가 바로 가고일들의 집단 둥지가 있는 곳입니다.”

카일이 하늘을 점령한 가고일들을 응시하며 말했다.

“키아악~.”

비명과도 같은 괴성을 지르며, 수백 마리의 가고일들이 허공을 선회하는 와이번에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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