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단독 정찰
다음 날 아침, 카일은 이전에 만들어 놓은 검과 환도 그리고 단도를 허리에 찼다. 식량과 야영에 필요한 도구, 그리고 소총을 넣은 가죽가방을 챙긴 카일이 목책 앞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보일과 요새로 떠나려는 정찰조가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너라.”
“조금 늦었습니다.”
카일이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보일의 옆에 서 있던 다부진 체격의 삼십 대 중반의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늦지 않았다. 우리도 숙소에서 방금 나왔단다. 네가 이번에 단독 정찰을 나갈 카일이구나! 반갑다. 난 동행할 브란토 조장이다.”
“안녕하세요! 카일 입니다. 많이 도와주세요.”
“하하! 무슨 말을. 우리가 도움을 받아야지.”
브란토가 카일과 인사를 나누는 동안 자경단원들은 정찰을 위한 막바지 준비가 한창이었다. 가장 앞선 요새까지는 천천히 사주 경계를 하며 간다 해도 해가 지기 전 도착할 거리였다. 여기서 10명의 병사들이 저녁을 보내야 하므로 식량과 무기 점검은 이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자경단원들이 챙긴 무기 대부분은 창과 짧은 숏 소드였다. 등 뒤로는 짧은 단창이 3개씩 매달려 있었다. 물론 모두가 이런 무기를 챙긴 것은 아니었고, 개중에는 150센티에 달하는 장궁을 든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보일이 자경단을 훈련시키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바로 단창이었다. 오크의 두꺼운 가죽을 뚫기 위해서는 단창이 가장 위협적이고 효율적인 무기였을뿐더러, 무엇보다 쉽게 익힐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크를 상대하는 용병들은 단창보다는 위력이 강한 크로스보우를 많이 사용했다. 하지만 비싼 가격 때문에 자경단에서 대량으로 운용하기는 힘든 무기였다.
정찰 조원들의 준비가 어느 정도 끝나자 카일이 앞장서서 목책 입구로 다가갔다. 정찰조보다 50미터쯤 앞서가며 척후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다녀올게요.”
“조심하거라!”
보일이 카일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카일이 미소를 짓고는 목책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얼마 있지 않아 카일의 모습은 숲속 어두운 그늘 사이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10여 분 후 숲에서 가느다란 소성이 울렸다.
삐이-
“출발하겠습니다. 대장!”
“조심하게.”
“걱정 마십시오. 자! 출발한다.”
브란토를 포함한 10명의 자경단원들이 목책 밖으로 천천히 사라져 갔다.
카일은 숲속 우거진 나무 아래로 작게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 느긋하게 앞으로 걸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정찰을 해오던 곳이라 길은 단단히 다져져 있었고, 주변의 잡목을 미리 제거한 덕분에 시야가 탁 트여 멀리서도 몬스터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어, 그다지 위험한 곳은 아니었다. 때문에 이 주변을 중심으로 사냥을 비롯한 약초나 버섯을 채집하기도 했다.
다만 혼자 떠도는 트롤이나 종종 이곳까지 넘어온 소수의 오크 무리를 만날 수도 있기에 지속적으로 정찰이 필요한 지역이기도 했다.
* * *
“언제 봐도 이곳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
카일은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솟은 나무들을 보면서 놀라운 듯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이곳에는 성인 남자 10여 명이 감싸 안아야 할 정도의 나무들이 거대한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카일이 품에서 작은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집에서 나오기 전에 챙긴 훈연한 육포가 들어있는 주머니였다.
숲에서 찾은 특별한 허브와 태우면 약간 매콤하면서도 달큰한 향이 나오는 나무로 훈연해 만든 육포였다. 보일을 따라 숲에서 야영을 하던 중, 불을 피우기 위해 태운 나무에서 피어나는 독특한 향이 좋아 만들기 시작한 음식이었다.
쩝쩝.
이곳은 앉아 휴식을 취하고 식사를 할 만한 적당한 곳이 없어 이렇게 걸어가며 식사를 마쳐야만 했다.
때문에 오러를 사용하지 못하는 정찰병들에게는 가장 체력소모가 많은 구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체력과 실력이 뛰어난 소드 유저나 소드 엑스퍼트급의 순찰 조원들이 앞서 첨병으로 나가, 후위를 따르는 병력을 보호하고 체력소모를 최소화 시켰다. 만약 오크들이 나타났을 때에는 직접 처리하거나 지연시킨 뒤, 후위를 따르는 정찰병과 힘을 합쳐 오크들을 처리하거나 피해를 줄이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수십 마리의 오크들이 숲 초입까지 나타날 정도면 이미 요새에서 일차적으로 침입을 알리는 봉화를 피우기에 미리 대비할 수 있어, 요새까지의 정찰과 수색은 그리 위험한 일은 아니었다.
* * *
카일과 조원들은 해가 서서히 산 넘어 사라질 때쯤 첫 번째 요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좁은 길을 따라 바위 절벽 위로 올라가면 안쪽으로 바위가 움푹 들어가면서 제법 넓은 공간에 나왔다. 바로 이곳이 자경단원들이 통나무집을 짓고 머무는 곳이었다.
요새는 높이가 5미터 남짓의 커다란 바위 절벽 위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바위 절벽의 앞쪽은 역경사로 이루어져 있어 절벽을 넘어 요새로 진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바위 절벽 위쪽으로 올라가는 유일한 방법은 바위와 바위 사이의 좁고 험한 외길을 따라 걷는 것이었다. 또한 길 중간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물까지 있어, 따로 식수를 구할 필요가 없는 그야말로 천연의 요새였다.
더군다나 이곳은 협곡이 급격하게 좁아졌다가 다시 넓어지는 병목 구간으로 절벽 위에서 장궁과 단창을 날려 오크들의 피해를 가중시킬 수 있었기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다만 바위 절벽 위가 넓다고는 하지만 기거할 수 있는 인원은 많아야 고작 2~30명 정도에 불과했고, 바위틈에서 얻을 수 있는 식수의 양이 하루 10여 명이 쓸 정도가 고작이라 많은 인원을 배치하긴 어려웠다.
물론 이곳이 처음부터 천혜의 요새였던 건 아니었다.
과거 마을에 정착한 보일이 정찰 중 이곳을 발견하고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돌을 치우고 길을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바위틈 사이로 조금씩 흘러나오는 물을 모을 수 있게 흙을 바르고 돌을 쌓아 지금의 요새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카일과 브란토 조장이 절벽 위에 올라오자 기존에 배치된 자경단의 조장이 다가왔다.
“오! 이번에 자네 조가 올라왔나?”
“케도프! 이거 오랜만이군. 한 달은 된 것 같은데?”
“하하하! 자네 조와 우리 조는 계속 엇갈리니까. 헌데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군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번에 보일 대장님이 단독 정찰을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아, 이쪽은 이번에 자경단에 들어온 카일이네. 대장님의 아들이지. 보일 대장님은 당분간 정찰에 나오기 힘들어졌어. 쟝과 조셉의 상처가 거의 아물어 가는 것 같더군.”
어째서 보일이 나오지 못하는지 알아챈 캐도프가 짧은 침음성을 냈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얼굴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이제 막 16세가 되어 자경단에 들어온 소년이지만, 키가 180센티는 넘어 보였고 허리에는 특이한 모양의 검이 4개나 달려있었다. 그도 모자라 등 뒤에 달린 커다란 가죽 자루 위로 정체불명의 기다란 것이 튀어나와 있었다.
이 카일이란 소년에게 5명의 소드 유저가 합공을 하고도 진 건 물론이요, 팔까지 잘렸다는 소식은 이들에게도 퍼진 이야기였다.
대부분의 자경단원들에게 이미 카일이 소드 엑스퍼트에 들었을 거라는 말이 돌고 있어 어느 정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도 있었다.
누구도 아닌 바로 보일의 아들이며 그의 검술을 이었다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자네가 카일이군! 잘 부탁하네.”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참 필론 형을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요?”
“아, 필론은 조금 더 있어야 돌아올 거야!”
카일과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눈 브란토는 곧 케도프 함께 자경단원들에게 향했다.
이틀에 한 번씩 교대를 하기는 해도 의외로 교대 전 인수인계를 할 것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브란토와 케도프가 멀어지자 카일은 바위 절벽의 갈라진 틈에서 자란 늙은 고목으로 향했다.
지난 1년간 오가며 봤던 이곳엔 원래 통나무로 만든 집이 없었다.
자경단원이 본격적으로 이곳에서 생활을 하게 되면서 지난 두 달 사이에 만든 곳으로, 20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함께 머물기에는 좁은 공간이었다. 잠을 자려면 다닥다닥 붙어서 자야 할 정도로 좁았기에 카일은 저곳에 들어가 잘 생각이 전혀 없었다.
가죽 주머니에서 커다란 가죽 천을 꺼낸 카일은 바위틈에서 자란 나뭇가지 두 개를 잘랐다. 나름대로 튼튼한 가지 끝부분에 가죽 천을 대어 끈으로 묶은 뒤 바닥에 세우자 ㅅ자 모양의 작은 천막이 만들어졌다. 천막 안쪽 바닥엔 털이 두터운 가죽을 깔았다.
천막이 완성되자 천막 앞에 작은 화덕을 만들고 위에 무쇠로 만든 작은 솥을 걸었다.
“와! 이걸 다 들고 온 거야?”
언제 왔는지 필론이 카일 곁으로 다가와 천막 내부를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그는 카일과 마찬가지로 무릎까지 오는 몬스터 가죽으로 만든 코트와 딱딱한 가죽조끼를 입고, 허리에는 십여 개의 비수와 장검을 매고 있었다.
“왔어요? 아직 식사 전이죠?”
“이제 왔으니 밥 먹을 틈이 있었을 리가. 혹시 지금 식사하려는 거면 같이 먹어도 되냐?”
“그럼요. 앉아요.”
카일은 품에서 낮에 먹은 육포를 꺼내어 끓는 물에 넣었다. 물이 적당히 끓어오르자 곡물가루를 넣어 스프를 끓였다. 그리고 가죽가방에서 기다란 주머니 하나를 꺼내었다.
안에서 나온 건 옹기로 만든 그릇 두 개였다.
필론은 카일의 옆에 놓인 가죽가방을 멍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보통 정찰을 나오면 체력의 안배를 위해서라도 되도록 물건을 줄여서 나오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카일이 들고 온 가죽가방 안에서는 무쇠로 만든 솥에서부터 곡물가루, 그릇까지 끝도 없이 나오고 있었다.
작은 천막과 밑에 깔아놓은 털가죽까지 생각한다면 분명 무시하지 못할 무게였다.
정찰에 나올 때 필론이 챙기는 건 딱딱한 육포와 몸을 덮을 수 있는 커다란 가죽 피풍의 하나가 전부였다.
이걸로 숲에서 하루를 보내는 게 보통인데, 카일이 들고 온 것은 상당한 무게의 야영 장비들이었다.
“가지고 온 것들이 너무 많은 거 아니야? 이 정도면 상당한 무게인데?”
“괜찮아요. 이 정도는 들고 다닐 수 있어요. 아버지랑 다닐 때도 가지고 다니던 물건들인걸요.”
“그래? 전에 대장님이랑 다닐 땐 이런 거 없었는데?”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카일이 가져온 물건들을 살피던 필론은 카일이 내민 스프를 조심스럽게 한입 떠먹었다.
“오! 카일 솜씨 좋은데~. 이거 맛있는걸? 나도 이런 거 가지고 다녀 볼까?”
“이건 그냥 제가 필요해서 하나씩 만들어서 가지고 다니다 보니 장비가 늘어난 것뿐이에요.”
“이런 걸 모두 직접 만들었단 거야?”
필론이 신기한 듯 장비들을 살펴보다가 뭔가 떠올린 듯 감탄했다.
“그러고 보니 너 타론 아저씨에게 야장 기술을 배웠다고 했지!”
“네. 3년 정도 배웠어요.”
“어쩐지.”
필론이 이해했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시 스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카일의 스프에서는 독특한 단맛이 은은하게 올라오고 있어 필론의 식욕을 자극했다.
이전보다 발전했다고는 하나, 샤론 마을은 기본적으로 낙후된 영지의 오지마을 중 하나였다. 그러니 단맛을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원체 설탕이 비싸고 귀해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이 아니면 먹을 수 없기도 했다. 그런데 카일의 스프에서는 독특한 단맛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필론이 순식간에 스프 한 그릇을 다 먹자 카일이 미소를 지으며 남은 스프를 필론에게 덜어주었다.
“와, 스프가 정말 맛있는걸! 여기서 단맛이 나던데 설마 설탕이라도 넣은 것이냐?”
카일이 필론의 말에 웃으며 말했다.
“설마요. 설탕이 얼마나 비싼데요. 오늘따라 스프가 잘 만들어졌나 보죠.”
“하긴….”
혀로 입술을 핥는 필론을 보며 카일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