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그린넨 백작영애
“저기가 샤론 마을인가요?”
“그렇다.”
낡은 마차 한 대와 로브를 뒤집어쓰고 말을 몰며 주변을 살펴보는 세 사람 중, 우측에 있던 사람이 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덩치의 사내를 보며 말했다. 옆에 서 있던 사내의 입에서 묵직한 중저음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정말 그 사람이 도움을 줄까요? 아무리 실력이 좋다고 해도 상대는 기사단인걸요.”
그때 좌측에서 작은 목소리로 물어오자 가운데 자리 잡은 사내가 고개를 약간 숙이며 말했다.
“비록 지금은 용병계를 떠난 상태이지만 실력에서는 가장 확실한 자입니다. 기사단 전체를 상대하기는 부족해도 녀석이라면 기사 2~3명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습니다.”
“우린 실력도 중요하지만, 믿을 수 있는 자가 필요한 거라고요.”
“그래서 녀석에게 도움을 받으러 가는 길입니다.”
사내는 굳은 얼굴로 왼쪽을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일행을 출발시켰다.
사내의 일행이 목책 가까이에 다가갔을 때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일행의 앞을 막았다.
“숲에 들어가려는 용병들인가? 그럼 먼저 저쪽 자경단초소에서 접수부터 해야 한다.”
일행의 선두에 있는 사내도 큰 키와 덩치를 가지고 있지만 앞을 막아선 사내에 비해서는 한없이 작아 보였다.
“보일!”
선두의 사내가 앞을 막아선 사내를 바라보며 이름을 부르자, 보일이 고개를 들어 자신의 이름을 부른 사내를 바라보았다.
“보틀러?”
보일이 사내를 알아보자 사내 보틀러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손으로 입을 살짝 가렸다가 떼었다.
신분을 알리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신호였다.
보틀러의 신호를 알아챈 보일이 입술을 닫고 손짓을 하며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말없이 걸어가던 보일이 도착한 곳은 바로 자신의 집이었다.
보일의 집은 마을에서도 제법 구석진 외진 곳이라 마을 사람들도 잘 찾지 않는 곳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비밀리에 찾아온 일행이 머물기에는 보일의 집이 제격이란 소리였다.
보일이 말없이 집안 문을 열어주자, 보틀러를 뒤따라 낡은 마차를 몰던 사내가 마차에서 내려 천천히 마차 문을 열었다. 안에서는 이제 16~7세의 어린 소녀가 제법 커다란 상자를 품 안에 소중하게 안고 마차에서 내렸다.
조심스레 밖으로 나오는 소녀의 옆으로 마부와 말에서 내린 왜소한 체격의 로브를 깊게 눌러쓴 자가 섰다. 헐렁한 로브 사이로 언뜻 보이는 팔목의 노란 금속 토시와 가냘픈 체구를 보아 아마도 소녀를 보호하는 여기사로 보였다. 그렇다면 마부 역시 기사로 볼 수밖에는 없었다.
“기사들인가?”
보일이 보틀러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찌 알았나?”
“로브 사이로 금속제 방어구가 보이잖나. 모습을 감추고 오려면 금속제 방어구부터 떼어 냈어야지!”
“이런, 급히 오느라 미처 생각지 못했다네.”
보틀러가 씁쓸하게 말하자 보일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마침 집에 와있던 카일이 계단을 타고 천천히 내려오다 집안으로 들어오는 보일을 보고 다가왔다.
“어? 아버지? 어쩐 일이세요. 이렇게 일찍?”
“오늘 복귀하는 날이었나?”
날짜를 가늠해보던 보일이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오늘 마을에 상단이 들어오잖아요. 필론 형이 며칠 더 있기로 했어요. 오늘은 모아놓은 가죽이랑 약초도 팔고, 필요한 것도 있어서요.”
“스크롤 말이냐?”
보일의 말에 카일은 그저 미소만 지어 보였다. 필요한 것이란 단어를 들은 보일이 바로 스크롤을 말한 이유는, 상단이 마을로 들어올 때마다 카일이 대량의 스크롤을 사들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보일과 대화를 나누던 카일이 집안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오늘은 손님이 많네요.”
“그래. 오늘 아비의 친구가 찾아왔단다.”
보일이 보틀러의 어깨를 두들겼다.
카일과 보일을 연신 번갈아 보던 보틀러가 감탄했다.
“역시 자네 아들이군. 자네만큼이나 크다니.”
“하하하! 그럼, 당연하지! 저래 보여도 이제 17살밖에 안 됐다네. 아마도 나만큼은 더 자랄 거야.”
보일의 말에 보틀러의 일행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얼굴로 다시 한번 카일을 바라보았다.
물론 카일의 얼굴 자체는 아직 소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만 190센티는 되어 보이는 키와 덩치가 아무리 보아도 17살로는 보이지 않게 한 탓이었다.
흘깃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한 카일은 보틀러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카일입니다.”
“그래! 반갑구나. 난 보틀러라 한다. 아 그러고 보니 일행을 소개하지 않았군.”
보틀러는 뒤에 서 있던 사내를 가리켰다.
“이쪽은 우리 용병단의 단원인 피툰.”
보틀러의 소개를 받은 피툰이 로브를 벗으며 앞으로 나왔다.
“피툰입니다. 보일 님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반갑군. 보일이네.”
“카일이에요.”
보일과 카일은 인사를 하며 피툰을 훑어보았다. 대략 170~180센치 사이의 키와 제법 단련된 단단한 체구를 지닌 그는 롱소드 한 자루를 차고 있었다. 단검집은 열 개 정도 되었는데 꽂힌 단검은 고작 3개 정도였다. 더군다나 레더 아머 여기저기에도 제법 굵은 흠집이 남아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보틀러의 레더 아머에도 제법 큰 흠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여기 세 분은 이번에 맡은 의뢰의 의뢰주가 되는 분이지!”
보틀러의 말에 한쪽에 사람들이 로브를 벗으며 다가왔다.
이들 중 선두에 있는 사내는 무두질이 잘된 가죽을 겹쳐 몸에 딱 맞는 코트형 레더 아머에 어깨와 심장 팔목과 발목을 보호하는 금속보호구를 착용하고, 롱소드를 패용한 전형적인 기사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의 뒤에 서 있는 여인 역시 같은 복장에 같은 검을 착용한 상태라 한 가문에서 같은 검술을 익힌 기사임을 알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같은 검술을 오랫동안 익혔을 경우 무장 역시 같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기사들의 무장이 동일하단 건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기사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였다.
외부에서 받아들인 기사나 용병 출신의 기사가 많은 기사단은 기사단원들의 검술에 따라 적합한 검의 길이나 크기, 무게와 형태가 제각각인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뒤쪽 소녀는 카일의 가슴 정도의 키에 발목까지 오는 원피스 위로 붉은 가죽으로 만든 롱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겉보기에도 상당히 고급스럽고 화려한 문양이 그려진 제법 묵직해 보이는 상자를 소중히 안고 있었다.
일행의 면면이나 화려한 옷차림으로 보아 제법 고위 귀족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짙은 피로가 감도는 낯빛으로 이들 모두 상당히 지쳐 있다는 사실도 짐작할 수 있었다.
“여기 이분은 그린넨 백작가 제3 기사단의 단장인 주안 벨로우 경! 그리고 여기 계신 기사분은 시안느 파브엘 경입니다.”
보틀러가 두 기사를 소개했다. 카일과 보일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자 그중 시안느라는 여기사가 뒤에서 있는 소녀를 소개했다.
“이분은 그린넨 백작 가문의 파비엘 드 그린넨 백작 각하의 3번째 영애이신 이리엘 드 그린넨 영애십니다.”
시안느의 소개에도 보일과 카일이 여전히 고개만을 숙이며 인사를 하자 시안느의 얼굴이 굳어졌다.
정식으로 영애의 신분을 밝혔건만 보일과 카일이 여전히 고개만 숙이며 인사를 했기 때문이었다. 보통 평민들이 귀족을 보며 인사하는 방식은 무릎을 꿇거나 엎드려 머리를 조아려야만 했다.
시안느의 표정을 본 보일이 앞으로 나서며 다시 자신을 소개했다.
“다시 인사드립니다. 자유민 출신 용병이자 이곳 다핸 남작령의 자경대 천인 대장을 맡고 있는 보일이라 합니다.”
보일의 설명에 시안느가 놀라움을 숨기지 못하고 보틀러를 바라보았다.
보통 자유민이라면 원래 귀족에서 출발했지만, 작위를 물려받지 못하거나 기사의 서임을 받지 못한 이들을 일컬었다. 간혹 높은 공을 세웠으나 직위나 서임을 받지 못한 자들이 자유민으로 승격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때문에 기본적으로 자유민과 평민은 신분이 전혀 다르다고 할 수가 있었다.
게다가 보일은 기사의 대우를 받는 천인장으로, 영주의 가신에 해당하는 인물이라면 작위를 가진 귀족을 제외하고 굳이 무릎을 꿇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가 된 것은 귀족에 대한 예절 문제가 아니라 바로 보일의 신분이 한 영지의 가신에 준한다는 사실이었다.
“자네, 언제 남작령의 가신이 된 것인가?”
보틀러가 눈을 휘둥그레 뜨자 보일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몇 년 안 되었네. 남작님의 기사제안을 몇 번 거절했더니 아예 자경단의 천인 대장으로 정식 임명 당했지. 뭐, 나야 이 마을을 떠나지만 않는다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어 그냥 받아들이고 있다네. 덕분에 이 마을에서 걷어 들이는 세금의 5할을 봉록으로 받고 있고 몬스터 부산물도 제법 나와서 영 나쁜 건 아니야.”
줄줄 이어지는 보일의 말에 보틀러를 비롯한 일행들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자! 일단 자리에 앉아 이야기하도록 하지. 보아하니 내 도움이 필요한 것 같은데 먼저 이야기나 해보게.”
보일의 말에 일행들이 각자 자리에 앉았다.
영애인 이니엘은 자연스럽게 집에서 가장 좋은 자리인 벽난로 근처 놓인 커다란 의자에 앉으려 했다.
“잠시만요.”
카일이 의자에 앉으려는 이니엘 영애를 막아섰다.
“무슨 일이죠?”
카일이 갑자기 영애의 앞을 막자 시안느가 급히 카일의 앞으로 나서며 경계의 자세를 취했다.
“경계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래도 귀족가의 영애께서 오셨는데 딱딱한 의자에 앉게 할 수는 없지요.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진정하라는 것처럼 웃음 지은 카일이 안으로 들어갔다. 이니엘 영애가 앉으려는 의자는 결코 딱딱한 의자라 할 수 없었다. 평소 보일이 자주 앉아 쉬는 저 의자엔 부드러운 털가죽이 깔려 있었다. 그러니 결코 딱딱한 의자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카일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영애를 말린 것이다.
“저건…!”
카일이 안쪽에서 들고나와 가죽을 펼쳤다. 척 보기에도 범상찮은 가죽의 정체는 바로 3미터가 넘은 거대한 곰 가죽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곰 가죽과는 달리, 은백색에 은은한 푸른빛이 감도는 아름답고 긴 털을 간직하고 있었다.
카일은 곰 가죽을 들어 의자를 덮었다. 보일의 덩치를 감당할 정도로 상당한 크기의 의자였지만 곰 가죽이 워낙 크다 보니 의자를 덮고도 바닥에 깔릴 정도로 큰 가죽이었다.
“이제 앉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카일의 말에 이니엘 영애는 자신의 앞으로 막고 있는 시안느의 어깨를 살며시 밀어냈다.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있던 시안느가 급히 옆으로 비켜섰다.
“고마워요! 친절하시군요.”
“별말씀을….”
이니엘 영애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아!”
영애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곰 가죽에 앉는 순간 그동안의 피로가 날아가는 것 같은 포근함과 따뜻함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설마… 블루 베어인가?”
유심히 털가죽을 살피던 보틀러가 경악하며 말했다.
“저 가죽이 블루 베어란 말인가?”
보틀러의 말에 기사단장이 경악하며 털가죽을 바라보았다. 블루 베어는 워낙 희귀한 곰이라 보기도 힘들지만, 그 가죽을 구하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당장 왕실에서도 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분명합니다. 은은한 은색에 빛을 받으면 푸른빛을 띠는 곰 가죽이라면 블루 베어가 분명합니다.”
“이런 오지에 저런 보물이 있었다니!”
신음하듯 말한 기사단장이 이리엘 영애를 감싸고 있는 블루 베어의 가죽을 쳐다보았다. 이리엘 역시 블루 베어 가죽에 대해 알고 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블루 베어는 숲 안쪽에서도 깊은 곳에 사는 놈으로 덩치는 대략 3~4미터 사이 가량 자랐다. 커다란 몸집답게 워낙 사납고 난폭해서 호전적인 오크들까지 피해 다닐 정도였다. 그런 놈을 카일은 작년 겨울 소총으로 저격해 잡았다.
“이게 바로 블루 베어의 가죽이었군요. 역시 공주께서 탐내실 만 하네요.”
이리엘 영애가 가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블루 베어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은은한 푸른 빛의 털가죽에 있었다.
보통의 곰보다 털의 길이가 배는 길고 부드러울 뿐만 아니라, 가죽의 두께도 두꺼워 일반 곰 가죽보다 훨씬 무거운 것이 특징이었다. 물론 그만큼 따뜻하고 질겼다.
뿐만 아니라 화살이나 검은 물론이고 3서클의 파이어볼까지 막아준다는 말이 있는 진귀한 가죽으로, 부르는 것이 값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보통의 곰과 비교를 하는 것이 실례일 정도로 최고급 가죽인 것이다.
“내 평생에 블루 베어 가죽을 보게 될 줄이야! 더군다나 흠집 하나 없는 최상급의 가죽이 아닌가?”
보틀러가 부러운 얼굴로 보일을 바라보았다. 저 정도의 최상급 블루 베어라면 수백 골드를 들여서라도 반드시 차지하려 할 것이다.
“단번에 알아보는군! 작년에 카일이 잡아 왔다네.”
“자네가 아니라 자네 아들이 잡아 왔단 말인가!?”
“난 지금까지 십수 년을 이곳에 살았지만, 이곳에 블루 베어의 서식지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네. 녀석이 숲을 제집 드나들듯이 다니더니 작년에 어디선가 이놈 가죽을 벗겨 왔지 뭔가!”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보틀러는 벽난로에 올려져 있는 무쇠 주전자를 들어 차를 따라주는 카일을 바라보았다.
“저기… 찻잔이 독특한데 뭐로 만든 거죠?”
차를 마시며 지친 몸을 달래느라 잠시 정적이 흘렀다. 고요를 깨트린 것은 이리엘 영애였다. 그녀는 손에 들린 처음 보는 재질의 찻잔을 보며 신기한 듯이 물었다.
평소 차를 즐겨 마시는 영애로서도 이런 찻잔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