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마지막 요새
힐튼 남작은 결국 새벽녘이 되어서야 1차 요새에 진입할 수 있었다. 남작의 일행들은 그곳에서 잠시 식사와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출발했다.
이번에 그들은 될 수 있는 한 최대한 빠르게 달려 해가 떠 있을 동안 2차 요새를 지나쳤고, 어두워지기 전에 중간 휴식처에서 밤을 보내고는 다음 날 마지막 요새에 진입했다.
이곳에서 부족한 식량과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오크 랜드로 진입할 생각이었다.
“허, 이곳에도 엑스퍼트들이 있다니….”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힐튼 남작이 중얼거렸다. 그의 말대로 이곳에는 무려 4명의 엑스퍼트가 자리하고 있었다.
본래 엑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것은 쟝과 조셉 뿐이었으나, 오른손을 쓰지 못하는 폴론과 투스가 최근에 엑스퍼트에 오르며 4명이 된 것이다.
“대단하군! 설마 이 작은 오지마을에 정규기사단 수준의 전력이 숨어 있을 줄이야.”
오지의 구석진 마을이라곤 믿기지 않는 전력에 기사단원들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기사단은 대략 20여 명의 기사들로 이루어지는 게 보통이었다. 그중에서도 소규모 남작가나 자작가의 기사단은 보통 3~4명의 엑스퍼트 급 기사와 십여 명의 소드 유저로 이루어졌다.
기껏 해봐야 채 스물이 되지 않는 인원이었으나, 이러한 규모의 기사단을 유지하는데도 막대한 비용이 소모되기에, 20명의 기사를 모두 채워 넣은 소규모 가문은 찾기 힘들었다.
가난한 영지들은 1~2명의 엑스퍼트 기사와 십여 명 정도의 소드 유저로 구성된 기사단을 운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다핸 남작가는 중급 엑스퍼트인 기사단장을 포함한 3명의 엑스퍼트 급 기사와 8명의 소드 유저 급 기사가 하나의 기사단을 이루고 있었다. 더불어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매튜와 3차 요새에 머무는 4명만 하더라도 엑스퍼트였다. 엑스퍼트를 목전에 둔 3명의 소드 유저들까지 있는 걸 보면 또 어떤 실력자가 숨어 있을지 몰랐다. 일개 남작 가에 있는 전력이라 보기에는 너무나 막강한 전력이었다.
“이거, 다핸 남작가를 다시 봐야겠어. 이 정도 전력이면 남부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막강한 전력이니 말이야. 더군다나 그 보일 대장을 생각하면 남부는 물론이고, 동부에서도 다핸 남작가를 상대할 가문은 몇 없을 것 같군.”
힐튼 남작은 내심 무시하고 있던 다핸 남작가를 높은 수준으로 재평가했다. 부단장 일칸 역시 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당장 보일 대장을 상대할 사람을 찾기부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적수가 될 만한 사람은 적어도 남부지역에는 없을 것 같군요.”
“그럴 걸세. 검을 맞대보니 쉽게 이길 상대는 아니었어. 자칫 잘못하면 내가 당할 뻔하기까지 했으니.”
“설마 단장님께서 질 리가 있습니까?”
“자네는 모를 걸세. 녀석의 검격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특히 마지막에 보여준 검격은 정말 강력했어.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검술의 체계와는 전혀 달라 보였단 말이지…. 동작이 컸으나 강력했고 안정적인 체계가 느껴지던 검술이야.”
힐튼 남작의 막힘없는 칭찬이 이어지자 부단장 일칸이 다시 한번 말했다.
“역시 탐나는 인재군요.”
“그래! 정말 탐나는 인재지. 놓친다면 두고두고 아쉬울 정도로 말이야. 그래서 저 멍청한 놈 팔 한 짝으로 보일 대장을 엮어 보려고 했던 거건만…. 녀석이 뒤로 물러나지만 않았다면 성공할 수도 있었어.”
힐튼 남작이 뒤를 힐끔 돌아보며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원래 힐튼 남작의 검격은 기사의 팔을 자르기에 충분했지만, 문제는 희생양으로 낙인찍혔던 기사 역시 뛰어난 실력을 지닌 엑스퍼트 급 기사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힐튼 남작의 갑작스러운 공격에도 뒤로 물러나, 보일이 남작의 검을 막을 수 있는 찰나의 시간을 벌어 주게 된 것이다.
“그래도 엑스퍼트 급 기사의 팔을 자르는 것은….”
“웃기는 소리. 그럼 고작 소드 유저 정도 되는 자의 팔을 잘라야 했단 말이냐? 겨우 그런 일로 다핸 남작이 보일 대장을 내어 줄 리가 없지. 적어도 엑스퍼트는 되어야 후작 각하께서도 다핸 남작을 강하게 압박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녀석이 딱 좋았어. 더군다나 자르려던 팔도 검을 쓰는 오른팔이 아니라 왼팔이니 크게 문제 될 것도 없지 않나!”
냉혹하면서도 차가운 힐튼 남작의 말에 일칸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땡땡땡
그때 갑작스럽게 종소리가 들려왔다. 목책 안에 있던 자경단원들이 급박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몇몇의 자경단원들은 목책 위로 올라가자 4개의 조를 이룬 자경단원들은 완전무장을 한 채 목책 밖으로 달려나갔다.
“흠, 아무래도 오크들이 몰려온 것 같군. 어떻게 대처하는지 한번 가 보도록 하지.”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수백 마리에 달하는 오크들이 몰려온 장면이었다.
“저놈들을 보니 이곳이 오크 랜드라는 것이 새삼 느껴지는군.”
미리 밖으로 나간 자경단원들은 삼각형의 진형을 이루며 오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앞 열을 차지한 것은 조셉과 쟝, 폴론과 투스였다. 삼각형의 꼭짓점을 이룬 그 뒤로 소드 유저들과 자경단원들이 늘어섰다.
“4방향에서 오크들을 막을 생각인가 보군.”
“저만한 오크들이 목책으로 한 번에 몰려들면 대응하기 힘드니, 중간에서 숫자를 줄여 놓으려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상당히 위험해 보입니다.”
“한번 지켜보도록 하지. 여차하면 도움을 주도록 기사들을 대기시켜 놓게.”
“준비하겠습니다.”
부단장인 일칸이 물러나려 할 때 오크들과 자경단원들이 본격적으로 부딪혔다.
“크악! 취익!”
“자리를 지켜라!”
“죽어라!”
두 무리가 정면에서 충돌하자 가장 먼저 폴론과 투스의 검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뽑혀, 다가오는 오크들의 심장을 정확히 관통하고 지나갔다.
“저런 방식의 검격으로 오크를 격살하다니, 대단한 발검술이군!”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검격이라니…, 정식대결이라도 상대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단순하지만 강력한 검격이라…. 역시 보일 대장의 검술은 정말 독특하군!”
힐튼 남작은 자경단원들을 바라보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제일 꼭짓점의 소드 엑스퍼트들이 정면에서 오크들을 상대하면, 뒤에 있는 자들은 이를 피해 옆으로 흩어지는 오크들을 차례로 공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4개 조가 상대하기에는 오크들이 너무 많아 목책 쪽으로 달려드는 오크들도 상당수였다.
“준비!”
힐튼 남작이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자경단원들이 짧은 단창을 치켜들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던져!”
단창이 날아가 목책에 가까워진 오크들의 머리 위로 내려꽂혔다.
퍽- 퍽퍽-
“크아악~.”
“취익~.”
단창은 정확하게 오크들의 가슴과 목에 박혀 들었다. 고슴도치처럼 단창에 꿰뚫린 오크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정확도가 대단하군요.”
“저 정도의 정확도라면 단창으로 소드 유저도 충분히 잡을 수 있겠어.”
“소드 유저를 말입니까?”
“정확도가 상당히 높을뿐더러, 무엇보다 오랫동안 손발을 맞추며 훈련을 했으니 소드 유저라도 쉽게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네.”
“그렇다면 목책 밖 자경단원들도 그리 위험한 상황이라 느끼고 있지 않겠군요. 모두 단창의 사거리 안에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 이들의 실력을 믿고 있기에, 저들이 목책 밖으로 나가 싸울 수 있는 것이겠지!”
“그렇군요.”
수백의 오크들이 공격해 왔지만, 절반 이상이 죽어가자 목책 쪽으로 다가오는 오크의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더 이상 다가오는 오크들이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이 죽거나 도망가버린 것이다.
“오크들이 물러간다.”
오크들이 물러가며 싸움이 마무리되는 줄 알았으나, 되려 자경단원들을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부 자경단원들은 경계를 섰고 50여 명 되는 자경단원들은 황급히 목책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서둘러라!”
“움직여! 시간이 없다.”
밖으로 달려 나온 자경단원들 일부가 단창들을 수거하는 동안 남은 자경단원들은 죽은 오크의 가죽을 벗겨 내기 시작했다.
자경단원들이 무기와 오크들의 부산물을 가지고 들어오자, 그때서야 밖으로 나가 진형을 이루고 있단 자경단원들이 목책 안으로 들어왔다.
“이 많은 자경단이 어떻게 유지되나 했더니, 이렇게 모은 오크 부산물들로 유지하고 있었군.”
“이곳에서 잡은 몬스터의 부산물은 약간의 세금을 제외하면 대부분 자경단에서 처리한다고 합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누가 여길 지키려 하겠나. 당연한 일이지만 그대로 시행하기도 어려운 일이지. 다핸 남작, 생각보다 대단한 인물일지도 모르겠군.”
한쪽 구석에 차곡차곡 쌓이는 오크 가죽과 부산물을 바라보던 힐튼 남작은 목책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일칸 경! 놈들과의 거리는 어느 정도 벌어진 것 같은가?”
품 안을 뒤적거리던 부 기사단장은 푸른 보석을 꺼내 들었다.
“대략 4일 정도 행군할 거리만큼 벌어진 것 같습니다.”
“그동안 더 벌어졌군. 아무래도 놈들이 지름길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보일 대장은 오크 랜드에 진입하려면 이곳을 통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놈들은 그 유일한 방법을 쓰지 않았지. 분명 길을 알고 있거나 뛰어난 길잡이가 있는 것이 분명해.”
“영지에서 알아본 바로는, 자경단에서 정찰을 하던 자들은 모두 이곳에 있다고 했습니다. 영주 성으로 내려와 있던 자경단원 한 명과 이곳까지 길을 안내한 매튜, 그리고 남은 자들 모두 말입니다.”
일칸은 힐튼 남작이 북부에서 도착하기 전 며칠 동안, 많은 것을 조사해 놓았다. 이미 이니엘 영애 일행이 오크 랜드로 향할 것까지 예상하고,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는 보일과 외곽을 순찰하는 아홉 명의 자경단원들까지 조사해 놓은 것이다. 일칸은 이 과정에서 영주 성에 내려와 있는 필론의 정체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다만 이들은 카일이 외곽을 순찰하고 있었다는 사실만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보일과 9명의 자경단원들은 다핸 남작령에서도 제법 이름이 알려져 있었지만, 카일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자경단 중 한 명이 길잡이를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마지막 요새에 남은 7명이 모두 있을 거란 생각지 못했군.”
일칸 경이 곤란한 얼굴로 힐튼 남작을 바라보았다. 사실 힐튼 남작이 오크 랜드로 향한 것은 이니엘 영애의 길잡이가 반드시 9명의 자경단원 중 한 명이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빌미로 매튜를 비롯한 남은 자경단원들을 압박해 계속해서 길잡이로 활용할 생각이었건만, 이곳에 자경단원들이 모두 있는 걸 알게 된 이상 매튜를 압박할 명분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들을 강압적으로 데려가기도 힘들었다.
“어쩔 수 없지. 일단은 쫓아가 보는 수밖에….”
* * *
카일 일행은 본격적으로 산맥의 능선을 타기 시작했으나 그다지 바뀐 상황은 없었다.
아직까지 바위와 절벽 끝을 따라 걷고 있기 때문이었다.
간혹 동물들을 마주치기는 했으나 그다지 위험한 상황은 없었다.
“잠시만요.”
앞서 걸어가던 카일이 갑자기 손을 들어 작은 목소리로 일행을 멈춰 세웠다.
이 앞은 절벽이 끝나고 완만한 경사지가 나오는 곳인 동시에 본격적으로 오크들의 영역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여기부터는 최대한 바짝 따라와야 합니다. 지금부터는 몬스터들의 영역 경계를 지나갈 겁니다.”
카일의 당부에 일행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카일의 뒤로 시안느와 이니엘 영애가 따랐다. 영애의 좌우로 기사단장과 보틀러가 있었고 가장 마지막엔 피툰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완만한 경사 지형이 펼쳐지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환경이 눈에 들어왔다.
압도적인 절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짧은 풀들이 자란 평원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이곳이 오크 랜드인가요?”
광활한 초원을 바라보던 시안느가 얼떨떨하게 묻자 카일이 대꾸했다.
“맞습니다. 저곳이 바로 오크 랜드입니다. 오크 랜드는 산 반대쪽과는 달리 작은 나무들과 넓은 초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런 곳은 처음 봐요!”
“보기에는 평화로운 초원 같지만, 산 아래로 내려가면 얼마나 많은 오크들이 있을지 알 수 없지요.”
“산을 내려가 보았나요?”
호기심 가득한 이니엘의 목소리에 카일은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애당초 오크 랜드로 내려갈 길이 없습니다. 보기에는 완만한 경사지 같지만, 어느 정도 내려가다 보면 수직의 절벽이 나옵니다. 물론 길이야 찾을 수 있겠지만, 아직까지 내려가 보진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절벽 쪽은 몬스터들이 집단으로 서식하고 있습니다. 다가가지 않는 것이 좋지요.”
“몬스터요?”
“그렇습니다.”
대화를 더 이어나가는 대신 카일은 앞장서 걷기를 택했다.
이곳은 앞서 걸어온 길과는 달리 짧은 풀들과 낮은 나무들이 주로 자라고 있어, 일행들을 가려줄 장애물이 전혀 없는 곳이었다. 눈에 띄기 쉬운 만큼 빠르게 지나쳐 가야 할 곳이었다.
경사로를 따라 내려가자 작은 남작령에 버금가는 넓은 고원이 펼쳐졌다.
군데군데 자라는 숲과 제법 풍부한 수량의 하천들, 그리고 비옥한 토지는 누구라도 욕심을 낼 땅이었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었군요.”
당장 옆에 서 있는 이니엘 영애는 슬쩍 입까지 벌린 채 눈동자를 반짝이고 있었다. 다른 일행들 역시 별반 다르지가 않아 보였다.
아마도 지금까지 이렇다 할 전투 한 번 하지 않고 편안하게 오다 보니 이곳이 어디인지 깜박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이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물론 카일이 직접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몸으로 체험하게 될 테니까….”
나직하게 중얼거린 카일은 고원 외곽을 따라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