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오크랜드로 1
“용병들은 대부분 이렇게 값싼 수정으로 만든 무속성 아공간석을 가지고 다닌다.”
“그렇군요. 신기하네요!”
“그러나 와이번의 알을 다룰 땐 이 아공간석 말고도 한 가지 더 중요한 물건이 필요하다. 바로 맹약석이다.”
“맹약석?”
“그래. 와이번의 알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장과 다른 파장을 가진 기사의 마나를 유사하게 만들어 주는 마나석을 맹약석이라 부른다.”
보틀러의 설명을 들은 카일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럼 맹약석은 어디에 있나요? 와이번 알에 꾸준히 마나를 공급한 기사가 있을 것 같은데요?”
내심 그 사람이 주안 기사단장이라 생각한 카일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기사단장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난 화이트 와이번의 주인이 아니다.”
주안 기사단장이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람은… 죽었어요.”
짧게 대꾸한 이니엘 영애가 곧장 머리를 푹 숙이며 입을 닫았다. 그녀의 말에서 카일은 많은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분명 마나를 공급하던 기사는 쫓기던 와중에 죽거나 사로잡혔을 터였다. 그렇다면 맹약석 역시 빼앗겼을 것이다.
짧게 침음성을 뱉은 카일은 이내 보틀러에게 질문했다.
“혹 맹약석으로도 알의 위치를 찾을 수 있나요?”
어미 와이번이 마나의 파장으로 자신이 낳은 알을 구분하거나 먼 곳에서도 찾아낼 수 있다면, 와이번의 알과 마나 파장을 맞춘 맹약석으로도 그게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건…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잠시 기사들과 영애를 보던 보틀러가 순순히 긍정했다.
“그렇다면 저들의 추격을 피할 방법이 없군요. 알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전 알을 포기할 생각이 없어요.”
이니엘이 상자를 다시 들어 품 안으로 꼭 끌어안았다.
“뭐…그럼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군요.”
“추격을 따돌릴 방법이 있단 말인가?”
예상치 못한 정보에 기사단장 주안이 화들짝 놀라며 카일에게 반문했다.
“추격을 피할 수 없다면… 아예 추격할 수 없는 곳으로 가면 되죠!”
카일이 씩 미소지으며 남쪽을 가리키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은 일행들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 * *
폭 2미터 길이는 3미터 정도 되는 공간은 사방이 막혀 있었다. 그 안에는 희뿌연 수증기가 고여 있었다. 뿌연 증기를 헤치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두 명의 여인이었다.
“대단하네요. 이런 곳을 만들 생각을 하다니….”
“살면서 이런 건 처음 봐요, 아가씨!”
신기했는지 연신 두리번거리는 시안느와 이니엘이 들어선 곳은 바로 카일이 1년 전 만든 노천탕이었다.
절벽을 등지고 있는 이곳의 바닥엔 도자기나 옹기를 만들다가 실패한 파편들이 바닥에 타일처럼 깔려있었다. 한쪽 구석에 놓인 커다란 무쇠솥에선 뜨끈한 물이 담겨 있었는데, 바로 이 물이 토관을 통해 탕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헌데 과연 우리가 그곳을 통과할 수 있을까요?”
“어쩔 수 없습니다. 남작령으로 돌아간다면 그들과 마주칠 수도 있으니… 지금으로서는 그 카일이란 소년의 말을 따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처음부터 천인 대장이라는 사람과 함께 그들을 돌파한다는 것 자체가 회의적이었습니다.”
제법 심각한 낯빛을 띄운 그녀들은 커다란 수건을 하나씩 몸에 두르고 뜨거운 노천탕 안으로 천천히 몸을 담갔다.
“으음.”
“하아~.”
그녀들은 몸을 탕 안에 밀어 넣는 순간 따뜻한 기운이 몸을 감싸 안으며 그동안의 피로가 모두 풀려나가는 듯했다.
“…정말 좋군요!”
“나중에 가문으로 돌아가면 한번 만들어 달라고 해볼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니엘은 그것이 말도 안 된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귀족가의 여인이 밖에서 옷을 벗고 목욕을 즐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집안에서 하는 목욕 역시 쉽게 할 수 없었다.
일단 집안에서 목욕을 하려면 커다란 통을 들어 방안에 들인 다음, 하인들이 끓인 물을 들고서 이 층 방안까지 올려야만 했다.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목욕하는 과정에서도 여러 명의 하녀들이 몸을 닦아 주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물론 이니엘이 하는 일이야 목욕을 준비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게 다였지만 그 과정 역시 지루하고 불편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귀족들 사이에서는 고급향수들이 고가에 거래되고 있었다. 이니엘 역시 제법 많은 향수를 가지고 있었다.
여인들이 몸을 씻고 휴식을 취하는 동안, 기사단장과 보틀러, 그리고 피툰 역시 간단하게 식사를 하며 쉬고 있었다. 그동안 카일은 커다란 가방을 준비해서 필요한 물품과 식량을 준비하고 이니엘 일행이 가져온 마차를 숨겼다.
* * *
며칠이 지났지만 마파린 후작의 기사단은 다핸 남작령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덕분에 이니엘 영애 비롯한 사람들은 추격을 받으며 누적되었던 피로감을 어느 정도 날려버릴 수 있었다.
정작 바쁜 시간을 보낸 것은 카일과 보일이었다. 당장 카일과 영주성으로 내려가 있는 필론이정찰에서 빠져나가면서 공백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카일이 한동안 마을을 떠나있어야 하기에 이에 대한 대비도 해야만 했다.
무엇보다 목적지가 오크 랜드인 만큼 준비할 것이 많았기에, 카일은 쉴 틈 없이 움직여야만 했다.
“정말 오크 랜드로 갈 것이냐? 지금도 늦지 않았다.”
뒷마당 한쪽에 앉아 가마 안, 붉게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앉아 있는 카일에게 보일이 다가와 말했다.
“괜찮아요! 오크 랜드를 관통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외곽을 따라 우회하는 것뿐인걸요. 이미 몇 번 가본 길이기도 하고….”
“하지만 지금과는 다르다. 이 아비와 함께 가는 것과 저들은 다르지 않느냐! 저들은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다.”
카일이 고개를 돌려 보일을 바라보았다. 카일의 얼굴은 가마에서 나오는 화기에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보틀러 아저씨가 있잖아요. 그분은 아버지와는 절친한 동료라고 하셨잖아요?.”
“그는 이미 우리에게 비밀을 숨긴 적이 있었다. 그것만 보아도 그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릴 찾아온 것뿐임을 알 수 있지.”
보일의 말속에서는 오히려 보틀러에 대한 더 강한 불신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일전에도 말하지 않았느냐. 용병은 아무리 친한 동료라 하여도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 분명 그도 어떤 목적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절 말리지 않으셨잖아요?”
바로 대꾸하는 대신 보일은 용암과 같은 붉은색으로 타오르는 가마 안 불꽃을 바라보았다. 빨갛게 너울거리던 불꽃은 서서히 푸른빛을 뿜어내며 뜨거운 기운을 쏟아 내고 있었다.
“이번 일에 나서는 널 보며 생각을 했다. 너 또한 저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특히 그 상자에 카일 너 또한 관심이 많은 것 같더구나. 어쩌면 이 아비의 걱정이 단순히 기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지만…항상 조심하거라! 아무리 뛰어난 검술과 완벽한 작전이 머리에 있다 해도 변수는 존재하는 법이다.”
“명심하고 잊지 않을게요.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추격하는 기사단이 가마 속 도자기를 꺼낸 후에나 도착했으면 좋겠어요. 이번엔 꽤 공들여 만든 거라 망치면 속상할 것 같거든요.”
가마 속을 응시하는 카일의 눈동자 안에서 푸른 불꽃이 춤을 췄다. 카일은 지난해부터 영지로 오는 상단을 통해 비싼 값으로 도자기를 조금씩 판매하고 있었다. 이번에 만드는 도자기도 판매를 목적으로 만든 것이라 평소보다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이다. 재잘거리는 아들이 모습을 보던 보일이 빙긋 웃었다.
“그래. 아일론 상단에서도 이번에 가져갈 도자기를 기대하고 있으니, 좋은 것들이 나왔으면 좋겠구나.”
* * *
“카일, 일어나거라!”
보일의 방에서 잠시 잠을 청하던 카일은 커다란 보일의 목소리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인가요.”
“서둘러 떠나야 할 것 같다. 방금 필론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남작가를 향해 일단의 기사단이 들어갔다는구나. 인원은 대략 30명 수준이다.”
“생각보다 더 늦었네요.”
“흩어져 포위하려던 무리들을 하나로 불러들였거나 아니면 이곳을 포위하고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겠지. 아마 오늘 하루 정도 남작가에 머물 것 같지만, 혹시 모르니 먼저 떠나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제 생각에도 그게 더 안전할 것 같네요.”
자리에서 급히 일어난 카일은 방을 나섰다. 벽난로 주변에는 기사단장인 주안과 보틀러 그리고 피툰이 잠을 자고 있었다.
원래 기사단장인 주안에게 보일의 방을 내어주려고 했지만, 카일의 방을 이니엘 영애와 호위기사인 시안느가 사용하기로 하면서, 이들을 호위하기 위해 주안이 계단 입구 쪽에 자리를 잡았고 보틀러와 피툰 역시 주안의 벽난로 주변에서 잠이 든 것이다.
카일이 방에서 나온 기척을 들은 기사단장 주안이 눈을 떴다. 부스럭거리는 소음이 이어지자 뒤이어 보틀러와 피툰 역시 잠에서 깨어났다.
“이제 떠나야 해요.”
그 말로 모든 것을 알아챈 주안은 계단 위로 천천히 올라가 문 앞을 지킨 상태로 잠든 시안느를 깨웠다.
약간의 소란이 흐르고 잠시 후 이니엘 영애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그런데 옷이 전날과는 달라져 있었다.
원래 입던 원피스를 입고 있기는 했지만, 길었던 길이는 허벅지 위쪽으로 짧아져 있었고 하의로는 가죽으로 만든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귀족 영애가 가지고 있을 옷이 아닌 걸 보아하니, 아마도 마차에 있던 시안느의 여벌 옷을 빌려 입은 것 같았다.
일행이 모두 모이자 보틀러와 피툰, 주안과 시안느에게 제법 커다란 가죽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바로 식량이 담긴 주머니였다.
원래 기사들은 말을 타고 다니며 안장에 달린 주머니에 식량을 넣어 두거나, 같이 다니는 종자들이 대신 식량이나 물품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보통이 아니라 쫓기는 상황이었고, 이런 때라면 각자 먹을 음식 정도는 지니고 다녀야 했다. 다만 귀족가의 영애인 이니엘은 짐을 들고 있지 않았다.
이들이 건네받은 주머니는 제법 묵직했다. 그러나 누구도 카일을 향해 불평하지 못했다.
카일의 등에 짊어진 가방은 평범한 가죽 주머니의 크기를 3배 정도 상회하는 크기였기 때문이었다.
“다녀오너라. 그리고 이 아비가 한 말 잊지 말고!”
“걱정하지 마세요.”
카일이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보일이 카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며 목책 밖으로 나갔다.
“그럼 가보겠네.”
“무사하길 기원하지.”
“고맙네.”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보일은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목책 안으로 사라졌다.
* * *
“이제부터 전적으로 절 따라 주셔야 합니다. 중간에 있는 요새는 거치지 않고 이동을 할 겁니다.”
“알겠네.”
“걱정 말아요.”
일행들이 결연한 표정으로 긍정하자 카일이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기존 정찰의 경우 각 요새를 거치면서 식량을 확보하고 휴식을 취했으나, 지금은 요새를 거쳐서 가는 것보다는 지름길로 가는 것이 유리했다.
카일과 일행이 걷는 길은 그리 험한 길이 아니었다.
이미 오랫동안 많은 병사들이 걸어 다닌 길이라 비교적 편안한 길에 속했다.
특히 이곳엔 블루 우드가 자라고 있어 땅에 볕이 제대로 비치지 않아, 대부분 작은 풀들이나 군데군데 작은 잡목이 자랄 뿐이었다.
“이곳은 큰 나무들밖에는 안 보이는군요.”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시안느가 카일에게 말을 걸었다.
“워낙 거대한 나무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작은 나무들은 자랄 수가 없는 환경이 되어 버린 탓이죠. 하지만 이렇게 보여도 중간중간 죽은 나무들 주위로 다시 새로운 생명들이 자라난답니다.”
카일이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그 방향엔 쓰러진 나무가 고꾸라진 자리엔 커다란 공간이 생겨있었는데, 그 주위로 작은 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라고 있었다.
“흥미롭네요. 확실히 거대한 나무 주변으로는 작은 나무들이 자라기 어렵군요.”
“작은 나무들이 자랄 수 있는 양분과 햇빛을 거대한 나무들이 모두 빼앗아 가기 때문이죠.”
“큰 나무가 쓰러지기 전까진 작은 나무들이 정말 살 수 없는 것일까요?”
“가지 사이로 비추는 볕과 떨어진 낙엽을 양분 삼아 수많은 식물이 자라고 있기는 하지만 모두 한계가 있지요.”
“결국 자신들의 경쟁상대가 될 나무들을 자리지 못하게 한다는 말이군요.”
“음…어떻게 보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큰 나무와 그 밑에 있는 작은 나무를 관찰하던 시안느는 생각에 잠긴 채 말없이 길을 따라 걷기만 했다. 이어지던 대화가 끊긴 사이 카일은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