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32화 (32/404)

32.비밀의 상자

“이건 도자기라는 물건입니다. 특별한 흙에 몇 가지 재료를 섞어 직접 만든 겁니다.”

“이런 찻잔은 처음 봐요! 공주님과의 티타임에서도 보지 못한 찻잔이네요. 이걸 직접 만들었단 말인가요?”

신기한 듯이 찻잔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영애는 주변에 앉아 있는 다른 사람들의 찻잔을 바라보았다. 형태만 비슷할 뿐 자신이 들고 있는 것과는 재질이나 색깔이 전혀 달랐다.

“헌데 저들이 들고 있는 건 조금 다르게 생겼네요.”

영애의 말에 다들 손에 든 찻잔을 바라보았다. 두 기사와 영애만이 청백색의 찻잔을 들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어두운 갈색이나 남색계통의 찻잔이었다.

“제 손에 들린 것은 옹기라는 물건입니다. 재료나 만드는 과정이 도자기보다는 쉬운 편이라 보시면 됩니다. 도자기는 재료를 구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재료를 구한다고 해도 특수한 방법으로 만들어야 하기에, 지금 만들어 놓은 것도 찻잔이나 그릇과 접시 몇 개가 전부입니다.”

카일의 설명에 이니엘 영애가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호위기사인 시안느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내심 시안느는 귀한 영애께서 낙후된 영지, 그것도 오지의 자경 대장의 집 안에 잘 머물 수 있을까 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보일이 자유민이고 천인 대장이라도 동부 최고 귀족 가문 중 하나인 그린넨 백작 가문의 영애를 제대로 모실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영애가 누워도 남을 정도의 커다란 의자에 왕실에서도 보기 어려운 블루 베어의 털가죽, 처음 보는 독특하고 귀한 찻잔은 물론이요, 대귀족 가에서도 쉽게 구할 수 없는 최고급 튀렛 버섯 차까지. 이 정도면 작은 남작가에서도 볼 수 없는 융숭한 대접이다.

“이제 이야기해 보게. 자네가 나에게 왔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겠지!”

보일의 말에 보틀러의 시선이 일행인 피툰을 지나 영애와 시안느,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사단장인 주안에게 이르렀다. 허락을 구하는 보틀러의 눈빛에 주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암묵적인 허락을 받은 보틀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린 한 달 전 동부 그린넨 백작 가문으로부터 의뢰를 받았네. 북부 토샤 영지에 있는 이니엘 영애를 영지까지 호위하는 임무였지. 사실 임무 자체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네! 영애를 호위하는 제3 기사단 십여 명이 함께하고 있어, 우린 그저 길잡이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

고개를 숙인 보틀러는 목이 타는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다만 한 가지, 북부의 맹주인 마파린 후작령을 피해 중부로 우회하는 길을 잡아 달라는 조건이 있었다네. 아무래도 그린넨 백작가와 마파린 후작가의 사이가 워낙 좋지 않고 최근 들어 분쟁이 커지고있는 상황이라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려던 거겠지.”

차분히 이어지는 보틀러의 설명에 기사단장인 주안과 호위기사인 시안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눈을 감거나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게 아니었나 보군.”

보일이 눈을 좁히며 말하자 보틀러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토샤 자작가를 벗어난 지 삼 일 만에 마파린 후작가의 기사 20명이 우릴 추격하기 시작했네! 더군다나 중간중간 후작가의 사주를 받은 용병들의 습격까지 있었지. 결국 도저히 기사단을 떨칠 수가 없어 우리는 놈들과 마주치고 말았네! 그때 우린 5명의 용병을 잃었고, 남은 기사들이 목숨을 걸고 막는 사이 여기까지 도주해온 것이라네. 자네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헌데 무엇 때문에 영애를 쫓는 거죠? 단순히 영애를 납치하려던 건 아닌 것 같은데요?”

그때 갑작스럽게 카일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영애를 납치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들을 쫓아와 공격했겠느냐?”

보일은 대화에 난입한 카일을 질책했다. 그러나 보일로서도 약간의 찝찝함이 남아 있어 자연스럽게 카일에게 질문을 던지듯 말한 것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간단해요. 동부의 백작가와 북부의 후작가의 싸움처럼 이야기하지만, 만약 두 가문의 싸움이라면 굳이 남부의 가장 구석진 이곳 다핸 남작령까지 올 필요가 없잖아요?”

“우리가 원해서 내려온 것은 아니다! 다핸 남작령까지 내려 온 것은 용병대장인 보틀러의 강력한 주장 때문이었다.”

신랄한 카일의 목소리에 침묵을 지키던 기사단장 조안이 반박했다. 하지만 카일은 지지 않고 똑바로 기사단장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도움을 받으러 왔다면 정확한 상황을 알려 줘야 해요! 상황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서 도움을 받으려는 건가요?”

“그게 무슨 말이냐. 방금 이야기가 그럼 거짓이란 말이냐?”

카일의 말에 보일이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보틀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보틀러가 급히 손을 흔들며 급히 부정했다.

“난 거짓을 말하지 않았네!”

“물론 거짓을 말하진 않았겠죠. 다만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빠트렸을 뿐.”

“그, 그건….”

보틀러가 당황한 듯 말을 더듬자 보일은 보틀러가 가장 중요한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는 보일이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믿을 수 있는 동료라 보일은 크게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여긴 남부에서도 가장 아래쪽에 있어요. 그중에서도 가장 남단에 위치한 낙후된 영지죠. 단순히 영애의 납치만을 막기 위해 도주해왔다면 굳이 남부까지 내려올 필요도 없죠. 중부에는 마파린 후작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 있으니까요.”

그 ‘대단한 사람’이 누군지 바로 알아챈 보일이 무릎을 치며 외쳤다.

“그렇구나! 트란발트 공작가!”

“차라리 트란발트 공작 가문으로 가서 도움을 청했다면 중립 귀족인 트란발트 공작께서 거절했을까요? 아니, 도움을 주지는 않아도 손님으로 찾아온 동부의 그린넨 백작 가문의 영애를 내치지는 않았을 거예요.”

“왕국 최고의 귀족인 트란발트 공작가에서 위험에 처한 어린 귀족 영애를 내친다면 귀족의 명예가 땅에 떨어질 테니까?”

“맞아요. 공작가에서는 절대 영애를 내치지 않고 손님으로 대접해 주었을 거예요. 헌데 이곳까지 내려왔다는 것은 한 가지 이유뿐이죠.”

이어지는 카일의 말에 보틀러와 피툰은 고개를 숙였고 기사단장인 주안과 호위기사인 시안느는 낯빛을 딱딱하게 굳혔다. 영애인 이니엘만이 호기심이 가득한 눈동자를 생생히 빛내고 있었다.

“영애에게 아주 중요한 물건이 있다는 이야기가 되죠. 중립 귀족 트란발트 공작가에서도 탐을 낼만큼 귀중한 물건!”

카일의 말에 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런 거였어. 애초에 영애를 노린 게 아니라 물건을 노린 것이군.”

“그 물건은 아마도 영애가 안고 있는 상자 안에 있겠죠.”

카일의 눈길이 영애의 품에 있는 상자로 향하자, 옆에 앉아 있던 주안과 시안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검을 잡았다.

“이런 이런, 비밀을 너무 많아 알았나 봐요. 어떡하죠?”

카일이 과장되게 몸을 움츠리며 말했지만, 누가 봐도 겁먹은 표정이 아니었다. 그 모습에 보일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는 보일의 태도에선 태연한 기색만이 흘렀다.

“궁금하네요. 물건이 귀중한 것이라는 걸 눈치챈 것만으로도 검을 뽑는데, 물건의 정체를 알고 있는 두 분은 어떻게 될지.”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 갈팡질팡 당황하고 있는 보틀러와 피툰을 향한 말이었다. 카일의 갑작스러운 말에 보틀러의 시선이 기사단장 주안에게로 향했다. 그 안에 섞인 노골적인 불신과 경악, 깨달음 따위를 마주한 주안의 얼굴에 당황의 빛이 어렸다.

카일의 말 몇 마디가 순식간에 보틀러와 주안 기사단장 사이를 갈라놓아 버린 것이다.

“난 그대들을 해칠 생각이 없네! 기사의 명예를 걸고 약속할 수 있네.”

기사단장이 급히 변명했지만, 또다시 카일의 음성이 고요한 공간 사이를 울렸다.

“그것이 주군의 명령이라도 말인가요? 아니 백작께서 주안 경이 아닌 다른 기사단에 명을 내린다면 어쩔 건가요?”

입술을 벙긋거리던 주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자네 둘은 물러나 있게.”

보일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하자 보틀러와 피툰이 뒤로 물러났다.

“너희들이 영애를 위협하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이런…. 위협은 지금 기사님들이 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그리고 도움을 바라고 찾아온 것은 저희가 아닙니다.”

냉정한 카일의 말에 주안과 시안느는 결국 검을 뽑지 못했다.

이곳은 그린넨 백작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남부의 남작가일 뿐만 아니라 보일은 명목상이라도 남작가의 가신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남작가 몰래 영지를 찾아와 남작의 가신을 향해 검을 뽑는다면, 아무리 명망 있는 강력한 동부의 백작가라도 다핸 남작가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귀족의 명예가 걸린 일이었으니 더더욱.

무엇보다 이들은 강력한 적에게 쫓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적을 늘린다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주안과 시안느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가만히 앉아 차를 마시던 이니엘 영애가 주안과 시안느를 보며 말했다.

“두 분, 그만 자리에 앉으세요.”

“하지만….”

주안이 무어라 반발하려 했으나 이니엘 영애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카일이라고 했나요?”

“그렇습니다.”

카일이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이니엘 영애가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대는 우리를 돕는 게 불편한가 보군요? 일부러 도발을 하는 걸 보니….”

이니엘이 정확히 핵심을 짚자 보일을 비롯한 모든 인원이 카일을 바라보았다.

그들 중 누구도 지금까지 카일이 도움을 거절하려고 일부러 기사들을 도발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알아차렸다니… 어쩔 수 없군요. 그렇습니다. 전 이번 일에 도움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가지고 계신 물건이 상당히 불안하거든요. 어쩌면 마을에까지 피해를 줄 것 같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용병과도 반목하게 한 건가요?”

“뭐… 이왕 빠지는 것, 두 분도 함께 빠지는 것이 좋을 것 같았거든요! 그리고 그 물건의 비밀을 지켜야 할 정도로 중요한 물건이라면,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일이니까요.”

카일의 말속에는 당신들을 믿을 수 없다는 게 명백히 담겨있었다.

“좋아요! 물건을 보여 드리죠. 그러니 도와주세요.”

이니엘 영애가 직접 도움을 청한 이상 보일이나 카일로서도 쉽게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아가씨!”

“안됩니다!”

두 기사가 반대를 했지만 이니엘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 저들의 도움 없이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있나요?”

이니엘의 말에 주안은 비통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저들에게 이것을 빼앗길 수는 없어요.”

이니엘이 소중하게 안고 있던 사각형의 상자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막 열려고 할 때, 카일이 손을 들어서 막았다.

“잠시만요. 아버지는 이번 일에 나서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응? 무슨 소리냐?”

“아시잖아요. 지금 아버지는 남작가에 속해 있어요.”

보일은 카일이 무슨 말을 하는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보일이 나서게 된다면 이 일이 남작가까지 번질 수 있었다.

지금의 남작가에서는 추격해오는 마파린 후작가의 기사단조차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물론 지금 자경단까지 포함한다면 상대할 수도 있지만 남작가의 피해나 자경단의 피해도 상당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때문에 보일이 이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보일은 카일을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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